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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 부시 만난 정상 중 가장 예측 불가능”



“노무현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만난 수십 명의 정상 중 가장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국내를 의식한 반미 발언으로 미국을 당혹시켰다. 그러나 한미동맹에 대한 그의 기여는 (친미 대통령이었던) 전두환·노태우 이상이다. 그가 퇴임하는 2008년2월 현재 한미 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가진 8차례의 정상회담 중 5개 정상회담을 총괄지휘한 마이클 그린 전 백악관 동아태 선임보좌관은 13일 노대통령의 퇴임을 앞두고 두 정상간 만남에 얽힌 비화를 본지에 밝혔다.

-노무현 정권이 막 출범한 2003년2월 상황은.

“분위기가 살벌했다.(웃음) 2003년2월25일 서울에 도착해 노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뒤 청와대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더라. 하룻밤 사이 전부 교체된 거다. 외교통상부에 연락했더니 ‘탈레반이 진주했다. 우린 아무 힘이 없다. 이제 당신은 청와대 386들과 상의해야 한다. 매우 거친 사람들이니 조심하라’고 경고해줬다.”

-그 거친 사람들이란.

“서주석·이종석씨 등 노대통령이 임명한 청와대의 새 외교안보 참모들이었다. 그들과 그 해 4월 첫 한미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당장 세게 부딪혔다. 그들은 전통적인 한미관계에 입각해 만든 정상회담 공동성명 초안을 거부했다. 대신 ‘미국은 북한을 침공하지 않겠다’는 문구가 들어가야 한다고 고집했다. 미국은 입장이 달랐다. ‘(북한에 대한)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있다’는 문구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줄다리기 끝에 ‘북핵은 평화적으로 해결하되 위기 지속 시 추가적 조치를 검토한다’로 겨우 타협 봤다.”

-첫 번째 정상회담은 어땠나.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을 2003년 5월 백악관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회담 도중 대뜸 ‘한국민은 한반도에서 전쟁 날까 봐 공포에 휩싸여있다(Koreans fear war in the peninsular)’고 발언했다. 부시 대통령은 즉각 ‘미국은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U.S. will not attack North Korea)’고 대답했다. 그러자 노대통령은 들고 있던 말씀자료집을 덮어 내려놓은 뒤 ‘그냥 자유롭게 얘기하고 싶다’며 만족스런 어조로 말했다. 부시도 ‘털어놓고 얘기합시다’고 화답했다.이어 부시 대통령도 원하던 것을 얻었다.한미동맹을 더욱 공고히하겠다는 노대통령의 약속이었다.당시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으로 프랑스,독일과 동맹관계를 악화시켰다는 비난을 받던 처지였다.한미동맹 강화는 따라서 부시 대통령에게 아주 반가운 뉴스였다.이는 노대통령도 비슷했다.신용등급기관 무디스가 한국의 신용등급을 강등한 상황이라 외국투자자들을 다시 유치하려면 미국과의 동맹회복이 절실했기 때문이다.회담이 잘 끝나고 기분이 좋아진 부시 대통령은 노대통령을 링컨이 쓰던 방으로 안내해 링컨의 친필 게티스버그 연설문을 보여줬다. 노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링컨이란 얘기를 들은 부시 대통령의 배려였다..”

-그 뒤로도 노대통령은 북한을 공격하지 말라는 요구를 부시 대통령에게 했나.

“노대통령은 정상회담마다 빠짐없이 대북 유화 조치를 요구했다. 두 번째 만남인 2003년10월 방콕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선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 수 있다’며 북한을 압박하지 말 것을 우회적으로 요구했다. 부시 대통령은 ‘고양이가 다섯이나 되니까 걱정 없다’고 되받았다. (6자 회담 참가국인 한국·미국·중국·일본·러시아를 의미) 그러자 노대통령은 ‘그런데 그 중 제일 약한 고양이가 한국’이라며 북한을 압박하면 한국이 가장 큰 피해를 당하게 된다는 식으로 재차 받았다. 마치 북한은 피고이고, 노 대통령은 변호사, 부시 대통령은 재판장 같은 분위기가 반복됐다. 부시 대통령은 한번 약속하면 끝까지 지키는 텍사스 카우보이 스타일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만날 때마다 대북 유화조치를 요구하니까 부시 대통령은 ‘왜 이리 똑같은 요구를 반복하나’라며 회담 뒤 당혹감을 표시하곤 했다.”

