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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18기 정치국위원 열전 ③] ‘책사’ 왕후닝(王?寧)













왕후닝(王寧·57)은 학자다. 1995년 4월 상하이 푸단(復旦)대 법학원 원장이던 그는 쩡칭훙(曾慶紅)과 우방궈(吳邦國)의 추천을 받아 베이징 중앙정책연구실로 상경했다. 이미 87년 13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자대회부터 중앙의 주요 이론 문헌 작성에 참여했던 그다. 1995년부터 그의 본격적인 정치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2002년 1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에 당선됐다. 2007년 17대에서는 6인의 중앙서기처 서기직 마지막에 이름을 올렸다. 올 18대에서 ‘당과 국가의 영도자’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됐다. 지방 근무 경력이 전무한데도 정치국 위원에 선출됐다. 중국에서는 교수와 정치가 사이의 벽이 높다. 폴리페서가 많은 한국과 다르다. 왕후닝은 직함이 많다.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위원, 중앙정책연구실주임…. 공식 직함 외에도 ‘중앙 수석 브레인(智囊, 꾀주머니)’, ‘저명 학자’ 등으로 불린다. 그 중 왕후닝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호칭은 ‘독서인(讀書人, 책 읽는 사람)’이다. 어떤 이가 그를 브레인 혹 학자로 소개하면 그는 즉시 “아닙니다. 난 단지 독서인일 뿐입니다”라고 바로 잡는다. “몇 권의 좋은 책을 읽고, 몇 명의 좋은 학생을 가르치고, 몇 권의 좋은 책을 쓰는 것.” 왕후닝이 말하는 그의 이상이다. 인재가 많은 중국이지만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에 이어 시진핑(習近平)까지 세 명의 ‘황제’를 모시는 책사는 역사상 선례를 찾기 어렵다. ‘중난하이(中南海, 중국 최고 지도자 집단 거주지)의 최고 꾀주머니’ 왕후닝은 어떤 사람인가 살펴봤다.



왕후닝은 1955년 이름의 후( )가 의미하듯이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원적은 산둥(山東)의 예현(掖縣)이다.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문화대혁명이 터졌다. 학교는 문을 닫았다. 그는 집에서 책만 읽었다. 그는 각종 집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왕후닝은 생각하기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는 당시부터 “국가와 민족이 무엇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어떤 제도가 가장 이상적인지” 등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중학 시절부터 나라의 진로를 고민했다.



1971년 왕후닝은 중학교를 졸업했다. 건강 때문에 다른 학생들과 같이 시골로 내려가 펼치는 지식청년활동에 참가하지 못했다. 집에서 독학을 이어갔다. 당시 집에는 읽을 만한 변변한 책이 없었다. 그럼에도 왕후닝은 마치 걸신들린 아이가 먹거리를 찾듯 손에 잡히는 책은 모두 읽어 치웠다. “당시 비록 특별히 가치 있는 책은 없었지만 두 가지 좋은 버릇을 갖췄다. 하나는 사고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보편적이고 사소한 일이라도 조리 있게 분석하는 요령을 체득했다. 둘째, 책 읽는 습관을 스스로 갖췄다. 지금까지도 나는 책 읽을 때가 가장 즐겁다.” 왕후닝의 회상이다.



1988년 싱가포르에서 국제 대학생 중국어 변론대회가 열렸다. 대륙에서는 푸단대학 팀이 참가했다. 왕후닝은 푸단대학 팀의 고문이었다. 대만대학 팀에 맞서 승리를 거뒀다. 당시 팀원이었던 왕후닝의 제자 장창젠(蔣昌建)은 스승을 이렇게 회고한다. “‘독서인’은 겸손한 호칭이 아니다. 진정 독서인이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몇 되지 않는다.” 왕후닝이 푸단대에서 교편을 잡을 당시의 일이다. 푸단대 주위를 지나는 주의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문과대 건물의 6층의 불 켜진 방을 기억했다. 이 방은 비가 오건 바람이 불건 큰 태풍이나 번개가 쳐도 불빛이 꺼지지 않기로 유명했다. 이 방은 바로 국제정치학과 컴퓨터 실로 왕후닝 교수가 책을 읽고, 글을 쓰던 곳이다. “왕 교수의 연구실에는 어떤 서재 운운하는 거창한 이름도 없었다. 그는 단지 ‘공장’이라고 불렀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는 그는 하루 14시간씩 쉬지 않고 ‘공장’에서 일할 뿐이었다.”



