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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은 새로웠다. 그래서 런던은 설렜다

1 셰리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부인(왼쪽)과 ‘코리안 아이’전을 기획한 PMG그룹 데이비드 시클리티라 회장(오른쪽)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데미언 허스트를 필두로 한 yBa(young British artists)가 급부상하면서 더욱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된 런던은 2000년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개관과 더불어, 20세기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뉴욕에 맞서는 유럽 현대미술의 메카가 됐다. 따라서 런던에서 전시를 한다는 것은 상업적이든, 미술관 초청에 의한 것이든 세계 최고 수준의 미술 관계자 및 컬렉터와 곧바로 만난다는 뜻이다. 전문적이고 다채로운 반응을 들을 수 있지만, 준비되지 않은 전시에 대해서는 적나라한 비평의 화살이 쏟아지는 곳이기도 하다. 결코 만만하지 않은 이곳 런던의, 그것도 주류 미술기관에서 한국 작가들과 관련된 행사가 한 주에 두 개나 열렸다.

하나는 런던 슬론스퀘어 인근 사치(Saatchi)갤러리에서 6월 20일부터 열리고 있는 ‘코리안 아이-문 제너레이션(Korean Eye-Moon Generation) 전시. 다른 하나는 6월 30일 오전에 진행된 크리스티의 현대 사진작품 데이 세일이다. 혹자들은 매우 상업적인 행사에 한국 작가들의 전시가 연계된 것으로만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 작품이 아직 투자가치가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제 미술시장의 한복판에서 본격 소개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관심 있게 볼 내용임은 분명하다.

2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 가운데 천장에 이형구 작가의 코믹한 해골 작품 ‘호모 아니마투스’가 걸려 있다.
특히 ‘코리안 아이’전은 2주간 무려 4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하면서 7월 5일로 예정된 전시 일정은 9월 13일까지로 확 늘어났다.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문화도시 런던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 한국 현대미술의 전진기지를 찾았다.

셰리 블레어 전 총리 부인 등 VIP 줄이어
지난 1일 오후(현지시간) 사치갤러리 3층 필립 드퓨리 전시장. 한국 작가 31명의 작품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았다. 500명 이상이 참석한 오프닝 행사 이후 매일 3000명 이상이 찾는 성황을 이뤘다. 갤러리 1, 2층에서 3층까지 주목받는 미국 현대미술 작가의 컬렉션이 열리고 있다는 점도 성황에 큰 도움을 줬을 터다.

3 이이남 작가의 디지털 병풍을 둘러보는 전 BBC앵커 앤절라 리폰. 스크린 동양화 속에선 나비와 벌들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4 2일 저녁 사치갤러리 3층에 마련된 만찬장. 한국 방문의 해 위원회와 CJ 푸드빌이 8가지 한식으로 디너 테이블을 꾸몄다.
이번 전시는 한 외국 기업인의 한국 방문에서 생긴 애정과 관심에서 시작돼 많은 연대를 통한 협업으로 이뤄졌다. <박스 기사 참고> 어떤 주제를 가진 전시라기보다 일종의 쇼케이스와도 같은, 다양한 나이와 경력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한국’ 작가라는 대표성에 있어 다소 작품 선정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런던 미술계 전문가들에게 본격적으로 ‘한국’이라는 이미지로 ‘사치’라는 곳에서 소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전시에 대한 반응은 이를 기획한 ‘코리안 아이’ 팀의 예상보다, 아니 사치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뜨거웠다. 피상적으로 알거나 듣고 있던 한국 미술계의 활발한 움직임과 간간이 국제전을 통해 접했던 ‘새로움(nouvelty)’이라는 가치가 많은 이에게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

2일 전시장을 방문한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부인 셰리 블레어는 멀티스크린 속 동양화에서 나비와 벌 등이 움직이도록 한 이이남 작가의 8폭짜리 디지털 병풍을 보고 “테크놀로지가 뛰어난 한국에서 나올 법한 작품”이라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어 데비 한 작가의 해설을 직접 들으며 작품을 관람했다.

선데이 텔레그래프지에서 국제미술시장을 담당하는 콜린 글리델은 “내가 아는 한국 작가는 이우환과 이불뿐이었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며 “이번 전시가 좋은 결과로 연결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십자가 영상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미라(전준호의 ‘무제 2007-8’)와 ‘장독대’(2008)라는 제목으로 나온 이환권의 대형 인물 조각의 경우 오픈한 지 며칠 안 돼 팔렸다”는 게 필립 드퓨리 경매사의 런던 디렉터 로드만의 귀띔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크리스티 경매사의 관계자 질 세라시는 “이제 런던은 한국 현대미술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며,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소개된 한국 작가인 양혜규과 김아타를 언급하기도 했다.

