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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쉬운 옷’ 돌풍... 27세 중국계 청년 패션 명가 수장으로

미국 디자이너협회장이자 세계적 디자이너인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에겐 잊지 못할 경험이 있다. 어느 날 길을 가다 누군가 입고 있던 스웨터에 시선이 꽂혔다. 뒤쫓아 가 “어느 브랜드냐”고 물었다. 뜻밖에도 무명의, 그것도 스무 살 디자이너가 만든 옷이었다. 퍼스텐버그는 당장 그를 수소문했다. 그리고 만난 자리에서 자신을 위해 스웨터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청년은 패션계 거물의 부탁을 보기 좋게 거절했다. 자신의 브랜드 론칭 준비로 바쁘다는 것이 이유였다.

‘발렌시아가’ 동양인 첫 수석디자이너 알렉산더 왕

7년 전 그 당돌했던 디자이너가 이제 세계적 패션 하우스의 수장이 됐다. 알렉산더 왕(27). 그는 3일 프랑스 브랜드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됐다. 15년간 브랜드를 이끌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의 빈자리를 젊은 중국계 청년이 당당히 차지한 것이다. 아시아계 디자이너가 유서 깊은 패션 브랜드의 수장이 된 최초의 사례이기도 했다. PPR그룹(발렌시아가·구찌·보테가 베네타 등을 소유한 명품 그룹)의 프랑수아 헨리 피노 회장은 발탁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발렌시아가의 현대적이고 혁신적인 스타일을 뛰어난 창의력으로 재해석해 낼 인물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나고 자란 그는 18세에 패션디자인스쿨 파슨스에 입학하며 뉴욕에 둥지를 틀었다. 2005년 학교를 중퇴한 뒤 자신의 이름을 딴 니트웨어를 제작했고, 2년 뒤 여성복 컬렉션을 정식으로 선보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데뷔 1년 만에 200여 매장에 들어가는 경이적인 활약을 보였고, 2008년엔 미국패션협회와 보그가 선정한 패션 어워즈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를 계기로 안나 윈투어와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패션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이듬해엔 스와로브스키가 뽑은 ‘올해의 여성복 디자이너’, 2011년엔 미국패션협회가 수여하는 ‘올해의 디자이너’에 이름을 올렸다. 남성복은 물론 세컨드라인, 향수까지 브랜드를 넓혀가면서 50개국에 브랜드를 진출시키기도 했다.

왕은 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지극히 대중적인 패션으로 승부했다. 미국 스포츠 룩을 바탕으로 도시 감성을 반영한 캐주얼 룩이 대다수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멋을 살렸다. ‘누구나 입기 쉬운 옷’ ‘거리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옷’을 지향했다.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난 신인 디자이너”라는 평이 그래서 나왔다.

발렌시아가가 그를 점찍은 배경도 이런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WWD·가디언 등은 “파리 럭셔리 브랜드가 엘리트주의, 쿠튀르적(고급 맞춤복) 접근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평했다. 지금껏 발렌시아가는 키치·컬트적 디자인이 압도적이었다. 가을·겨울 컬렉션에 화려한 꽃무늬를 등장시키는가 하면, 합성고무로 이브닝드레스를 선보이는 식이었다. 하지만 점점 트렌드는 ‘젊고 쉬운 옷’이 대세가 되고 있고, 브랜드로서는 ‘구원투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한편에선 그가 중국계라는 점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왕에게 중국 시장 진출의 특별한 임무가 부여될 것”이라고 점쳤다. 실제 발렌시아가는 현재 10개인 중국 매장을 급속히 늘려가고 있고, 동남아에서 입지를 다지는 데 전력투구 중이다. 왕 역시 과거 인터뷰에서 “나는 그저 뉴욕의 내 또래와 다를 바 없다”라고 했지만 베이징에 1524㎡ 규모의 매장을 내고, 수시로 홍콩과 상하이를 오가고 있다.

이번 발탁까지 그에 대한 루머는 종종 떠돌았다. ‘LVMH가 지분을 사들일 것’ ‘왕이 디오르에 영입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그는 이에 대해 강한 반론 대신 가능성을 열어놨다. “뭔가 브랜드 외 일을 한다면 기존에 할 수 없었던 완전히 다른 것을 하고 싶다. 내 스스로 자연스럽게 끌리는 적당한 기회가 올 것이다”라는 얘기였다. 이제 거침없는 신진 디자이너의 ‘다름’을 지켜볼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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