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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연금 주식투자 늘리는 게 유일한 증시 회생책”

국내 증권·자산운용·선물(先物) 업계, 이른바 금융투자 업계엔 요즘 삭풍이 분다. 박종수(사진) 금융투자협회장에게 ‘자본시장 회생책이 없을까’ 듣기 위해 서울 여의도 협회 집무실을 찾은 지난 5일 때마침 폭설과 한파가 몰아쳤다. 한껏 웅크린 채 빙판길을 잰걸음 하는 넥타이족들의 모습에서 요즘 ‘한국 월가’의 냉기가 느껴졌다. 박 회장의 첫 마디 역시 “수년래 최악의 위기”라는 평이었다. 그러면서 ‘퇴직연금 투자 활성화’를 해법으로 내놨다. 현재로선 여의도 증권가에 훈풍을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다. 돈이 저절로 돈을 낳는 시대가 지난 만큼 이제 개인투자자들은 수익을 내기 위해 좀 더 공부하고 발품을 팔자는 당부도 했다.

삭풍 부는 여의도 증권가-박종수 금융투자협회장 인터뷰

-얼마나 어렵길래 ‘최악’이란 표현까지 쓰나.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충격이 엄청났지만 우리 경제와 증시가 생각보다 빨리 회복됐다. 하지만 이제는 구조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주식 거래대금이 줄고 펀드자금 유입이 정체돼 금투업계의 수익성이 크게 악화됐다. 1분기(4~6월)에 증권사 62곳 중 21곳, 자산운용사 82곳 중 34곳이 적자를 냈다. 3곳 중 1곳 이상이 수지를 못 맞췄다. 저성장의 장기화와 리스크 회피 심리로 시중 자금이 은행·보험 쪽으로만 몰린다. 2~3년 이런 식이면 자본시장과 업계가 고사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금투업계를 포함한 상장업계 전체로 내년 3월 위기설이 회자된다. 대선 후 그동안 쌓인 업계 부실 정리가 한꺼번에 몰릴지 모른다는 이야기인데….
“내년 상반기는 정말 어려울 거라는 데 동의한다. 하반기도 그리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증권사 최고경영자(CEO)들 만나면 일단 내년 한 해는 잘 버티자는 덕담을 나눈다. 내년 초 영업실적은 어닝 쇼크(크게 부진한 실적)일 가능성이 크다. 유로존이나 미국이 내년에 경제회생의 승부수를 던져야 할 테니, 선진국 경제지표가 호전될 것에 기대라도 걸어봐야 한다.”

-자본시장의 어려움은 관련 업계의 신뢰 위기 탓도 있지 않나.
“증권업계의 무리수로 투자자가 피해를 보는 사례는 안타깝다. 하지만 자본시장 ‘플레이어’들은 치열하게 이익을 추구하는 조직이라 무리수가 나올 수 있다. 그렇다고 잘못을 모두 업계 탓으로 돌리는 건 억울하다. 우리나라 고객들의 단기투자 성향이 고쳐지지 않는 한 자본시장 발전은 요원하다. 개인뿐 아니라 기관투자가도 그렇다. 열심히 만든 리서치 보고서를 안 믿고 투자자들이 떠도는 정보에 귀 기울이다 보면 주가조작도 하고 불완전판매 논란도 생긴다. 게다가 우리나라 자본시장 개방도가 90% 이상이라 변동성도 심하다.”

-자본시장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야 하나.
“업계가 모두 국민연금만 쳐다보고 있는데 여기에 퇴직연금을 보태 자본시장에 돈이 돌게 해야 한다. 여의도는 머니게임 하는 곳이 아니라 은행에서 돈 꾸지 못하는 벤처업체, 모험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하는 산업의 혈맥이다. 이런 곳에 자금 유입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우리 산업은 빈혈에 걸린다. 자본시장을 통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일자리가 창출되고 경제에 활력이 생긴다. 그뿐만 아니다. 퇴직연금이 증시에 유입되면 증권업계가 살고, 가입자들도 퇴직연금을 잘 굴려 은행 이자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다. 결국 산업과 우리 경제가 원활히 돌아간다. 퇴직연금은 미국의 경우 401K라는 퇴직연금제도가 있는데, 미국이 1980년대 세계 1위 펀드시장으로 도약할 때 이 제도가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퇴직연금 덕분에 다우지수가 짧은 기간에 급등해 1999년 1만을 돌파했다. 우리는 2005년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했는데 자본시장에 기여한 게 뭐 있나.”

