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하나의 뿌리두 개의 한국(韓國)

19482018

하나의 뿌리두 개의 한국(韓國)

19482018

하나의 뿌리
두 개의 한국(韓國)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은 해방의 기쁨도 잠시, 동서 냉전의 축소판이 됐다. 북한은 소련에 의해 사회주의 노선을, 남한은 미군정과 함께 강력한 반공 노선을 추구하게 됐다. 그렇게 ‘하나의 한국’은 1948년 두 개로 갈라졌다.

분단 70년을 맞은 2018년. 70년의 세월의 결정적 순간과 이질화된 현재 모습을 통계로 살펴보자.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은
해방의 기쁨도 잠시, 동서 냉전의 축소판이 됐다.
북한은 소련에 의해 사회주의 노선을, 남한은 미군정과 함께
강력한 반공 노선을 추구하게 됐다.
그렇게 ‘하나의 한국’은 1948년 두 개로 갈라졌다.

분단 70년을 맞은 2018년. 70년의 세월의 결정적 순간과
이질화된 현재 모습을 통계로 살펴보자.

1945년 광복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시민들이 서대문 형무소 앞에서 기뻐하고 있다. 맨 오른쪽 사진은 일제시기 조선총독부가 있던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국가기록원]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시민들이 서대문 형무소 앞에서 기뻐하고 있다.

1948년 분단

  • 1950-1953

    6.25 전쟁

  • 1948

    대한민국정부수립

막대한 국방비 집중된 군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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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한반도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3년간 남ㆍ북한 인구 3000만명의 절반이 넘는 1800만명이 사망ㆍ부상ㆍ실종됐다. 참전한 남한군 62만명, 북한군 93만명, 유엔군 16만명, 중공군 100만명 등이 피해를 입었다. 개전 당시 북한의 군사력은 남한을 압도했다. 소련제 T-34 전차 242대, 전투기 170여대 등 남한에 없는 무기와 두 배 이상의 병력을 보유했다. 이를 바탕으로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했고, 채 3개월이 안 돼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미국 등 UN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황을 역전시켰다.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초 38선 넘어 북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 밀고 밀리는 공방전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했다.

전문가들은 종전 후 65년이 지난 현재 시점의 남북한 군사력을 두고 “어디가 우세하다고 보기 힘들다”고 평가한다. 공군ㆍ해군 무기의 질적 측면에서는 남한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하지만 병력이나 재래식 무기의 양을 비교할 경우 북한이 불리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특히 미사일ㆍ방사포 전력이나 핵ㆍ화학무기 등 비대칭 무기를 보유해 종합 전력에서 만만치 않다는 평가도 나온다. 물론 주한미군 전력과 핵 억지력 등이 있지만, 전면전 상황이라면 개전 초기 서울 등 수도권의 피해가 막대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다. 미국 군사력평가기관 GFP는 2018년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을 각각 세계 7위, 세계 18위로 평가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북한은 남한보다 더 많은 국방비를 지출해 왔다. 하지만 70년대 중반 이후 남한은 정부 재정의 최고 30% 가까이를 국방비에 쏟아부으며 북한에 비한 질적 우위를 추구했다. 현재 남한의 국방비는 43조원(전체 예산의 약 13%선) 대로, 북한의 4~5배 정도로 추정된다. 북한은 현재 정부 재정대비 15.8%선을 국방비로 지출하고 있으며(공식), 미국 국무부 추산치로는 국내총생산(GNI)의 23.3%를 국방비에 지출해 전세계에서 GNI 대비 가장 많은 국방비를 쓰는 나라다. 남한의 경우 GNI 기준 약 2.6%만을 국방비에 투입하고 있다.

  • 1959

    천리마운동

  • 1968

    청와대습격사건

  • 1960

    4.19혁명

  • 1961

    5.16군사쿠데타

  • 1962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1964

    베트남파병

서로 다른 선택이 부른 경제력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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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끝난 후 남ㆍ북은 말 그대로 폐허가 됐다. 1953년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GNI)은 연 68달러, 북한은 53달러로 아프리카보다 국민소득이 낮았다. 이후 1960~70년대 초까지는 북한의 국민소득이 남한보다 2배 가까이 높았다. 하지만 70년대 중반 이후 남한의 수출주도형 경제개발계획이 자리를 잡으며 양측의 GNI는 역전됐다. 남한이 1994년 1만 달러를 넘어선 데 반해 북한은 1970년대 수준인 400달러를 벗어나지 못했다. 2016년 기준 남한(2만 7812달러)은 북한(666.9달러)보다 약 41.7배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남ㆍ북의 무역총액 격차도 계속 벌어져 왔다. 1970년까지만 해도 남ㆍ북한의 무역량은 남한 28억 2000만 달러, 북한 7억 4000만 달러로 약 4배 가량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1990년 남한의 무역량이 1348억 달러까지 늘어난 데 반해, 북한은 41억 달러로 성장하는데 그쳐 격차는 32배까지 벌어졌다. 1995년부터는 격차가 100배 이상으로, 2007년 한때 248배까지 벌어졌다. 2016년 현재 격차는 138배 정도다.

