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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91) ‘천중밍 맨’ 장제스





‘천중밍 맨’ 장제스, 광둥군 반란 소식에 쑨원 편으로

외국생활 오래한 사람일수록 토종(土種)들을 얕잡아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스탈린이 마오쩌둥을 대수롭지 않게 봤던 것처럼 쑨원도 장제스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참모가 고작이라며 실권을 주지 않았다.



장제스의 자질을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광둥군(<7CA4>軍) 총사령관 천중밍(陳炯明·진형명)이었다. 쑨원이 장제스를 광둥군 작전과장에 임명하자 장제스는 반발했다. 기분 나쁘다며 사직원을 냈다. 천중밍이 달려와 애걸하다시피 만류했다. “전쟁에 백 번 패해도 상관없다. 너만 있으면 된다.” 이 일을 계기로 장제스도 천중밍을 좋아했다.



1922년 4월, 천중밍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쑨원이 천중밍을 광둥군 사령관직에서 내치자 명분을 확보한 천중밍은 쾌재를 불렀다. 광둥군은 천중밍의 사병이나 다름없었다. 천중밍의 속셈을 몰랐던 장제스는 쑨원을 찾아갔다. 헛소문이라며 천중밍을 두둔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무안을 당하자 사직원을 내고 광둥을 떠났다. 고향으로 가는 배 안에서 천중밍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다. “환난을 함께 한 기간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천 리 밖에 떨어져 있어도 사령관의 음성과 숨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의외의 행동으로 사람을 당황케 하는 것이 장제스의 특징이었다.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위기를 다루는 수완이 탁월했다. 심지어는 위기를 스스로 만들 줄도 알았다. 천중밍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향에서 달려온 장제스는 쑨원 편에 섰다. 천중밍도 놀라고 쑨원은 더 놀랐다.



천중밍의 반란을 계기로 쑨원은 장제스를 신임하기 시작했다. 성격 때문에 골치도 많이 썩었다. “군인이다 보니 난폭한 건 둘째 치더라도, 화부터 내는 바람에 말 걸기가 힘들다. 항상 주위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고 툭하면 사표를 내던진다. 아무리 말려도 소매를 뿌리치기 일쑤다. 일단 낙향하면 내가 전보를 보내도 모른 체 한다”며 측근들에게 푸념할 정도였다. 실제로 장제스는 1918년 7월부터 1924년 9월 황포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기까지 사직과 복직을 14차례 반복했다.



처음 만난 날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1922년 12월 8일 장제스의 일기에 쑹메이링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쑹 여사와 인사를 나눴다. 평생 반려자로 삼을, 가장 이상적인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은 서둘러야 한다.”



장제스는 쑨원에게 속내를 털어놨다. “혁명에 전념하기 위해 고향에 있는 조강지처와 관계를 청산했다. 처제 쑹메이링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 나서주기 바란다.” 기습을 당한 쑨원은 집사람과 의논하겠다며 둘러댔다. 그날 밤 쑨원은 쑹칭링에게 온갖 싫은 소리를 다 들었다. 쑹메이링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미국 유학을 마친, 그것도 대부호 쿵샹시(孔祥熙·공상희)와 쑨원의 처제이다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청혼이 줄을 이었다. 쑹메이링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나같이 미국에 있는 약혼자만 못했다. 육군 상장(上將) 장쉐량(張學良·장학량)만은 예외였다. 장쉐량이 동북에서 자가용 비행기 몰고 상하이에 올 때마다 산책은 물론이고 극장과 댄스홀도 함께 다녔다. 나이도 어린 게 무슨 놈에 결혼은 그렇게 일찍 했는지, 약이 올랐지만 뭐든지 하자는 대로 했다. 장쉐량도 “결혼은 일찍 할수록 손해다. 내가 미혼이라면 쑹메이링은 내 여자”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쑹메이링의 눈에 장제스 따위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



장제스는 무슨 일이건 중도에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5년에 걸친 구애가 시작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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