-2004년10월 칠레 산티아고 APEC회담 직전에 노대통령은 ‘북한의 핵 보유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발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 발언 때문에 진땀을 뺐다. 문제의 연설 전문이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그걸 읽은 부시 대통령은 나를 호출해 ‘무슨 의미냐’고 질문했다. 나는 ‘노대통령의 지지기반을 겨냥한 국내정치용 발언’이라며 ‘한미 실무진간에는 북핵이 위협이라는데 인식이 일치돼 있고 공조도 잘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논리가 궁색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부시 대통령은 별다른 이의 제기 없이 ‘알겠다(I understand)’고 대답했다. 회담에서 그 발언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그 발언은 노대통령을 공격하는 백악관·행정부내 강경파들에게 숱하게 인용되곤 했다.”

-노대통령이 북한을 감싸고 미국의 대북공격 가능성을 거론하는 등 반미적 발언을 계속한 이유가 무엇이라 보나.

“국내정치용이었다고 본다. 노 대통령과 386들은 집권 전에는 몰라도 집권 뒤엔 미국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잘 인식했다. 그래서 이라크 파병 등 동맹에 기여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문제는 이 같은 정책 때문에 자신들의 지지기반이 이탈할까 봐 걱정이 컸던 거다. 그래서 노대통령은 ‘파병이라도 해서 미국에 잘 보임으로써 미국의 대북공격을 막고 있다’는 논리를 편 것 같다.

그러나 이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불신과 한국 내 반미감정을 증폭시켰고 북한과 중국에는 한미관계에 금이 가고 있다는 오판을 안겨줬다. 기세가 오른 중국의 한 고위관리는 2004년 서울을 찾아 ‘한-미-일 대북정책조정감독회의(TICOG)를 중단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TICOG은 노 정부 하에서 중단됐다) 그래서 우리는 윤영관,이종석,반기문,서주석씨 등 한국 정부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제발 그런 논리를 펴지 말라고 간청했다.이들은 "우린 동맹을 최우선한다.반미 발언 자체를 한 적이 없다"고 해명하기 바빴다.그러나 한 청와대 고위인사만은 내게 ‘(노대통령의)반미적 발언은 국내 정치기반을 지키기 위한 것이므로 계속될 수 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부시 대통령은 노대통령의 반미 발언을 얼마나 보고받았나

"낱낱이 보고받았다고 보면된다.부시 대통령은 매일아침 국제정세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받는다.또 미국은 한국에 큰 대사관을 갖고있다.이에 따라 부시 대통령은 한달에 최소한 두세번은 노대통령의 반미적 발언을 보고받았다.2002년께 부시 대통령은 내게 "나는 북한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얘기했는데 왜 노대통령은 다른 소리를 하나"고 질문한 적이 있다.나는 "방금 주 유엔 한국대사가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강력히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며"노대통령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강력히 지지하고있다"고 해명해야했다.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한미동맹이 엷어지고있다는 느낌을 주는 일화가 있다.우리는 중국과 매년 전략대화를 갖는데 2005년 만남에서 중국측 전략가가 "중국은 미국에 위협이 아닌데도 미국은 아시아에서 강력한 동맹관계를 구축하고있다"고 지적했다.그러면서 일본,호주,인도,인도네시아,싱가폴 등을 언급했는데 한국만 쏙 뺐다.그때 한국은 중국의 영향권에 빨려들고있는 것 아닌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 결국 노대통령과 부시 대통령간에는 금이 갔나.

“그렇게까지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마지막으로 담당한 두 정상의 다섯 번째 회담(2005년11월 경주)에서 두 정상은 마카오 방코 델타 아시아(BDA)은행의 북한자금 동결문제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고, 회담은 좋은 결과를 낳지 못했다.”
이와 관련, 미 행정부 소식통은 본지에 당시 노대통령이 “6자 회담 합의가 막 성사된 가운데 터진 BDA 자금 동결 조치(저의)가 의심스럽다(suspicious)”라고 부시 대통령에게 거듭 말했고, 부시 대통령은 격분했다고 전했다. 부시 대통령이 “의심스러울 것 없다”고 부인했으나 노대통령은 “의심스럽다”는 말을 반복해 부시 대통령이 고개를 돌리고 한동안 침묵했다는 것이다. 당황한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 등 한국측 수행원들은 회담 뒤 미국측에 “사전에 준비된 발언이 아니라 노대통령이 (정부)밖에서 들은 얘기를 돌발적으로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노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의 별장인 크로포드 목장에 끝내 초청받지 못한 배경도 그 때문인가.

