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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수·방의석, 맨손으로 운수업 일으킨 ‘자동차왕’

1930년대 경주 고적유람 택시. 1926년 스웨덴(瑞典) 왕세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경주 봉총(鳳塚)을 방문해 이름을 서봉총(瑞鳳塚)이라고 지었을 정도로 경주는 유명 관광지였다. [사진가 권태균]
시인 김동환(金東煥)이 1929년부터 간행하던 삼천리는 처음에는 민족주의를 표방했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1937년경부터는 친일잡지로 돌아섰다. 1942년 3월부터는 제호(題號)마저 대동아(大東亞)로 바꿔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했다. 삼천리는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별건곤과 쌍벽을 이루면서 민족문화를 중시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식민지 부호들 ⑥ 금광 열풍과 산업 재편

삼천리는 1934년 5월호에서 세 가지를 권고한다는 ‘권고 삼칙(勸告三則)’을 통해 당시 부호들의 이름을 열거했다. 세 가지 권고란 첫째 개인의 이해를 버리고 ‘누구나 민족과 사회의 흥망성쇠에 몰두하는 의인, 지사, 정치인이 되자’는 것이고, 둘째는 ‘민족문화 건설의 성십자군(聖十字軍) 앞에는 오직 일파(一派)만이 있을 뿐’이라면서 ‘파벌(派閥)을 짓지 말자’는 것이었다. 셋째로 ‘이 땅의 큰 재산가’들이 ‘빛나는 문화사업에 사재의 대부분을 기울여 주기를 바란다’고 권고하고 있다.

서울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앞의 택시. 1930년대 서울의 공식 택시요금은 장소를 불문하고 1원 균일이었다.
그러면서 큰 재산가로 ‘김기덕(金基德), 홍종화(洪鍾華), 최창학(崔昌學), 김태원(金台原), 박흥식(朴興植), 박용운(朴龍雲), 김응수(金應銖), 방의석(方義錫), 염경훈(廉璟勳), 박영철(朴榮喆), 서병조(徐丙朝)’ 등의 이름을 열거했다. 민대식·규식, 김성수·연수 형제와 방응모 등이 빠진 것은 민씨 형제는 휘문학교를, 김성수 형제는 동아일보와 중앙고보를, 방응모씨는 조선일보를 경영함으로써 각각 문화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영철, 하룻밤 연회에 부장 3년치 월급 써
삼천리가 열거한 ‘이 땅의 큰 재산가’들에 민씨, 김씨 형제와 방응모씨 등을 보태서 그 면면을 분석해 보면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경제상황이 그대로 드러난다.

황해도 은율의 금산포철광산. 전국 각지에 금광 열풍이 일면서 철광석 광산도 함께 개발되었다.
첫째 금광 부호들이 절대 다수라는 점이다. 최창학, 김태원, 박용운, 방의석, 염경훈, 방응모는 모두 금광으로 부를 축적한 인물들이었다.
박용운(朴龍雲)은 자신이 소유한 신연금광(新延金鑛)을 미쓰이(三井:혹 三菱이라는 설도 있음)에 120만원에 팔아넘겨 최창학, 방응모에 뒤이어 수만 금점꾼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인물이다. 평안북도 삭주군(朔州郡) 구곡면(九曲面) 연삼동(延三洞)에 있던 신연금광은 연간 24만원어치의 금을 캐던 금광이었다. 연삼동은 냇물을 기준으로 양쪽에 각각 박용운의 신연금광, 최창학의 삭주금광이 있었던 ‘엘도라도’였다.

삼천리 1934년 5월호에 ‘전조선(全朝鮮)의 대금광 순례(大金鑛巡禮)’라는 글을 쓴 필명 본병정(本兵丁)이 ‘실로 고양이 이마만 한 이 좁은 지대에 조선에서 둘째가는 큰 금광이 두 개씩이나 가로눕고 있다’고 말한 게 과장이 아니었다. 박용운은 신연금광을 팔아서 고향인 신의주에 신연철공소(新延鐵工所)를 세워서 광산에서 사용하는 기계를 제작 판매했다.

1934년에 전국 각지에서 연간 5만원어치 이상 금이 나오는 금광이 86개소, 10만원 이상이 37개소에 달해서 매년 총 3000만원어치의 금이 나왔다. 계산상으로는 매년 30명의 백만장자가 나올 수 있으니 너도나도 금광에 매달렸고, 그래서 장비 사업도 전망이 좋았다. 1930년대 중반까지 식민지 조선의 주도산업은 금광이란 1차 산업이었고, 기껏해야 금광에 쓸 장비를 만드는 2차 산업이 있었다는 뜻이다.

광산허가권을 가진 총독부 광무과(鑛務科)와 장곡천정(長谷川町:현 소공동, 하세가와초)의 측량지도 파는 가게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금맥(金脈)을 발견했다고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 착굴하려면 상당한 자본이 있어야 했다. 박용운의 신연금광은 설비투자만 30만원이었기에 12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최창학의 삭주금광도 설비투자가 15만~60만원에 달했다. 금광이 성공하려면 족미식(足尾式) 착암기(鑿岩機)가 필요했는데 일본 도치기(<6803>木)현에 있는 광산도시 족미(足尾:아시오)에서 사용했던 종류의 착암기를 뜻했다. 여기에다 리어카라도 끌 수 있는 궤도(軌道)를 깔아야 했는데 이런 자본이 없으면 최소한 300원에서 수천원의 이른바 발견료(發見料)를 받고 허가권을 넘겨야 했다. 총독부 광무과에 내는 금광 등록세가 100원, 허가세가 200원으로 도합 300원이었다.

