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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무인 경지 못 올라, 난 진정한 고수 아니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 바둑의 일인자로 군림한 ‘전설’ 김인 9단. 그는 승부사에서 내려온 뒤에도 현재까지 바둑계 원로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 한국기원]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 바둑의 일인자로 군림한 ‘전설’ 김인 9단. 그는 승부사에서 내려온 뒤에도 현재까지 바둑계 원로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진 한국기원]

김인(75) 9단은 한국 바둑의 산증인이다. 한국 바둑의 개척자인 고 조남철 9단의 뒤를 이어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일인자로 군림했다. 조훈현 9단에게 왕좌를 물려주기 전까지, 김 9단은 중후(重厚)한 기풍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2018년 올해는 김인 9단이 입단한 지 60년 되는 해다. 처음 바둑을 접한 시기부터 계산하면, 70년 세월을 바둑과 함께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김 9단은 여전히 바둑계 원로로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요즘에는 시니어리그 대회장을 맡아 시합이 열릴 때마다 후배를 격려하고 있다. 김 9단의 바둑과 인생 이야기를 두 차례에 걸쳐 싣는다.
 
1943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김인 9단에게 바둑은 공기 같은 존재였다. 그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주변에는 늘 바둑판이 있었다. 가족 모두 바둑을 둘 줄 알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바둑을 두게 됐다. 자신도 모르게 바둑에 흠뻑 빠진 그는 13살에 홀로 바둑판을 품에 안은 채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한다.
 
58년 입단대회를 통과한 김인 9단은 가장 주목받는 신예 기사가 됐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프로기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그리 좋지 않았다. 바둑을 전문 분야가 아닌 소일거리라고 여기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김 9단은 “내가 프로기사가 될 무렵에는 바둑에 대한 사회 인식도 인식이려니와, 직업으로 입신한다는 건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바둑을 향한 소년의 열정은 쉬이 식지 않았다. 김 9단은 “나는 바둑에 발을 들인 이상 오직 최고의 고수가 되어보겠다는 일념으로 정진했다. 바둑을 알게 된 이후로는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항상 내가 부족하단 생각만 했던 거 같다”고 설명했다.
 
62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9단 문하에서 사사하고 1년9개월 만인 63년 돌아온 그는, 본격적으로 일인자를 향한 날갯짓을 시작했다. 66년 드디어 김 9단은 제10기 국수전에서 9연패를 기록 중이던 조남철 9단을 꺾고 현대바둑 사상 첫 세대교체를 이뤄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사진은 1971년 제15기 국수전 도전 4국에서 김인(왼쪽) 9단과 조남철 9단이 복기하는 모습. [사진 한국기원]

사진은 1971년 제15기 국수전 도전 4국에서 김인(왼쪽) 9단과 조남철 9단이 복기하는 모습. [사진 한국기원]

김 9단은 “이때가 바둑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라면서도 “세월이 지나니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는 단순히 가장 기뻤던 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당시 조남철 선생님의 입장은 어떠셨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아마도 새파란 후배를 상대하는 게 많이 부담스러우셨을 거 같다”고 말했다.
 
조남철 9단을 꺾고 기세를 탄 김인 9단은 거칠 것이 없었다. 곧이어 새로 탄생한 1기 왕위전에서 조남철을 2대1로 꺾고 3관왕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김인 시대’를 열었다. 당시 가장 큰 기전인 국수와 왕위전을 양손에 거머쥐고 각각 6연패와 7연패를 기록했다. 68년에는 불패 행진을 펼치며 최다 연승 부문 역대 1위인 40연승을 기록했다.
 
전성기 시절 김인 9단. 김 9단은 조 9단을 꺾고 ‘김인 시대’를 열었다. [사진 한국기원]

전성기 시절 김인 9단. 김 9단은 조 9단을 꺾고 ‘김인 시대’를 열었다. [사진 한국기원]

그런데도 김인 9단은 이때를 바둑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시절로 기억했다. 그는 “나는 일인자 자리에 머무는 내내 부담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바둑에도 전념하지 못했다”며 “인제 와서 많이 늦은 후회지만, 그때 더 바둑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이 아쉽다”고 털어놨다. 그가 아쉬워한 대로, ‘김인 시대’는 역대 한국 바둑 일인자 시대에 비해 그리 길지 못했다. 김 9단 뒤를 이어 조훈현·서봉수 9단 등이 등장했고, 김 9단은 허무하게 조 9단에게 왕좌를 물려줬다.
 
김인 9단은 “나는 스스로 일인자 자리에 대한 부담감뿐 아니라 여러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다. 당시 나는 ‘일본 바둑에 비하면 한국 바둑이 낮다’고 생각했다. 또 ‘조훈현에 비하면 내가 낮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그런 면에서 나는 진정한 고수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인 9단이 생각하는 진정한 고수는 ‘반전무인(盤前無人·바둑판 앞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바둑을 두는 것)’의 경지에 오른 이다. 김인 9단은 “최고의 고수는 상대의 눈치를 보면서 바둑을 두거나 상대를 의식해선 안 된다. 아무리 실력이 일류라고 해도 바둑을 둘 때 마음이 흔들린다면 아직 먼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최근 바둑을 ‘스포츠’ 라고 하지만, 나는 바둑을 ‘도(道)’와 ‘예(禮)’라고 배웠다”며 “고수가 되기 위해선 바둑 공부 뿐만 아니라 반드시 마음공부도 해야 한다. 젊은 시절 시합이 있기 전에 동네 뒷산을 오르며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철저히 다스리지 못했다”고 돌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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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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