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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즈펠드는 행정부서 만난 가장 무례한 사람”

 
럼즈펠드 前 국방장관

부시 1기 행정부에서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백악관과 일하는 방식은 네 가지였다. 사소한 일은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좌관에게 가져간다. 그보다 중요한 사안은 앤드루 카드 대통령 비서실장과 상의했다. 라이스 통과다. 더 심각한 일은 딕 체니 부통령과 상대한다. 때로는 대통령과 만나 단번에 문제해결을 꾀하기도 했다. NSC 시스템이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었다. 행정부의 고위 관리는 “지난 30년 동안 고위직의 이런 반항은 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Running the world』).

 
럼즈펠드는 국무부 영역도 넘나들었다. 2001년 4월 중국 전투기와 충돌해 하이난(海南)섬에 비상 착륙한 미 정찰기 EP-3 반환 교섭은 대표적이다. 미국의 협상대표인 조셉 프루어 주중 대사의 보고 라인은 국무부가 아닌 국방부였다. 협상을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아닌 럼즈펠드가 지휘했다. 표면상 이 정찰기가 국방부 소속이라는 게 이유였다고 한다. 프루어는 곧바로 협상 라인에서도 제외됐다. 국방부가 교섭팀을 파견했다. 프루어는 클린턴 행정부 때 임명된 태평양사령관 출신이다. 이 협상은 럼즈펠드와 파월의 관계를 상징했다. 9·11테러 이후 국방부의 영향력은 더 커졌다. 라이스에게도 럼즈펠드는 버거운 상대였다.

럼즈펠드는 보수 본류다. 북한을 비롯한 불량 국가의 체제변화를 지향한다. 2004년 4월에는 “중국과 연계해 김정일 지도부를 교체해야 한다”는 자필 메모가 유출되기도 했다. 국무부의 대북 협상에 브레이크를 건 것은 이런 세계관과 맞물려 있다. 업무 스타일은 저돌적이다. 국방전문가인 토머스 도넬리는 “그는 의회와 군지휘관, 미디어를 날려버렸다”고 말한다. 군에 대한 문민 통제원칙은 확고했다. 아프가니스탄전, 이라크전 브리핑을 도맡았다. 리처드 마이어스 합참의장은 배석자에 불과했다. 걸프전 때 파월 합참의장이 전면에 나서고, 체니 국방장관이 뒷전에 있었던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뤘다. 국방장관 재임시의 최대 목표는 군사 변환(military transformation). 중후장대(重厚長大) 군을 경박단소(輕薄短小) 군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군이 들고 일어났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천생 싸움닭이다. 4선의원을 거쳐 1971년 닉슨 대통령 고문으로 백악관에 입성했을 때 닉슨에게 딴죽을 걸기 일쑤였다. 베트남 정책을 두고서다. 74년 포드 대통령 비서실장이 된 다음에는 키신저 국무장관 겸 국가안보보좌관을 타깃으로 삼았다. 대(對)소련 데탕트에 대한 반발이다. 국무장관직만 맡게 만들고 국방장관에 올랐다. 훗날 키신저는 럼즈펠드를 “행정부에서 만난 가장 무례한 사람”이라고 혹평했다. 프린스턴대 레슬링부 출신으로 프랭크 칼루치 전 국방장관이 룸메이트였다.

이라크전 이론적 설계사
울포위츠 前 국방부 부장관

부시 1기 행정부의 국무부와 국방부의 부장관 인선은 화제가 됐다. 폴 울포위츠 당시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SAIS) 원장은 국무부를 희망했다. 그는 국무부와 국방부에서 모두 요직을 거쳤다. 국무부 차관보와 국방부 차관·차관보를 지냈다. 국방부로 갈 경우 군 미필 문제가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문제는 파월 국무장관과 성향이 맞지 않았다. 파월은 울포위츠를 레이건 시대의 강경파로 여겼다. 그래서 유엔대사직을 제안했지만 울포위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국방부 부장관이 됐다.

국방부 부장관은 당초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이 바란 자리다. 베트남전에 투입된 해군 출신이다.

파월의 친구이기도 하다. 럼즈펠드는 아미티지와의 면담에서 “당신이 부장관을 맡을 확률은 반반”이라고 말했다. 화가 치민 아미티지는 “내가 그 자리를 맡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고 본다”고 되받아쳤다고 한다. 부시 1기 내내 파월·아미티지와 럼즈펠드·울포위츠 간의 간극은 좁혀지지 않았다.

울포위츠는 이라크전의 이론적 설계사다.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선제공격이나 예방공격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이라크전을 대테러전과 연결시켰다. 아버지 부시 행정부 땐 국방차관(정책담당)으로 냉전 종식에 따른 군사전략과 군비태세의 재정비를 지휘했다. 비록 장관에 오르진 못했지만 굴지의 전략가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코넬대 수학과를 나온 그는 수학적 분석력을 국방과 외교정책에 도입했다. 걸프전 작전계획도 주도했다. 친척들 다수가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로 숨진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부시 2기가 출범하면서 세계은행 총재로 자리를 옮겼다. 부시 대통령이 내건 ‘자유의 확산’과 ‘폭정의 종식’을 위한 포석이 아니냐는 얘기가 돌았다. 지난 1월 구멍 난 양말을 신고 있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날쌘돌이 별명의 체니 오른팔
루이스 리비 前 부통령 비서실장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핵심에서 ‘리크 게이트(Leak Gate)’의 피의자로-.
루이스 리비 전 부통령 비서실장의 몰락은 부시 행정부 내에서 쇠락하는 네오콘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리비는 지난달 열린 리크 게이트 재판에서 유죄 평결을 받았다. 그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었다는 분석이 조작됐다”며 부시 행정부를 비판한 조셉 윌슨 전 이라크 대리대사를 궁지로 몰기 위해 2003년 그의 부인인 중앙정보국(CIA) 요원 발레리 플레임의 신분을 누설한 혐의로 2005년 기소됐다.

