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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家] 작가 송혜근의 혜화동 조린헌 (照隣軒)

김효만은 가로가 긴 직사각형 창을 유난히 선호한다. 그가 지은 살림집 벽면에는 늘 좌우 길쭉한 채광창이 나있다. 열리지 않는 이 창은 그대로 바깥풍경을 담는 기분좋은 그림틀이 된다. 그 풍경화 위에 성근 천조각을 붙여 공간의 깊이를 더한 것은 송혜근의 솜씨.

<…그 집에는 오랫동안 그녀가 앤틱 상점과 벼룩시장을 다니며 사모은 물건들이 그득했다. 주방에 있는 수납통들과 호두나무 식기장이 그렇고, 거실에는 중국산 호두나무 러브시트와 중앙아시아산의 실크 카펫이 있었다. … 러브시트는 긴 아편대를 물고, 발을 마사지해주는 하녀를 나무라는 질투에 찬 첩실을 떠올리게 하고 실크 카펫은 더러운 손으로 카펫을 짜다가 문득 눈을 들어 대상(隊商)의 무리를 바라보는 소녀를 떠올리게 했다…>

( 송혜근 소설 '행복, 머무르지 않는'에서)


자신이 모은 고가구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어내는 소설가의 집안을 한번 구경하고 싶었다. 지난 연말 우연히 그 소설가의 집이 여느 집과는 썩 다르다는 얘기를 들었다. "꼭 한번 가보세요. 목욕탕이 누드예요. 밖에서 변기와 욕조가 훤히 들여다 보인다니깐요."

아직 한옥이 드문드문 남아있는 비탈진 혜화동 골목 안, 네 가구가 살도록 만들어진 다가구주택 조린헌(照隣軒) 3층이 송혜근씨의 집이다. 과연 특별했다. 실내는 가로 획이 굵고 세로 획이 가는 ㄷ자를 떠올리면 된다. 가로 획 한쪽은 거실과 주방. 다른 한쪽은 침실과 욕실과 서재. 그 사이를 잇는 조붓한 복도가 세로 획인데 복도는 벽을 따라가며 바닥에 흙을 두고 대나무를 심었다. 마흔 평 되는 실내가 문 없이 서로 연결되는 원룸이다. 실내와 실외의 구분도 모호하고 방끼리의 독립성도 없건만 아주 은밀하고 편안하다.

우선 소문으로 듣던 욕실. 과연 벽에 갇히지 않은 샤워 부스가 방 가운데 덜렁 올려져 있다. 조린헌은 욕조와 변기는 닫혀 있어야 한다는 상식을 통쾌하게 깨버린다. 송씨는 요즘 욕조에 앉아 책을 읽으며 바깥 대나무를 내다보는 맛을 즐긴다. 사방이 열려 허전할 것 같지만 욕조 바닥에 난방 파이프를 깔아 들어앉으면 자궁 속인 듯 따뜻하고 안락하단다. 변기는 부스 바깥 창문 아래 설치 미술품처럼 칸막이 없이 놓였고 맑은 푸른빛을 내는 세면대가 진귀한 보석처럼 그 곁에 박혀 있다. 변기 바로 곁엔 대나무가 너울거리며 자란다. 조린헌의 설계자 (이로재 건축 김효만)는 이 노출된 화장실을 "자연 속에서 본능적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복선을 깔아놓아 자신의 모든 행위가 스스로의 볼거리가 되도록 시각화했다"고 말한다.

투명한 샤워 부스에서 세 계단을 내려오면 침대, 침대 곁은 벽을 따라가며 길게 놓인 책상이다. 물론 이 공간은 여러 사람이 나눠 쓸 수는 없다. 하나 혹은 둘을 위한 집이다. 조린헌은 네 가구 전부가 자유와 변화를 추구하는 개성있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송혜근씨의 3층은 욕조가 높고 침대가 낮지만 다른 층은 반대다. 투명욕조는 낮추는 대신 천장을 높이고 침대를 공중에 매달아둔 식이다. 계단을 올라 침대에 들면 다락방 같은 시야가 만들어져 비일상적인 재미를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다. 복도를 지나 맞은편 공간도 재미있긴 마찬가지다. 세 계단 위는 거실, 아래는 부엌인데 계단에 걸터앉으면 식탁에 앉은 사람과 눈높이가 같아져 노천무대 같은 즐거움을 준다.

