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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로금풍의 미학

가을자락을 채 거두기도 전에 가야산은 이미 말없이 겨울 초입을 향하고 있다. 올해는 무서리도 제대로 없이 얼음부터 먼저 왔다. 널브러진 낙엽들은 할 일을 마친 탓에 더없이 가벼운 모습으로 바람 따라 이리저리 뒹굴더니 이내 발 끝 아래에서 바스락거린다. 그 소리를 귀로 들으며 곱게 물든 잎새의 지난날을 눈앞에 떠올리는 건 결코 별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직까지 가을 잔영이 마음에 그대로 있는 까닭이다. 어쨌거나 때를 알고서 줄일 것은 줄이고 남길 것은 남겨놓은 산의 ‘민낯’은 이 시절만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꾸민 얼굴은 꾸민 만큼의 아름다움이 있고, 맨얼굴은 수수한 아름다움이 있다. 늘 꾸미고 있을 순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민낯만으로 살 수 없는 게 세상살이다. 시기를 놓친 과도한 화장도 실례지만, 때에 맞지 않는 민낯도 결례이긴 마찬가지다. 가려야 할 때는 가리고 드러내야 할 때는 드러내야 한다. ‘거울도 안 보는 여자/외로운 여자’라는 대중가요 가사도 있듯이 늘 피하려고 든다면 외로움은 각오할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뭐든 드러내려 한다면 남의 눈에 헤픈 이로 비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지나치게 폐쇄적이거나 과도하게 망가지는 건 중도(中道)에서 벗어나는 길이므로 신중하게 수위를 적당히 조절할 일이다.

군인들이 제대로 된 화장법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다면 전쟁터에서 총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야구선수들 눈밑에 그려놓은 검은 칠은 초스피드로 날아드는 공을 제대로 판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둘 다 얼굴 빛의 반사를 막아주는 기능 덕분이다. 마임 배우들의 과도한 흰 화장은 극의 재미를 더해준다. 빛을 확장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미묘한 표정의 변화를 먼 발치에서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세상사가 그렇다. 가령 취업이나 승진에 필요한 스펙은 알맞게 쌓아야겠지만, 마냥 몸의 살을 덜어내려고만 하는 과도한 다이어트는 건강을 해치기 마련이다. 이처럼 드러냄과 감춤의 미학은 영역을 가리지 않는 또 다른 살림살이라고 하겠다.

자연과 달리 인간은 일본 식으로 표현하면 속마음인 ‘혼네(本音)’와 겉모습인 ‘다테마에(建前)’가 수시로 교차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밖으로 나타나는 행동은 속마음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감정노동자’인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이런 괴리감은 더욱 심할 것이다. 언젠가 단체여행을 간 적이 있다. 무리한 여행 일정에 지쳐 사람들 모두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져 여행 가이드에게 불평불만이 향했다. 그때 여행 가이드는 단호하게 “저는 뒤끝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대응했다. 어수선한 분위기는 그의 지혜로움에 일거에 반전이 됐다. 누구나 겉모습인 미소 속에는 속마음인 ‘뒤끝’이 함께하는 법이다.

하루가 저물어 갈 무렵 휑한 자리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본다. 화려했던 겉모습의 금강산도 군더더기를 털어버린 채 조금씩 속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리라. 그 이름마저도 분위기에 걸맞게 겨울엔 개골산(皆骨山)으로 바뀐다. 이런 날 누군가 운문(雲門·864~949) 선사에게 “나뭇잎이 시들어 바람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이건 운문 선사의 대답이다. “체로금풍(體露金風)이니라. 나무는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것이고(體露), 천지엔 가을바람(金風)만 가득하겠지.”



원철 한문 경전 연구 및 번역 작업 그리고 강의를 통해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하고 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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