북한의 교역은 중국 편중이 심하다. 거듭된 핵실험 등으로 제재가 심해지며 2016년 기준 중국과의 무역 의존 비율이 92.7%나 된다. 반면 남한은 수출을 기준으로 볼 때 중국(24.8%)ㆍ미국(12%)ㆍ베트남(8.3%) 등 다양한 구성을 보인다. 주요 수출품 구조도 다르다. 북한 수출품의 절반 이상이 철광석 등 광물성 생산품인데 반해, 남한은 반도체ㆍ선박해양ㆍ자동차ㆍ석유제품ㆍ디스플레이 등 첨단 산업 위주의 수출을 하고 있다.

  • 1972

    7.4 남북공동성명

  • 1973

    평양지하철개통

  • 1976

    도끼만행사건

  • 1970

    경부고속도로개통

  • 1972

    10월 유신

  • 1974

    서울지하철개통

  • 1977

    수출
    100억달러 달성

    수출 100억달러 달성

  • 1979

    12.12 사태

도로 위주 남한, 철도 위주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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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복구와 함께 도로ㆍ철도 등 사회간접자본(SOC)이 본격적으로 확충되던 1970년대, 남ㆍ북은 도로와 지하철 개통에 박차를 가했다. 북한은 서울 지하철 개통에 1년 앞서 평양 지하철을 개통(1973년)하며, 체제 경쟁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1965년까지 남북의 도로 상황은 총연장 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남한에서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며 차이가 벌어졌다. 2016년 현재 남한의 도로 총연장은 10만 8780km, 북한은 2만 6176km다. 고속도로는 남한이 총 4437km, 북한은 774km로, 6배가량 차이가 벌어졌다.

북한은 산지가 많아 도로를 확충하기 힘들다. 때문에 철도를 중심으로 물류를 공급하는 데 힘을 기울여 왔다. ‘주철종도’라는 용어가 있는데 철도가 육상수송의 중심이고 도로와 해운이 이를 보조하는 형태를 의미한다. 화물수송의 90%, 여객수송의 62%가 철도로 이뤄진다. 1965년 남북한의 철도 총연장은 북한이 1000㎞가량 앞섰고. KTX 등이 확충된 현재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남한이 총 연장 3918km, 북한이 5226km로 북한이 앞선다. 단 북한은 98%이상이 단선 철도로 노후화되어 평균속력이 30㎞/h에 그친다.반면 남한은 복선철도가 많아 궤도연장을 기준으로 보면 2016년 9364㎞가 된다.

산업의 근간이 되는 전력 생산은 1970년대까지 북한이 우위에 있었다. 당시 북한은 수력과 화력발전소를 기반으로, 남한의 4배가량 되는 전력을 생산했다. 하지만 남한이 1978년 고리 1호기를 시작으로 원자력 발전을 시작하며, 전력 생산에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2016년 기준 전력 생산량은 남한이 5404억 ㎾인데 반해 북한은 239억 ㎾로, 22.6배 정도 차이를 보인다. 북한은 불빛이 드문드문 보이는 인공위성 사진에서 보듯, 여전히 심각한 전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 1980

    김정일 후계공식화

  • 1991

    남북 UN 동시가입

  • 1993

    1차 북핵위기

  • 1994

    김일성 사망

  • 1980

    5.18 민주화 운동

  • 1987

    6월 민주항쟁

  • 1988

    88올림픽

  • 1993

    문민정부 출범


    금융실명제 실시

3명(김일성 일가) vs. 1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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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은 광복 후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를,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채택했다. 하지만 1960년 5.16 군사 쿠데타로 박정희 군부정권이 들어섰고, 전두환까지 군부독재는 이어졌다. 1987년 6월 항쟁은 남한이 독재에서 민주화로 가는 분기점이 됐다.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는 87항쟁 전까지 남한의 정치적 자유도지수를 5점(7점 척도, 최고 1점~최저 7점)으로 부분적 자유와 비자유 국가의 경계선에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반면 87항쟁 이후에는 2점으로 자유 국가로 분류했고, 2004~2012년에는 1점으로 최고점을 줬다. 2013년 이후에는 다시 2점으로 하락한 상황이다. 북한은 계속 최저인 7점을 기록 중이다. 언론 자유도지수(0점이 최고점, 최저점은 100점)는 남한은 30점 내외로 전 세계 40~60위권을 기록 중인 반면, 북한은 95점 이상으로 최악의 언론 자유도를 보인다.