딕 체니 부통령은 기소를 면했고 증언대에 서지 않았지만 리비에 대한 유죄 평결은 체니에 대한 유죄 평결로 해석되고 있다. 그는 ‘체니의 체니(체니가 부시 대통령에게 하는 최측근 역할을 리비가 체니를 위해 한다는 의미)’로 불리는 부통령의 오른팔이었다. 리크 게이트 역시 부통령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란 인식이 대세다. 그의 사임은 체니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리비는 폴 울포위츠 세계은행 총재가 예일대 정치학과 교수였을 때의 제자다. 국무부에서 일하게 된 것도 울포위츠가 1981년 변호사로 일하고 있던 그를 스카우트한 것이 계기였다. 89년 울포위츠가 국방차관으로 자리를 옮기자 리비도 함께 갔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체니를 위해 일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다.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팀에서 체니·럼즈펠드·울포위츠와 함께 선제공격론 등을 골자로 하는 네오콘 외교·군사정책의 골격을 만들었다. 리비는 ‘스쿠터(날쌘돌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아기 때 유아용 침대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잽싸게 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파월 견제용 체니의 자객”
존 볼턴 前 국무부 차관

2001년 국무부 차관에 임명됐을 때 “체니 부통령이 파월 국무장관을 견제하기 위해 보낸 자객”이란 얘기를 들었다. 골수 네오콘으로 그 본산인 미국기업연구소(AEI) 부소장을 지냈다. 재임기간 중 국무부보다는 부통령실과 국방부 쪽에 가까웠다는 평이다.

볼턴은 2003년 8월 1차 6자회담을 앞두고 미국 수석대표로 거론되기도 했다.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밀었다고 한다(『김정일 최후의 도박』, 후나바시). 당시 북한은 볼턴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관영 매체를 통해 “인간 쓰레기에다 흡혈귀는 회담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볼턴이 “김정일은 북한을 지옥 같은 악몽의 나라로 만든 폭군”이라고 한 데 대한 반격이었다. 당시 백악관의 로버트 조셉 비확산 담당 국장과 더불어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을 창안해낸 이도 볼턴이다. 같은 강경파인 조셉이 진중한 성격이라면 볼턴은 거칠다.

그는 일방주의 외교의 전형이다. 미국의 외교정책이 유엔이나 국제협약에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조약 킬러’ ‘유도 미사일’ 별명은 이런 것과 무관치 않다. 유엔에 대해선 “38층짜리 유엔 건물의 상층부 10층이 무너져 내려도 큰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그를 2005년 유엔대사로 임명한 것은 라이스 국무장관의 입김 때문으로 알려졌다. 영전의 모양새만 갖추었을 뿐 밀어내기였다. 상원 인준을 받지 못해 휴회기간을 이용한 임명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말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하자 부시 대통령은 그에 대한 재지명을 포기했다. 퇴임 후엔 부시 대통령의 대북정책 전환에 반기를 들고 있다. “6자회담 2·13 합의는 나쁜 행동을 보상하지 않는다는 1기 부시 행정부의 원칙을 어겼다”고 주장했다.

PSI 주도 반확산파 대부
로버트 조셉 前 국무부 차관

“대북 제재로 평양의 불이 모두 꺼지기를 희망한다.”
지난해 10월 북한의 핵실험 직후 로버트 조셉 당시 국무부 차관은 국무부 내 모임에서 이같이 말했다고 한다.

컬럼비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플레처 스쿨에서 국제정치를 강의해온 조셉은 학자 출신답게 침착하고 조용한 성품이다. 그러나 대량살상무기 확산에 대한 입장은 서릿발 같다. 그는 ‘반확산 대부’로 불린다. 북한과 이란의 핵 확산을 막기 위해 정권교체도 불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핵 확산에 대해 군축 협상으로 해결한다는 의미의 ‘비(非·Non)’ 대신 무력을 써서라도 저지한다는 의미의 ‘반(反·Counter)’으로 접근하는 것부터가 일방주의와 선제공격 노선을 앞세운 네오콘의 핵심인물답다.
2003년 워싱턴 포스트는 조셉을 리처드 펄(전 국방정책 자문위원)·엘리엇 아브람스(NSC 안보부보좌관)·잘메이 할릴자드(유엔대사 내정자) 등과 함께 부시 행정부 1기를 주름잡은 네오콘 외교안보팀의 선두 주자로 분류했다. 그는 재무부의 대북 금융제재를 지지하며 사석에서 여러 차례 “평양의 정권교체만이 북핵 문제의 확실한 해결책”이라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그는 북한과 대화로 핵 문제를 풀려는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와 여러 차례 충돌했다.

조셉은 지난해 10월 한국 등 동북아를 돌며 PSI 참가를 압박했다. 그러나 그달 말 미국이 북한과 양자대화를 갖고 확실한 협상 노선으로 선회하면서 조셉을 비롯한 네오콘 세력은 급속도로 쇠락의 길을 걷는다.

올 초 조셉은 “북핵은 외교로 풀어야 한다”는 니컬러스 번스 정무차관에게 “북핵은 반확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맞섰다. 그러나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북핵은 외교로 푼다”며 번스 차관의 손을 들어줬다. 조셉은 “떠날 때가 됐다”며 사표를 던졌다. 사표는 즉각 수리됐다. 지난 1월 13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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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