공공미술관 된 사치갤러리, ‘계몽된 이기심’의 힘
사치갤러리는 영국의 세계적인 컬렉터 찰스 사치(66)가 소유주다. 그는 “내가 가진 현대미술 작품을 일반인에게 가능하면 많이 소개하고 싶다”고 말해 왔다. 그래서 1999년엔 영국 아트카운슬에 100점을 기증했고, 2000년에는 국가 미술펀드에 40점을 기부했다. 지난해 재개관한 사치갤러리는 과거처럼 입장료를 받지 않고 모든 전시를 무료로 볼 수 있게 했다. 어엿한 공공미술관이 된 것이다.

영국 내 500개가 넘는 미술관·박물관 대부분이 이런 컬렉터들과 그들의 헌납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영국 속담에 나오는 ‘계몽된 이기심(enlightened self interest)’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개인의 공공성이 귀한 문화적 결실을 낳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영국의 진정한 힘이다. 사치는 이 과정에서 컬렉션의 판매와 구입, 관리는 필립 드퓨리(Phillips de Pury & Company) 경매사에 전적으로 위탁했다. 덕분에 그는 공공성과 상업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은 셈이 됐다.

사치 갤러리는 재개관 이후 중국 현대미술 컬렉션, 중동아시아 컬렉션 등 특정 지역의 작품을 총체적으로 소개해 왔다. 전시와 관련된 세미나와 콘퍼런스 역시 런던 미술계에서 주목받으면서 작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켜 왔다.

한식으로 ‘신선한 한국’ 이미지도
2일 저녁 사치갤러리는 근사한 만찬장이 됐다. 필립 드퓨리의 회장 시몬 드퓨리와 한국계인 로더미어 자작부인이 초청한 이 자리에는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부인인 셰리 블레어, 노폭백작(Duke of Norfork)인 리처드 핏잘린 하워드 부부, 홍콩 차이나 클럽파운더 데이비드 탕 부부, 미국 오바마 예술정책자문위원인 파멜라 조이너, BBC 첫 여성 앵커 앤절라 리폰, 이브닝 스탠더드지의 조르디 그레이그 편집장 등 저명인사들이 참석했다. 한국 측에서는 천영우 주영대사와 런던에서 거주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김선욱, 영화배우 김성수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한국 홍보를 위해 새로 기획된 조직인 한국방문의해위원회와 CJ 푸드빌의 지원으로 디너 테이블이 준비됐다. 구절판, 잡채, 삼색전병, 잣죽, 신선로, 갈비쌈, 비빔밥, 오미자 화채 등의 여덟 코스 한식 요리가 깔끔한 디스플레이로 제공됐다. 런던 상류계층에 한국의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주고 문화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베티나 본 하세는 “서빙되는 음식의 신선함과 야채의 사용이 놀랍다”고 감탄하며, “한국 음식이 이렇게 아시아 국가의 음식과는 또 다른 독특함이 있는 줄 몰랐다”고 찬사를 보냈다.

이번 전시가 국제시장에서 곧바로 어떤 상업적 영향력을 끼칠 것이라고 예단하기는 어렵다. 특히 한국 작가의 작품들은 국제시장에서 투자용 베팅 대상이 될 만큼의 입지를 아직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공공적이거나 상업적인 교류 및 협업이 더욱 필요한 시기다. 이번 사치에서의 전시는 상업전이기는 하지만, 그 맥락을 볼 때 컬렉터가 없다는 시장 환경에서 매우 실험적인 시도다. 시장에서 이윤을 남긴다는 기존의 개념이 아닌, 마켓을 만들어 간다는 홍보 차원의 목적과 의의가 더 크다고 하겠다.

하지만 중국 현대미술이 일시적 연출을 통한 급부상 및 하락세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시점에서, 꾸준하게 역사성에 근거해 미술을 발전시켜 온 한국이나 일본 같은 국가의 작품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부각되기 시작했다. 국제 미술시장에서 시장점유율이 뉴욕(39%)을 추격하고 있는 런던(29%, 이상 Art Price 2008년 자료)에서 소통을 시작했다는 것은 한국 현대미술의 세계 진출에 물꼬가 트였다는 뜻이다. 또한 사치가 아시아 컬렉션을 시작한 입장에서 한국 미술에 대한 주목도가 높아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얼마나 꾸준히 이러한 시도를 계속 진행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지속성/유지성’이라는 측면에서 ‘코리안 아이’ 프로젝트의 2012년까지의 힘찬 발걸음을 기다려 본다.

사진 ‘코리안 아이’ 팀, 주성훈 작가



런던에서 18년간 거주하며 미술사 및 미술 경영을 공부했다. 크리스티, 아트택틱, 런던대 SOAS 등에서 아시아 미술 강의를 하고 있다. 2009 베니스 비엔날레 김아타 특별전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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