-뭐가 잘못됐나.
“국내 퇴직연금 자산(54조원)의 92%가 예·적금 등 원리금 보장형 금융상품에 집중돼 있다. 주식·채권 등 실적배당형 금융상품 투자비율은 5%에 불과하다. 기업이나 금융사가 고수익을 적극 내려 하기보다 안전하게 원금 지키는 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지금처럼 은행 금리가 물가상승률 수준인 저금리시대에는 말이 안 된다.”

-그럼 어떻게 바꿔야 하나.
“퇴직연금의 주식투자 비중을 높여야 한다. 미 증시 통계를 보면 1801년 이후 200여 년 동안의 주식 연평균 수익률은 6.6%다. 길게 보면 은행 금리는 주식 수익률을 이길 수 없다. 주식 비중을 키우기 위해 현재의 계약형 퇴직연금제도가 기금형으로 바뀌어야 한다. 계약형은 금융회사가 개별 기업과 1대1 계약해 자금 운용을 책임진다. 영업력이 큰 은행들이 계약을 따내기 좋다. 문제는 은행들이 퇴직연금의 상당 부분을 자사 예금에 넣는다는 것이다.”

-기금형 퇴직연금제도는 뭐가 좋은가.
“퇴직연금 기금을 만들고 투자 전문가와 노사 양측이 모두 참여하는 전문운용위원회가 기금자산의 배분이나 운용을 전담한다. 퇴직연금이 활성화된 미국·호주 등 선진국이 채택한 제도다. 은행 예금뿐만 아니라 주식·채권 등 자본시장에 자산을 적극 배분하게 된다. 대형 연기금이 여럿 탄생해 증시에 풍부한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다.”

-베이비붐 은퇴 세대의 노후는 금융상품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투업계의 임무가 막중하다.
“은퇴자를 위한 특화상품을 많이 만들어야 할 것이다. 상품이 너무 일반적이다. 특수 계층을 위한 펀드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다만 금융 소비자들도 스스로 공부하고 발품 팔고 공교육에서도 금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점프 스타트’라는 미국 중학교 교재를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내가 봐도 풀기 힘든 문제가 있더라. 그저 예전에 아파트 사두면 오르듯이 금융상품을 시키는 대로 가입하면 예금 금리 이상 보장되던 시절은 지났다.”

-자본시장법 개정이 불투명하다.
“김석동 금융위원장도 그렇지만 많은 전문가가 대형 투자은행(IB) 육성을 갈망하고 있다. 금융의 삼성전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구호도 여기에 달렸다. 한국 정도의 경제규모에서 IB가 너무 취약하다. 자본금을 확충해 해외로 뛰쳐나가 빅딜 따 오고, 우리 제조업체도 지원하고…. 고만고만한 증권사들이 똑같은 먹잇감 놓고 다투는 일도 줄일 수 있다. 금융산업에 이미 우수 인력이 많이 들어와 있으니 이를 바탕으로 금융을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키워야 한다. 골드먼삭스 같은 글로벌 IB의 자본금은 80조원에 달한다. 우리 자본시장 규모는 미국의 25분의 1에 불과하다. 세계적 IB들은 석·박사 졸업 후 사회에서 활약하는 성인이고 우리 증권사는 초등학생 수준이다. 월가 시위에서 미국 IB가 탐욕적이라고 욕먹는다고 어린애 같은 우리 IB를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는가.”

정리=이태경 기자 unipen@joongang.co.kr



퇴직연금(Retirement Pension) 기업이 근로자의 미래 퇴직금을 금융회사에 위탁 운용하는 제도다. 2005년 도입됐다. 10년 이상 불입하면 만 55세부터 5년 이상 기간에 걸쳐 매달 연금을 수령할 수 있다. 8월 말 현재 가입자 수는 394만 명, 적립액은 54조9350억원에 달한다.

박종수(65) 40여 년간 은행·증권업계에 종사한 정통 금융맨. 헝가리 대우은행장과 대우증권·우리투자증권 사장을 거쳐 지난 2월 제 2대 금융투자협회장에 취임했다. 경기고와 서울대 무역학과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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