이 집 실내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게 몇 있다. 문이 없다는 건 이미 말했고 벽지와 바닥재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바닥은 맨 시멘트 위에 우레탄을 칠했다. 다섯 번을 칠해 몹시 반질댄다. 옛 시골집 부뚜막 같은 윤기와 질감이다. 초현대식 집에 이런 소박한 마감이라니 상당히 기분좋은 의외성이다. 바닥에 배를 깔고 눕기도 쾌적하고 퍼질러 앉기에도 썩 편안하다. 벽도 콘크리트의 자연질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덕분에 집안의 소품들, 대나무 잎새의 생명력이 더 강하게 돋보인다.

이 집엔 대나무 말고도 실내에 자연을 끌어들이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빈 가지가 조형적인 어린 감나무, 이파리가 발갛게 물든 한그루의 남천, 이들을 위해 일부러 자그만 마당(?)을 만들고 그리로 통하는 유리문을 뚫어뒀다. 나무를 위해 한 뼘 땅을 내주는 것은 그 안에 사는 사람에게 몇 배 더 큰 보상을 안겨준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파리가 돋고 감꽃이 피고 감이 열리는 신비를, 마당 없이도 매일 눈앞에서 음미하는 게 가능해진다.

이 집엔 또한 주인의 탁월한 감각을 엿보게 만드는 물건들이 몇 있다. 이사와 보니 벽에 그림을 걸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그림을 한번 눕혀보기로 했다. 식탁을 새로 사는 대신 튼튼한 나무 액자에 메탈로 된 발을 달고 위에 두꺼운 유리를 깔았다. 그랬더니 모노크롬의 추상화를 밥을 먹으면서 감상할 수 있게 됐다. 그림에 바퀴를 다니 훌륭한 거실용 앉은뱅이 테이블로 변했다. 이는 싫증나면 벽에 걸면 될 일이다.

노출 콘크리트와 드라이비트로 지어진 조린헌의 외양은 레이스를 한겹 씌워놓은 것 같다. 밤에 불이 켜지면 거의 몽환적 풍경이 된다. 이웃까지 덩달아 훤해진다. 실제로도 밝아지지만 보는 사람 마음도 환하게 만든다. 조린헌이란 당호도 그래서 생겼다. 내가 레이스라고 말한 조린헌의 외장재는 '익스펜디드 메탈'이라는 마름모꼴 철망이다.

그걸로 상하 길쭉한 직사각형 모듈을 만들고, 꼼꼼하게 이어붙여, 드라이비트 마감한 집 전체를 덧씌웠다. 엷은 반투명 막으로 집을 아른아른하게 감싸는 것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가져왔다. 밥 먹고 잠자고 일하는 반복적일 수밖에 없는 일상에 의외의 활기가 얹힌 것이다. 실내를 ㄷ자로 만들었기에 가운데 중정을 둘 수 있고 거기도 남녘에서 공수해온 왕대를 심었다.

대지는 의외로 좁아서 50평 남짓이지만 가운데를 비워두는 바람에 체감면적은 훨씬 커졌다. 그 뿐만 아니라 실내로 들어오면서 중정의 대나무를 바라볼 수 있어 도심 속의 자그마한 대숲이 되고 네 가구가 계단으로 이어진 자그만 마을이 되었다. 도심 속의 다가구주택의 새로운 제안이 될만한 이 집은 건축비는 8억원, 대지구입비는 3억원 쯤 들었다.

집의 원주인은 컴퓨터회사 '싱크프리'의 강태진 사장. 캐나다에 살면서 창고를 개조한 듯한 심플한 집구조에 매력을 느껴 이런 집을 주문했단다. 송혜근씨는 말하자면 이 집에 맘을 뺏긴 첫 세입자다. 오랜 친구 사이인 둘은 각층의 특징을 맛보기 위해 서로 옮겨다니며 살아볼 계획이다.

17년간 미국의 알라메다란 섬에서 바다를 보며 살던 송씨는 이국생활에 좀처럼 길들여지지 않아 아이들이 장성한 지지난해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 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그는 이 집에서 그동안 못 썼던 이야기를 실컷 풀어놓을 꿈에 부풀어 있다.

저물 무렵 혜화동 골목 안에 서면 대나무 푸른 조린헌에 불이 켜진다. 안에서 비쳐나오는 불빛에 행인의 가슴이 괜히 설렐 수도 있겠다.


생활칼럼니스트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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