◇’한 눈에 열 줄씩’ 독서광 왕후닝



왕후닝은 스스로 책 보는 것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독서와 사고를 가혹할 정도로 요구했다. 상하이시 사회과학계연합회 당조직 부서기 쌍위청(桑玉成)은 당시 푸단대 대학원생이었다. 그는 왕후닝 교수의 ‘서방정치학 명저 선독’이란 과목을 수강했다. 왕후닝은 먼저 학생 앞에서 강의를 펼친 뒤, 학생들과 토론을 펼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왕 교수는 매 주 한 권씩을 정독하고, 논문 한 편씩 써 올 것을 요구했다. 많은 준비가 필요했지만, 확실히 유익한 수업이었다. 지금도 왕후닝 교수가 커멘트를 적어 준 논문들을 모두 갖고 있다.”



쌍위청의 왕후닝에 대한 기억은 이어진다. “왕 교수는 정말 책을 빨리 읽었습니다. 심오한 이론서적도 그는 술술 넘기듯이 읽었습니다. 그는 당시 ‘한 눈에 열 줄씩 읽는 것(一目十行)’이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과학적인 각도에서 보면 ‘일목십행’식 독서법은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쌍위청은 “왕 교수의 일목십행 독서법은 그가 전공에 대한 기초가 튼튼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왕후닝은 당시 푸단대 최고의 인기 교수였다. 국제정치학과가 아닌 학생들도 그의 강의를 즐겨 들었다. 당시 푸단대에서 가장 젊은 교수인 데다가, 개인적인 매력도 넘쳤다. 그의 강좌는 항상 학생으로 가득 찼다.

당시 왕후닝의 ‘정치학 원리’ 강의를 수강했던 안(安) 모씨는 “문과 강의가 학생들에게 인기 끌기는 쉽지 않았음에도 왕후닝 교수의 강의는 항상 정원 초과였다”고 회고한다. “왕 교수는 강단에 가방도 책도 들고 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강의 준비는 세밀했다. 말에는 순서가 있었고, 논리는 엄밀했다.”



왕후닝 교수의 인기에는 그의 시험 스타일도 한 몫을 했다. “당시 오픈북 시험을 허용한 교수는 거의 없었다. 그가 거의 유일했다. 한 과목에 보통 두 세 문제를 냈다. 논술에 어떤 저서의 어떤 내용을 외우느냐를 평가하지 않았다. 학생 각자의 관점에 따른 논리를 테스트했다. 즉 문제를 보는 각도가 논리적인지 여부를 평가했다.”



안 씨는 당시 왕후닝의 인기는 지금 한국에서도 ‘삼국지 강의’로 인기 높은 이중톈(易中天)에 버금갔다고 회상한다.



◇정치가 왕후닝의 앞날은



“누가 정치가인가? 죽음 앞에서도 변하지 않는(至死不 ) 신념을 갖고, 동서양 학문에 통달한(學貫中西) 지식을 갖췄으며, 숭고한 덕행으로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는(高山仰止) 인격을 갖추고, 높고 먼 곳을 내다보는(高瞻遠 ) 시야를 갖고, 백 번 꺾여도 휘지 않는(百折不撓) 의지를 갖고, 온갖 냇물을 다 받아들이는 바다와 같은(海納百川) 도량과, 대세를 파악하는(縱覽全局) 능력을 갖춰야 한다. 중국의 민주혁명은 걸출한 지도자 집단에 의지해야 한다. 바로 지금 이들이 필요하다.” 왕후닝의 저서 『정치적 인생(政治的人生)』에 나오는 구절이다.