“나를 비롯해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제임스 켈리 전 국무부 차관보 등 외교당국자들은 노대통령이 방미할 때마다 크로포드 목장에 초대하자고 줄기차게 건의했다. 그러나 백악관의 국내정치 참모들이 완강히 반대해 부시 대통령에게 건의가 올라가지 못했다. 국내정치 참모들은 ‘노대통령이 방미를 전후해 반미 발언 안 한다고 보장할 자신이 있느냐’며 ‘노대통령이 크로포드에서 이상한 소리 한마디만 하면 미국 언론이 대서특필해 부시 대통령이 곤경에 빠질 것’이라고 우리를 몰아붙였다. 이 때문에 이라크에 파병한 주요 동맹국 중 크로포드 목장에 초청받지 못한 정상은 노대통령이 유일하다. 아쉽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크로포드 목장이나 캠프 데이비드 별장 중 한군데는 반드시 초청받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노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측면도 있나.

“물론이다. 노대통령은 미국·영국 다음 가는 대규모 이라크 파병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체결, 주한미군 용산기지 이전 등 정책적으로 한미동맹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 그 기여도는 전두환·노태우 정부 못지 않다. 어떤 의미에선 그들 이상이라 생각한다.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국이라는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이나 독일의 슈뢰더 총리는 부시 대통령에게 약속을 해놓고도 지키지 않은 반면 노 대통령은 약속한 내용은 전부 지켰다. 그 점에서 부시 대통령은 노대통령을 시라크나 슈뢰더보다 높게 평가한다. 결론적으로 노 대통령 5년을 거치면서 한미동맹은 전임자 김대중 정권 시절보다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고 단언한다.”

-노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우정이 빛난 때는 언제인가.

“노대통령이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을 때다. 2003년 노 대통령의 파병안이 한국 국회에서 통과되자 부시 대통령은 노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나도 의회에서 하기 힘든 일(파병안 통과)을 당신이 더 잘 해내셨다’고 극찬했다. 노 대통령은 ‘아니, 일은 당신이 더 잘하신다’고 화답했다.”

-노대통령도 부시 대통령에게 섭섭한 게 있었을 것 같다.특히 북한과 관련해서.

"미국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비난하면서 한편으로 미래도 보여줬어야하는데 그러지못해 아쉽다.북한의 열악한 인권은 미국 대통령으로 의당 비난할 사안이다.그러나 핵폐기시 밝은 미래도 있다는 걸 곁들였어야한다.2002년'악의 축'발언이 대표적이다.재미있는 일화가 있다.그 발언이 있은 직후인 2002년2월 나는 잭 프리처드 당시 국무부 북핵대사와 박길연 주유엔 북한대사를 만났다.박은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은 우리를 도발하는 적대시 정책의 산물"이라고 비난했다.나는 "하지만 부시대통령은 북한과 협상을 원한다는 메시지도 분명히했다"고 설득했다.1주일뒤 박이 내게 전화를 걸어 '좋다.평양은 미국 대표단의 방문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북한은 악의 축 발언은 싫어하면서도 협상을 중단하려고 하진 않았던 것이다."

- ‘탈레반’으로 지칭된 386참모들은 어떤가.

“사실 나는 학자로서 청와대 참모들인 이종석·서주석·박선원씨(모두 정치학 박사) 등과 정책적으론 이견이 있었어도 학문적으론 통하는 게 많았다. 이들도 시간이 가면서 미국의 중요성을 알고 동맹관리에 열성이었다. 특히 2004년6월에는 위성락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 정책조정관이 워싱턴을 찾아 나랑 한 호텔에서 밤샘 작업 끝에 2005년 9.19 합의, 2007년 2.13 합의와 거의 똑같은 대북협상안을 만들기도 했다. 그 직전 노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해 ‘6자 회담이 궤도에 올랐으니 이제 적극적 해법으로 진전을 모색할 때’라고 권유했고 부시 대통령이 이를 수락한 데 따른 후속조치였다. 그러나 이 안이 백악관 부통령실을 거치면서 유연성을 잃어버려 성사는 되지 못했다. 또 친구 사이로 가까워진 박선원씨는 내가 보는 앞에서 환경부 고위관리에게 전화를 걸어 ‘한미동맹은 한국에 사활적인 관계인데 왜 미군기지 환경 치유문제 해결을 미적거리느냐’고 호통치기도 했다. 그에게 ‘대학 시절 주말이면 인근 여학교로 놀러 다녔다’고 회고했더니 그는 ‘난 대학시절 주말에 미국문화원을 공격했었다’고 웃으며 얘기한 게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그는 동맹관리에 관한 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인물이었다.”

워싱턴=강찬호 특파원



◇마이클 그린=2001년 4월~2005년 12월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 선임보좌관을 역임하면서 노무현 정권 전반기 3년간 한·미 정상회담, 한·미 관계, 북핵 문제를 총괄 지휘했다. 현재 조지타운대 교수 및 워싱턴 싱크탱크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1983년 오하이오주 캐니언대를 수석 졸업하고 94년 존스홉킨스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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