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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위기설이 위기를 막는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선거철에 경제 위기설을 말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요즘처럼 제1 야당이 정부·여당의 경제 실정을 대놓고 공격 포인트로 삼는 때엔 더욱 그렇다. 잘해야 본전이요, ‘야당 선거 운동해주냐’는 비아냥이나 안 사면 다행이다. 그럼에도 위기설을 말할 수밖에 없다. 위기설은 몸의 이상 신호를 알려주는 건강 검진과 같다. 무시하고 쉬쉬하다 병을 키우면 백약이 무효일 수 있다. 위기설이야말로 위기를 막는 최상의 방패인 셈이다.
 
가계부채가 좋은 예다. 가계부채 위기설이 처음 나온 건 2002년쯤이다. 이근영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사석에서 “가계부채가 한국 경제의 뇌관이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외환위기보다 더 큰 충격이 올 수 있다”고도 했다. 막 가계부채가 400조원을 넘어섰던 때다. 그때부터 가계부채와의 전쟁은 역대 금융 감독 수장들의 첫째 임무가 됐다.
 
그후 15년이 지났다. 가계부채는 1500조원을 넘어섰다. 국내총생산(GDP)의 94.4%다. 세계경제포럼(WEF)이 경고한 위험수준 임계치(75%)는 물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76%)보다도 20%포인트가량 높다. 질도 나빠졌다. 다중 채무자가 크게 늘고 제2 금융권 빚도 눈덩이처럼 커졌다. 그런데도 터진다 터진다 하던 가계부채발 금융위기는 아직이다. 금융 당국이나 한국은행은 여전히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위기설이 구조 개혁과 체질 개선의 디딤돌이 됐기 때문이다. 금융 당국은 꾸준히 대출 규제와 빚 탕감을 통해 빚의 고삐를 잡아 왔다. 은행들엔 강도 높은 스트레스 테스트를 받게 했다. 만족할 만큼은 아니지만 한 방에 위기가 확 닥치는 것만은 막아 왔던 셈이다. 금융연구원은 집값이 30% 급락하지 않는 한 가계부채가 금융시스템 위험으로는 번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위기설이 대개 설로 끝나는 것은 경제 주체가 이처럼 대비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비하지 않을 때다. 결과는 불문가지다. 기억도 생생하다. 20년 전 외환위기 때 김영삼 정부는 “펀더멘털은 문제 없다”며 위기설을 줄곧 부인하다 화를 자초했다. 이 정부는 어떤가. 청와대는 북핵 처리에 온 힘을 쏟고 있다. 누가 사령탑인지도 모를 경제부처는 숫자로 말하는 성과는 내놓지 못한 채 “공정 경제, 소득 주도 성장의 틀을 갖췄다”고 자화자찬이다. 취업자 증가 폭이 석 달 연속 10만 명대에 머문 것은 외환위기 이후 처음인데도 이런 고용 쇼크를 청와대는 “일시적 현상”쯤으로 치부한다. 수출이 흔들리고 제조업 생산이 줄고 기업의 경기 전망이 나빠지는 등 주요 지표가 뚜렷이 이상 신호를 가리키지만 기획재정부는 “경기 회복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오죽하면 김광두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까지 “(경기가) 침체 국면의 초입에 들어섰다”며 기재부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했겠나.
 
정치는 한술 더 뜬다. 여당 중진의원은 “위기, 위기 그러는데 그러다 언제 나라가 진짜 망한 적이 있느냐”고 되물을 정도다. 야당은 위기설을 그저 정부·여당의 공격 소재로나 활용할 뿐이다. 그러니 아르헨티나가 지난주 사실상 국가 파산을 선언했고, 터키로 위기가 번지는 등 신흥국 6월 위기설이 커지고 있지만 누구 하나 관심을 보이는 이가 없다.
 
위기설은 외면할 때 진짜 위기로 찾아온다.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다. 위기설은 우리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엔 타고난 운명과도 같다. 미국 같은 큰 경제가 경기의 변곡점을 지날 때마다 소규모 개방경제는 큰 충격을 받는다. 위기설을 신호 삼아 끊임없이 경제 근육을 키워놔야 진짜 위기 때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구조 개혁과 체질 개선, 긴축의 처방전이 필요한 때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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