앞에 열거한 ‘이 땅의 큰 재산가’들 중 민대식, 김성수 형제와 대구 출신 김태원·서병조, 전주 출신 박영철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함경도(김기덕·홍종화·염경훈·방의석)나 평안도(최창학·박흥식·김용운·김응수·방응모)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었다.

삼천리 1932년 12월호에서 한양학인(漢陽學人)은 “조선에서 부자라고 치는 이들은 대개 조선전래(祖先傳來)의 토지를 수호함이 아니면 합병 이전에 가졌던 재산을 그냥 묵수(墨守)하는 것에 불과하다”면서 민모(閔某), 박모(朴某) 등의 예를 들고 있다. 민모는 민대식의 부친인 민영휘이고 박모는 박영철로서 둘 다 유명한 친일파였다.

이남 출신 부호들은 금광 개발로 부호가 된 김태원과 부모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은 김성수 형제 정도를 빼면 대부분 나라 팔아먹은 대가로 부호가 된 인물들이었다. 민영휘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상업은행 두취(頭取:은행장) 박영철도 일본 육사 출신으로 망국 후 강원·함북지사로 승승장구했던 친일파였다.

삼천리 1934년 6월호는 조선상업은행장 박영철이, ‘작년 총독부 대관(大官) 이하 재계(財界) 유력자를 초청해서 신년회를 베풀었는데 물경(勿驚) 하룻밤 연회에 3000원을 썼다’고 말하고 있다.

1934년 조선·동아일보의 부장급 기자의 월급이 70~100원이고, 조선일보에 ‘임꺽정(林巨正)’을 연재해서 최고 고료를 받던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의 한 달 고료가 100원이고, 염상섭(廉想涉)·이기영(李箕永) 등 장안의 지가를 올리던 문호들의 회당 신문 연재료가 2원에 불과했으니 박영철의 연회 규모를 알 수 있다.

서울택시, 시골뜨기에겐 바가지 요금 일쑤
대구 부호 서병조는 나라 팔아먹을 위치에 있지는 못했지만 일제 문서에서 ‘대구 민단(民團) 창립 당시부터 일한병합 이래 시정방침의 철저한 선전에 노력했다’고 평가할 정도의 적극적 친일파였다. 반면 함경·평안도 출신 부호들은 거의 대부분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인물들이었다. 평안도 용강의 지주 집안이었던 박흥식을 제외하고 일제의 나진항 동해 종단항(終端港) 결정으로 부동산 부호가 된 김기덕·홍종화는 물론 나머지 부호들도 모두 적빈(赤貧) 출신이었다.

이 중 김응수와 방의석은 자동차 영업, 즉 운수업으로 성공한 부호들이었다. 김응수는 평안북도에서 자동차 운수업에 뛰어들어 10년 내외에 수십만원의 자산가가 되었는데, 금광이 아닌 분야에서 부를 움켜쥔 특이한 경우였다. 1935년 삼천리에서 ‘오늘날 좋은 자동차 노선을 가졌기 때문에 부자가 된 사람으로 평북에는 평안택시회사 사장 김응수씨가 있고 함남 북청에는 함흥택시회사 사장 방의석씨가 있다’고 쓴 것처럼 평안도의 ‘자동차왕’은 김응수, 함경도의 자동차왕은 방의석이었다. 조선에서 자동차 영업은 1917년 민영휘의 아들 민규식이 시작했다고 전해지지만 정작 운수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만주로 가는 길목이었던 평안도, 함경도 사람들이었다.

이 무렵 서울을 비롯한 전국 명승지에는 택시들이 적지 않았는데, 별건곤 1929년 9월호는 ‘2일 동안에 서울 구경 골고루 하는 법’이란 글에서, ‘밖으로 나오면 자동차가 열을 지어 서 있는데 모두 시내(市內) 1원 균일(均一)의 택시지만 1원 균일이라고 알고 섣불리 타면 시골뜨기인 줄 알고 이 핑계, 저 핑계로 2원 이상 받기 예사이니 서울에 처음 올라오는 길에는 타지 않는 것이 좋다’고 권하고 있다.

그런데 김응수는 운수업에서 번 돈으로 평양에 백화점을 지었다가 큰 손해를 본 반면 방의석은 운수업으로 서울까지 진출했다. 삼천리 1935년 1월호는 ‘함경도 북청의 유수한 실업가 방의석씨는… 금번에 서울에 대규모 택시업을 개시하려고 경성(京城)택시회사를 조직하는 한편, 시내 장곡천정(長谷川町)에 2층 양식의 사옥을 낙성(落成)해서 영업을 개시했는데 택시 50, 60대를 두어 장차 서울 택시계의 패권을 잡을 기세”라고 기록하고 있다.

방의석의 사업 기반은 함경도의 공흥(共興)자동차주식회사였다. 동아일보 1936년 5월 6일자는 방의석의 공흥자동차주식회사에서 함경도 국경지대의 혜산진(惠山鎭)과 신갈파(新乫坡)를 왕복하는 혜산(惠山)자동차 주식회사를 인수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인수가격은 3만5000원 정도로 추정했는데 신갈파는 함경도 삼수군에 있는 면이지만 조선 초기부터 중국을 마주한 국방의 요지이자 대안(對岸)무역의 거점 역할을 했던 교통의 요지였다.

방의석은 객주(客主) 사환으로 출발해 거부가 되었는데 이런 경력 때문인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도 많이 했다. 하지만 1941년에 중추원 참의가 돼 이른바 ‘황군(皇軍) 위문’을 다녀온 뒤 ‘신동아의 새 광경을 감격으로 목도’ 운운(삼천리 1941년 3월호)하는 친일파로 전락했다가 해방 후 반민특위에 의해서 수감되기도 했다. 일제 군대가 계속 욱일승천해야 만주로, 중원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식민지 운수업의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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