북한은 세습을 통해 분단 70년간 김일성 일가 3명이 최고지도자 위치를 유지해 왔다. 김일성(1948~1994)ㆍ김정일(1994~2011)ㆍ김정은(2012~ 현재)이 그들이다. 반면 남한은 군부 독재 시기를 겪었지만, 현재 19대 문재인 대통령까지 총 12명의 최고 지도자가 있었다. 이중 이승만(1~3대, 1948~1960)과 박정희(5~9대, 1963~1979), 전두환(11~12대, 1980~1988)만이 2차례 이상 대통령을 맡았다. 남한 대통령의 평균 재임 기간은 5.8년, 북한은 23.3년에 달한다.

여성 ‘유리천장’의 잣대라 볼 수 있는 여성국회의원 비율은 남ㆍ북한 모두 저조하다. 2005년의 경우 북한이 20.1%로 남한보다 7%가량 높았고, 2014년에야 16.3%로 동률을 이뤘다. 현재 남한의 여성국회의원 비율은 17%로 북한보다 0.7%P가량 높은 수준으로, 전 세계 193개국 중 116위에 불과하다.

  • 1996

    고난의 행군

  • 1996

    국민소득 1만불

  • OECD 가입

  • 1997

    외환 위기

여전히 농림어업 위주의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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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는 남북의 격차가 확대됐던 시기다. 남한은 1996년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서며 소위 ‘선진국 모임’이라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당시 북한은 역대 최악의 기근으로 46만명이 굶어죽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겪었다. 물론 남한도 곧바로 동아시아금융위기가 닥치며, 1997년부터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어려움을 겪었다.
남북 분단 직후에는 북한에 중공업 등이 많이 발달했고 남한은 산업이랄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6년을 기준으로 남한은 서비스업(55.9%)ㆍ광공업(27.2%)ㆍ제조업(26.8%) 등 2ㆍ3차산업 위주, 북한은 농림어업(29%)ㆍ광공업(28%) 등 1ㆍ2차 산업 위주로 재편됐다. 현재를 기준으로 봐도 북한은 정부(22.4%)ㆍ농림어업(21.7%)ㆍ광업(12.6%) 등 남한과는 다른 산업구조를 보인다.

산업화의 상징 중 하나인 자동차 생산량과 국민이 타는 자동차 등록 대수의 남북한 차이도 명백하다. 1965년 북한은 4400대의 차량을 생산한 반면, 남한은 불과 100대를 생산했다. 하지만 2016년에는 남한은 422만 8500대, 북한은 3800대 생산에 그쳤다. 등록된 차량을 보면 남한은 국민 2.5인 당 1대꼴(2180만대 등록)인 반면, 북한은 90명당 1명꼴(28만 5000대 등록)에 불과하다.

북한이 우위를 보이는 부분도 있다. 바로 석탄 생산량이다. 세계 최대 무연탄 매장지 중 하나인 북한은 1965년 이미 1786만t의 석탄을 생산했고 2016년에도 3106만t의 석탄을 생산했다. 반면 남한은 1965년 1025만t의 석탄을 생산했지만, 산업구조가 바뀌고 탄광이 문을 닫으며 2016년에는 173만t을 생산하는 데 그쳤다.

  • 2000

    1차 남북정상회담
    (6.15 공동선언)

    1차 남북정상회담(6.15 공동선언)

  • 2004

    개성공단 가동

  • 2006

    북한1차 핵실험

  • 2002

    한일월드컵

  • 2007

    2차 남북정상회담

부침겪는 개성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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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들어서며 남북 간에 화해 무드가 조성됐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이 역사적 첫 정상회담을 갖고 6.15남북 공동선언을 내놨다. 2004년에는 남북경협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시작됐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도 김정일과 2차 정상회담을 가졌다.
2005년 1491만 달러어치 물품을 생산한 개성공단은 2015년 생산액이 5633만 달러까지 치솟으며 남북 협력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입주기업은 125개까지 늘어났으며 5만 5000여명의 북한 근로자가 일했다. 하지만 북한의 핵ㆍ미사일 실험으로 2013년 5개월간, 2016년에는 가동이 전면 중단됐다. 11년 2개월간 밝혔던 개성공단의 불은 현재 완전히 꺼진 상태다. 정부와 민간에서 개성공단에 투자한 총액은 1조 190억원으로 추산된다.

