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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아다지오, 끝은 프레스토

레프 톨스토이(Лев Николае вич Толстой,828~1910)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대학 교육에 실망하고 군대 생활과 방랑 끝에 농민 계몽에 힘쓴다. 서른넷에 결혼한 후『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등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걸작들을 집필했다. 금욕과 육체노동을 핵심으로 하는 ‘톨스토이즘’을 체계화하고, 자신의 재산과 저작권을 기부하겠다는 결심 때문에 아내와 심한 불화를 겪다가 가출해 폐렴으로 숨을 거뒀다.
아다지오 소스테누토(adagio sostenuto)! 음 하나하나를 충분히 눌러 무겁고 느리게 연주하라는 작곡가의 명령이다. 베토벤의 아홉 번째 소나타 ‘크로이처(Kreutzer)’의 첫 번째 악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바이올린이 구애하듯 이어지는 구슬픈 선율과 피아노가 그 구애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되는 고혹적이지만 격렬한 하모니.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밀고 당기면서 만드는 묘한 긴장과 흥분 속에 몸을 던지다 보면 누구나 남녀의 격정적인 사랑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톨스토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1890년 톨스토이는 사랑과 결혼에 대한 온갖 판타지를 과격하게 해체하는 소설에 ‘크로이체르 소나타’라는 이름을 붙인다. 또 다른 작품 ‘악마’와 함께 톨스토이가 인생의 후반기에 자신의 결혼관을 담은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톨스토이는 결혼이 참다운 사랑의 결실이라는 통념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그에 따르면 결혼의 본질은 정신적인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욕정에 있기 때문이다.

강신주의 감정 수업 <25> 욕정

‘크로이체르 소나타’가 당시 금서 취급을 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무리 윤리적인 이념으로 부정하려 애써도 제거하기 힘든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혼의 본질이 욕정에 있다는 주장을 공개적인 자리에선 쉽게들 반박하지만, 사적인 삶에서 욕정만큼 중요한 것이 더 있을까. 이쯤에서 스피노자는 욕정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욕정(libido)이란 성교에 대한 욕망이나 성교에 대한 사랑이다. ...성교에 대한 이런 욕망은 적당한 경우에도, 그리고 적당하지 않는 경우에도 보통 욕정이라고 일컬어진다.”(『에티카』 중)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성과 성교하고 싶은 욕망 혹은 성교하기를 좋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욕정이다. 인간의 성교, 그러니까 섹스를 동물적인 것으로 폄하하지는 말자. 발정기에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하는 동물의 행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섹스는 욕망이나 사랑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의미심장한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욕망이나 사랑은 삶의 힘을 유지하거나 증진시킨다고 생각되는 대상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섹스는 분명 우리의 삶을 유지하거나 힘을 증진시키는 대상이다. 인간의 섹스가 동물들의 결합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잊지 말자. 우리 개개인의 욕정은 개체적인 의미를 지닌 소중한 감정이다. 흥미로운 것은, 사회적 통념은 종족 보존을 위해 수행되는 섹스만이 정당한 섹스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말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인간에게 발정기 때 동물의 성생활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톨스토이가 ‘악마’라는 단편소설에서 집요하게 추적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것 아닌가. 욕정에 사로잡힌 주인공 예브게니는 자신의 욕정을 긍정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만다.

아무리 애써도, 짚을 나르는 스테파니다의 검은 눈동자와 붉은 머릿수건이 두어 번 눈에 띄었다. 한두 차례 곁눈질로 그녀를 쳐다본 그는 또다시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바로 다음 날 다시 마을의 곡식 창고로 가서 젊은 여자의 낯익은 모습에 하염없이 애정의 눈길을 보내면서 아무런 이유 없이 두 시간을 거기서 보냈을 때 그는 자신이 파멸했음을,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이 파멸했음을 깨달았다. 또다시 그 고통이, 그 모든 끔직한 공포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구원은 없었다. ... ‘정말이지 그녀는 악마다. 악마가 분명해. 정말이지 그녀는 내 의지와는 반대로 나를 조종했어. 죽여야 하나? 그래. 두 가지 출구밖에는 없다. 아내를 죽이든가 아니면 그녀를 죽이는 것.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 … 아아, 그래, 제3의 출구가 있다, 있어’. 그가 조용히 소리 내어 말했다. 순간 그는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래, 자살하는 거다, 그들을 죽일 필요는 없어’.

이미 참한 아내를 두고 있던 예브게니는 과거 섹스 파트너였던 스테파니다의 매력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는 영지를 감독하는 존경받는 인물이 되려는 사회적 욕망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불행히도 스테파니다는 그런 세속적 욕망과 평판을 버리고 자신의 품에 안기라고 계속 유혹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은 스테파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예브게니 내면의 욕정 때문에 생기는 착시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욕정에 이끌려 스테파니다와의 관계를 지속한다면 모든 사회적 평판을 잃고 좌초하리라는 사실을 예브게니는 직감하고 있다. 그가 스테파니다를 ‘악마’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여기서 스테파니다는 개인적 욕정의 세계를, 그리고 아내는 사회적 평판의 세계를 상징한다. 지금 예브게니는 두 가지 세계 중 어느 것도 포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결론은 두 세계를 그대로 남겨두고 자신만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어쩌면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예브게니의 뇌리에는 ‘크로이처’의 마지막 세 번째 악장 선율이 ‘아주 빠르게’, 그러니까 베토벤의 지시대로 ‘프레스토(presto)’로 지나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중철학자『. 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상처받지 않을 권리』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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