1974년 여름 왕후닝은 ‘공농병학생’ 신분으로 상하이사범대학 간부외국어훈련반에 진학했다. 여기서 3년간 프랑스어를 배웠다. 만 19살 때였다. 당시 화동사범대 서양어과는 ‘대사훈련반’으로 불렸다. 외교 최전선에서 근무할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보통 학생이었다면 그는 졸업 후 외교관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졸업할 무렵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대입시험과 대학원 입학시험이 재개됐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학문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잠시 상하이시 출판국에서 간부로 활동한 뒤 1978년 10월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뒤 첫 정치학 전공 대학원생이었던 셈이다. 그의 스승은 중국마르크스주의 경제이론과 ‘자본론’ 연구의 권위자 천치런(陳其人) 교수였다.



왕후닝이 천치런 교수에게 사사를 받을 당시 그는 여자 동급생과 사랑을 나눴다. 이름은 저우치(周琪), 베이징 출신의 미인이었다. 확인되지 않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국가안전부 소속의 정치정보 분석 담당 차관급 간부 저우치룽(周其榮)으로 알려진다. 그는 중국 국제전략 전문가로, 일찍이 베이징 국제관계사학회 이사장을 맡은 적이 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저우치 역시 국제정치학과를 선택했고, 푸단대학에 합격하여 왕후닝의 동급생이 되었다. 왕후닝 역시 80년대 상하이 국가안전부와 관련을 맺고 여러 이론 활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진다.



80년대 왕후닝은 개혁파 지도자 자오쯔양(趙紫陽)의 지지를 받았다. “왕후닝은 자오쯔양의 정치 사전”이란 말이 돌았다. 1996년 왕은 저우치와 이혼했다. 98년에는 후난(湖南) 출신의 띠동갑 박사생 쑤자링(蕭佳靈)과 비밀리에 결혼했다. 이후 둘은 다시 헤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1985년의 일이다. 쎼시더(謝希德) 당시 푸단대 총장은 29세에 불과한 조교를 풀타임 부교수 승진 서류에 서명했다. 서명란 옆에 “(왕후닝의)부교수 승진을 동의한다”고 적었다. 전국 최연소 부교수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1986년 그는 중국은 개혁 과정에서 중앙의 권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으며 반드시 강력한 정부의 힘에 의지해 경제개혁의 심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1987년 5월 그는 『비교정치분석』이란 저서를 출판한다. 여기서 왕후닝은 서로 다른 계층과 개인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 관심, 정치 참여 사이의 상호관계를 분석했다. 그의 저서가 반향을 일으키자 신화통신사 산하의 격주 시사잡지 ‘반월담(半月談)’은 그의 저서를 소개하는 글을 실었다. 1988년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로 갔다. 1년간 방문교수로 머물렀다. 귀국 후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주임교수가 됐다. 1994년 푸단대 법학원 원장으로 승진했다.



왕후닝을 장쩌민에게 소개한 이는 전임 상하이 시장이자 장쩌민이 멘토로 모시던 왕다오한(汪道涵)이다. 베이징에 올라가기 전 왕후닝은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권위주의적 지배를 지지했다. 점진적으로 당내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전 사회로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쩌민은 왕후닝의 ‘신권위주의’에 매료됐다.



“왕후닝은 학술적으로 뛰어나고 정치적으로 현명하다. 그는 다른 이들의 자신의 관점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자신만의 논리를 만들지 않았다.” 그의 동문 진찬룽(金燦榮) 중국인민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은 왕후닝의 정치적 ‘촉’을 신뢰한다.



왕후닝은 최고지도자의 이론참모다. 장쩌민이 해외 순방에 나갈 때마다 왕후닝은 ‘주석특별비서’ 신분으로 수행했다. 후진타오 10년 동안 이 신분은 변화가 없었다. 그 사이 왕후닝은 장쩌민의 ‘3개대표론’과 후진타오의 ‘과학발전관’ 수립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왕후닝의 취미는 무협소설 읽기다. 무협소설이 독자에게 교묘한 구상과 대담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킨다는 이유를 든다. 비록 허구이지만 무협소설류의 상상력은 과학을 연구하는 학자에게 가치가 있다는 설명이다. 무협소설을 읽는 꾀주머니 왕후닝은 지금 중국의 미래와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관건이 될 새로운 10년을 맞고 있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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