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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피해자 죄인 취급받는 세상, 딸에게 물려줄 순 없어”

기업 ‘미투’ 그 후
사진은 JTBC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한 장면.

사진은 JTBC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한 장면.

‘현재도 진행형이고 사회에는 입도 못 여는 수많은 진아가 있을 테니깐. 입 열었단 그 업계에서 발도 못 붙이는 을이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까. 어설픈 해피엔딩 안 해줘서 감사하네.’ 지난 5월 종영한 JTBC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 대한 어느 네티즌의 감상평이다. 드라마에서 진아(손예진 분)는 직장 상사의 상습적 성희롱을 폭로했다. 원한 것은 “가해자 측의 공개사과와 적합한 징계”다. 가해자는 명예훼손이라며 맞섰다. 법적 공방 끝에 법은 진아의 손을 들어줬다. 진아는 그럼에도, 회사를 떠났다. 지난해 말부터 터져나왔던 ‘기업 미투’ 이후에도 피해자들의 결말도 드라마와 비슷했다. 해피엔딩은 없다. 서울여성노동자회에 따르면, 미투 피해자의 10명 중 7명은 퇴사했다.
 
실제로 미투 이후 피해자는 또다른 싸움을 시작한다. 상사의 성희롱을 공개했던 한 언론사 계열 출판 관련 회사 직원 A씨의 4년에 걸친 고군분투기를 그의 육성으로 들어본다.
 
#참으면 동의, 거부하면 불이익=2014년, L이 본부장이 됐다. L은 실수를 가장한 의도적 접촉을 반복했다. 불편했지만 상사였다. 정색할 수 없었다. 어쩌다 L과 둘만 외부 교육을 받게 됐다. L은 자신의 차를 타고 가자고 했다. 거절할 명분이 마땅찮았다. 차 안에서 L의 노골적인 성희롱이 시작됐다. “결혼 후 남자 생각 안 해 봤냐” “너는 이상하게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인내심의 임계치를 넘었다. 분명한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그날부터다. L은 동료들 앞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우리 팀 전체가 최악의 업무평가를 받았다.
 
 
간부들 ‘상사의 등에 칼 꽂은 나쁜 X’ 취급
 
“싫으면 싫다고 하라.” 성폭력 피해시의 대응요령은 이렇게 간단한다. 형법에서 강간의 법적 구성요건은 ‘항거불능’의 상태다. 충분히 저항하지 않았다면 암묵적 동의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직장내 ‘권력형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다수는 불이익이 두려워 즉각 저항하지 못한다. 용감하게 저항하면 부당한 평가로 되돌아온다. “L의 성희롱적 행동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부당한 평가를 받았다고 지금도 확신한다.” 이에 회사 측은 “오래전 일이라 할 말이 없다”고 답했다.
 
#미투는 조직에 대한 위해행위=최악의 업무평가에 팀장은 평가가 잘못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제야 팀장에게 털어놨다. L이 한 짓을. 팀장은 성희롱을 정식으로 문제 삼자고 했다. 회사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회사는 L에게 감봉 5개월 처분을 내렸다. 고작 그것뿐인가. 여사우회 모임을 열었다. 사측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전달됐는지, 정직 3개월로 징계가 강화됐다. 그게 시작이었다. L과 가까운 부장들은 나를 ‘상사 등에 칼 꽂은 나쁜 X’로 취급했다. 그래도 버텼다. 회사는 이후 실적 부진의 책임을 일개 팀원인 내게 물었다. 사직을 권고했다. 일단, 육아휴직을 쓰기로 했다.
 
 
노보에 기사 공개 됐지만 회사 꿈쩍도 안 해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실제로 전국 10개 평등의 전화에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중 불이익 조치를 경험한 비율은 지난해 기준으로 63%에 달한다. 서울여성노동자회 관계자는 “지난 5월 말에야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시 조치 강화, 불이익 금지 등의 내용으로 개정된 고용평등법이 발효됐다”며 “미투 피해자를 회사에서는 조직에 해를 끼친 사람으로 규정한다”고 말했다.
 
#피해자는 투명인간=올 초 복직했다. 배정받은 부서엔 L이 있다. 다만, 현재 다른 팀으로 파견 간 상태다. 11월에 돌아온다. 정말 같은 공간에서 일하게 되면, 그때 문제 삼기로 했다. 일단 일이나 잘하자. 전에 하던 출판기획과는 다른 기자 업무를 맡았다. 짐이 안 되려 남들보다 몇 배는 노력했다. 하지만 L과 친한 것으로 알려진 편집장은 아예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이템 회의에 거의 끼지 못했다. 일부 동료들은 ‘꽃뱀’이라고 뒤에서 수군거렸다.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그러다 지난 4월, 편집장은 “기자 출신도 아니고 나이도 많아 이곳(잡지)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원래 있던 출판팀으로 가라고 했다. 부서 이동 직후 회사는 한 달 뒤 팀의 해체를 통보했다.
 
해당 편집장은 “일손이 딸리는데 회사에서 A씨를 받으라니 받았지만 A씨가 제 몫을 못해 인력 운용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그는 “A씨가 원래 하던 일이니 그쪽(출판)으로 가라고 한 것뿐, 팀이 해체되는지 전혀 몰랐다”고 했다. 서울여성노동자회에 따르면 미투 이후 피해자의 절반 이상은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미투연대 발족식에서 피해자 증언을 한 실비아(가명)는 “(직장 상사·동료들이) 가해자를 감싸고 나를 무능력자, 정신병자, 사회부적응자, 꽃뱀으로 몰아갔다”고 말했다.
 
#퇴직, 그리고 아주 가끔 투쟁=부당한 인사조치라고 회사에 항의했다. 노보에도 글을 실었다. 언론사에도 제보했다. 노보가 뿌려지고 기사가 나왔지만, 회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5월 15일, 국가인권위원회에 부당 인사 조치를 진정했다. 지난달엔 출판기획과 무관한 마케팅본부 독자팀으로 발령났다.
 
미투 열풍으로 조직 분위기가 달라졌을 것 같지만 여전히 피해자 대부분은 회사를 떠난다. 서울여성노동자회 관계자는 “이전에는 미투 2차 피해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다”며 “미투 열풍 이후에도 직장 내 피해자에 대한 보호책은 부족하다”고 말했다.
 
“내 사건 이후 그나마 회사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본다. 지금 내가 포기하면 다음 피해자도 회사를 떠나야 한다. 딸에게 피해자가 죄인 취급받는 세상을 물려줄 순 없지 않나.” A가 여전히 회사에 남아 분투하는 이유는, 이 하나였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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