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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경술합방 물고기

"그물도 치기 전에 물고기가 뛰어들었다" . 1910년 8월 한일합방 전야의 비사를 이렇게 밝힌 것은 당시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였다. 뼈 아픈 증언이다.

그것이 결코 문학적 수사(修辭)가 아니라는 것, 참담한 무능 끝에 합방을 갖다 바쳤던 91년 전 우리의 모습이라는 확인 때문이다. 내일이 경술 국치일(國恥日)이다. 역사의 복기(復棋)를 위해 '합방 물고기' 의 주인공부터 알아보자. 속내를 감춘 일본에 합방을 먼저 제안한 쪽은 조선이다. 총리대신 이완용의 최측근인 신소설 『혈의 누』의 이인직이 밀사 노릇을 했다.

그런 까닭에 역시 이완용은 만고의 역적일까? 지난 1979년 증손자의 손에 폐묘(廢墓)당해 마땅한 위인인가? 진실은 초등학교 교과서처럼 간단치 않다.

'복잡한 진실' 의 측면을 보여준 게 윤덕한의 『이완용 평전』(중심.1999)이다. 책은 이렇게 묻는다. "그동안 우리는 손쉬운 매국노 상을 만들어 뭇매질만을 해왔다. 반면교사(反面敎師)이완용 연구도 논문 4편이 전부였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에 묻어있는 우리의 모습은 짐짓 외면해왔다" .

우선 이완용은 '타고난 친일파' 로 볼 수 없다. 그는 사대부 관료(1882년 문과 급제)로 출발했다. 개화기 첫 랭귀지스쿨인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익혔고, 주미 공사(1888년)로 2년을 근무했다. 윤치호.유길준과 함께 영어를 구사했던 서너명 중의 하나였던 그는 당초 친미파로 통했다.

나중 고종의 주일공사 발령(1894년)을 모친상(喪)을 이유로 고사하기도 했다. '막가파식 친일파' 송병준과 달리 끝내 일본어를 구사 못했다. 또 있다. 초대 위원장(1896년)으로 독립협회를 주도한 두 얼굴의 위인이 그이다. 학계는 침묵하지만 독립문 편액도 그의 글씨란 설이 유력하다.

사실 서재필의 '독립신문' 에는 이완용 비판이 단 한줄도 없다. 그동안 외면해온 이완용의 모습은 그밖에도 많다.

그렇다면 을사조약 이후 시야 넓은 외교통에서 매국의 친일파로 대추락을 했던 이완용을 어떻게 해독해야 할까? 못나게 허둥대다 결국 엉망이 된 근대사의 총체적 상징은 아닐까? 이걸 잊으니 요즘 정치권에서 보듯 너무도 가볍게 친일파 시비를 투닥거린다. 그러곤 손쉽게 잊는다. 그건 추태에 다름 아니다.

친일파란 남을 헐뜯는 욕설이 아니라 '나' 를 비추는 무서운 거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의 그물' 은 변화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겹겹이 쳐져있지 않은가? 마음 편치 않은 요즘이다.

조우석 문화부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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