남북교역도 남북평화 무드와 맞물려 부침을 겪고 있다. 2012년 20억 달러에 육박했던 남북 교역량은 2013년 북핵 위기로 11억 달러로 곤두박질쳤다. 이후 다소 회복세를 보이며 2015년 27억 달러까지 올라왔지만, 2016년 개성공단 폐쇄 후 3억 달러, 지난해는 91만 달러까지 추락했다.

남북화해 무드와 함께 높아졌던 대북지원도 규모가 축소되었다. 2008년 민간을 포함해 1164억원에 이르던 대북지원은 2009년 절반인 671억원으로 떨어졌고, 2012년 141억원으로 최저점을 찍은 후 조금씩 회복되는 듯했지만, 2016년 이후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지난해 대북 지원은 인도적 목적의 결핵약 지원 11억원에 그쳤다.

  • 2011

    김정일 사망

  • 2016

    4,5차 핵실험

  • 2017

    6차 핵실험

  • 2010

    천안함 피격

  • 2014

    세월호 침몰

  • 2016

    개성공단폐쇄

  • 2017

    박근혜 탄핵

핵무력 집착하는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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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포함한 남한과의 군사력 경쟁에서 북한이 히든카드로 삼은 것은 핵이다. 1980년대 말부터 핵시설을 준비한 북한은 1993~94년 1차 북핵 위기를 거쳐, 2005년 핵무기 보유를 선언했으며 2006년 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2009년 2차 핵실험 이후 잠잠하던 북한은 2013~2017년 사이 3~6차 핵실험을 감행하며, 사실상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으려 하고 있다. 현재 북한은 10~30여기의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핵과 함께 정권을 보장받는 또 하나의 축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다. 핵을 싣고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미사일이 있어야 ‘공포의 균형’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현재 북한은 사거리 6000㎞를 상회하는 화성-14호, 사거리 1만㎞로 추정되는 화성 15호 등을 보여하고 있다. 그 외 대포동 2호와 개량형 대포동 미사일 등도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미 국방성을 인용해 올해 북한이 ICBM을 실전 배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도 개발 중이다.

유엔은 북한의 도발과 관련해 총 8건의 제재 결의안을 내놨다. 1차 북핵 위기 당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재고하라는 결의안 825를 시작으로 지난해 9월 11일 2375호까지, 북한의 도발 때 마다 제재 수위를 높여왔다. 지난해 나온 2건의 대북 제재 결의안은 석탄ㆍ철광석 등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북한의 협작 사업을 금지하는 등 역대 제재 중 가장 강력하다는 평가다.

  • 2018

    평창 응원단파견

  • 2018

    평창올림픽

달라진 남북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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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70년, 남과 북의 삶은 너무 많이 달라졌다.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에 온 북한 응원단의 외양은 남한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들의 생각과 삶은 지금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 단적으로 전화 가입자 수를 살펴보면 남한은 2016년 기준 2800만명, 스마트폰 사용자는 전체 인구의 90%(2017년)나 된다. 반면 북한은 전화 가입자 수가 118만명으로 100명당 4.7명 꼴이다. 스마트폰 사용자는 전체 인구의 15% 수준으로 추산된다.

영양 상태 등의 차이는 남ㆍ북 주민의 외형에도 영향을 미쳤다. 1945년 광복 당시 한국인의 평균 신장은 남성 166.5㎝, 여성 154㎝ 정도였다. 하지만 2015년 기준 남ㆍ북 주민의 키는 큰 변화가 있었다. 북한은 남성 165.6㎝, 여성 154.9㎝로 70년간 거의 그대로인 반면, 남한은 남성 173.5㎝, 여성 160.9㎝로 약 6~8㎝ 정도 키가 커졌다. 몸무게도 남북 격차가 심하다. 남한 남성은 평균 69㎏인데 반해 북한은 56㎏에 불과하다. 여성도 남한 여성은 53㎏인데 반해 북한은 45㎏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남ㆍ북의 주류 소비를 살펴보자. 세계보건기구(WHO)의 전 세계 주류소비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음주 인구(15세 이상)는 남한이 66.5%로, 북한(33.7%)보다 2배나 많다. 1인당 주류 소비량도 남한이 27.5L인데 반해 북한은 17.5L에 그친다. 주로 마시는 주종도 다르다. 북한은 소주(Sprits) 비율이 95%나 됐고 맥주 비율은 5%에 그쳤다. 반면 남한은 맥주가 25%로 가장 많고, 그외 소주ㆍ와인ㆍ막걸리ㆍ위스키 등 다양한 주류 소비패턴을 보이고 있다.

발행일 : 2018.04.24

  • 기획·취재 정원엽, 최민희 인턴
  • 디자인 임해든, 최민희 인턴, 김한울 인턴
  • 데이터 시각화 배여운
  • 개발 김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