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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김정은 정권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렌즈

렌즈는 피사체의 빛을 모으거나 발산시켜 광학적 상(像)을 만들어 낸다. 그 모양새에 따라 확대되거나 축소된 결과물을 보여준다. 전혀 다른 색깔로 둔갑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일그러진 렌즈는 제대로 된 상을 맺지 못한다. 특정 사물이나 대상에 대한 우리 인식도 마찬가지다. 최근 한반도를 뒤흔든 남북 정상회담은 ‘우리가 과연 제대로 된 대북인식의 틀을 갖고 있었나’하는 숙제를 던졌다. 열흘 남짓한 시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의 고민을 더 깊어지게 하는 ‘북한 돋보기’의 얼개를 들여다봤다.
 

국면 전환이 절실할 때 북한 노동당의 전략가들은 치밀한 준비를 한다. 도발 쪽으로 돌아설 땐 이런저런 억지를 쓰며 빌미를 만든다.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다 유화 전술로 급선회하거나, 대화 테이블로 걸어 나올 때는 더 정교한 변곡점을 그린다. 자기들 나름의 명분과 논리를 중시하는 데다 김씨 세습정권의 명운이 걸려있다는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흔한 수법은 상대에 대한 극렬한 비방과 중상모략이다. 다시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것처럼 앙앙불락한다. 북한 노동신문은 8일 일본 자위대의 해상훈련 등을 비난하며 “일본은 백년숙적”이라고 비난했다. 앞서 6일자 논평에선 일본 정부가 대북제재 지속 필요성을 언급한 데 대해 “억년 가도 우리의 신성한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건 일본과의 대화나 관계 정상화 움직임이 금명간 가시화할 것임을 예고한다.
 
핵 문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에선 이런 분위기가 더 물씬 풍긴다. 평창 겨울올림픽 폐막을 앞두고 대화국면이 본격화할 상황에서 북한은 “우리 공화국이 핵을 포기할 것을 바라는 것은 바닷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노동신문 2월 23일)이란 주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열흘 뒤 대북특사로 방북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비핵화 협상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 실장의 방미길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까지 전달됐다. 지난달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선 ‘완전한 비핵화’란 표현으로 담겼다. 김정은 위원장은 회담 석상에서 “미국과 신뢰가 쌓이고 종전과 불가침을 약속하면 왜 우리(북)가 핵을 가지고 어렵게 살겠냐”라고 말했다는 게 청와대의 전언이다. 김정은의 말이 진정성이 있느냐는 머지않아 드러나겠지만, 비핵화 문제를 북·미 협상 카드로 쓸 것임을 내비친 속내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북한은 꽤 오랜 기간 지금의 국면을 준비해 왔다. 적어도 지난해 11월 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의 발사를 계기로 이른바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김정은 신년사를 통한 대화공세와 2월 평창올림픽 개·폐막식 참석, 여동생 김여정을 특사로 서울에 파견하는 문제까지 촘촘한 시나리오가 짜여졌다. 평창 겨울올림픽에 온 북한 응원단이 이미 지난해 말부터 조직돼 사상교양과 연습을 진행했다는 첩보는 북한의 정교한 대남전술 단면을 엿보게 한다.
 
이런 북한의 움직임에 대처하는 우리 정부와 사회의 대응은 어수룩해 보인다. 첫째, 기준점조차 없는 대북 정보판단과 인식의 문제다. 북한 체제나 김정은을 비롯한 핵심 인사에 대한 평가는 정권의 입맛에 따라 들쭉날쭉이다.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미국은 지난해 1월 대북제재 리스트에 올렸다. 그가 관장하는 선전선동부가 “억압적으로 정보를 통제하고 주민을 세뇌하고 있다”는 이유다. 이런 정보를 공유하던 우리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이 닥치자 입장을 확 바꿨다. 회담에 관여한 장관급 인사는 “북한 최고지도층에 김여정 부부장 같은 성격의 사람이 있는 게 다행”이라고 말했다. 정상회담 만찬에 참석했던 한 정계인사는 “북한의 딱딱한 여성이 아니라 서울에서 부잣집 딸로 밝게 자란 ‘나이스 레이디’였다”며 “애교가 펄펄 넘치는 귀염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김정은이 정상회담 석상에서 김여정 부서의 작품이라며 자랑하듯 꺼낸 ‘만리마 속도’는 북한 주민을 노동력 착취로 내모는 ‘노력경쟁 운동’의 대명사다.
 
둘째로 지적되는 건 오락가락하는 대북 정책부처의 입장이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서해 평화수역’과 관련한 국방부의 논리는 말 그대로 ‘녹피(鹿皮)에 가로 왈(曰)’ 하는 식이다. 보수 정부 때는 이곳에서의 공동어로가 오히려 남북 간 군사충돌을 야기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논리를 내놨던 국방부는 노무현 정부 시절 10.4 합의와 이번 정상회담 합의문에선 우발적 군사충돌 방지와 어로보장에 효과적이라며 카멜레온식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대북전단 문제도 마찬가지다. 통일부는 전단 살포가 “판문점 선언의 합의 정신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5월4일 대변인)이라며 단호한 대처를 밝혔다. 당국 합의를 이유로 탈북단체를 포함한 민간의 표현자유를 억압할 수 있느냐는 논란과 함께 남북 상호주의에 대한 비판을 야기했다. 김영철이 이끄는 당 통일전선부가 해외 서버를 두고 ‘우리 민족끼리’ 등 대남 선전·선동 사이트를 계속 운영 중이고, 북한 소행의 해킹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에 대해선 북측에 운도 떼지 못했다.
 
셋째로는 통일·안보 분야 일부 전문가 그룹의 문제다. 정상회담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김정은에 대한 리더십 재평가를 주장하던 한 전문가는 “김정은 집권 후 140명이 숙청됐는데, 이는 김정일 집권 때(2000명)의 7%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펼치다 비난을 자초했다. 또 김정은에 의해 처형된 고모부 장성택에 대해 “(기쁨조 여성 등과 낳은) 혼외자가 15명”이라는 등의 미확인설을 내놓으며 망인(亡人)에게 죽음의 책임을 돌리는 듯한 태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가 학술논문에서 이런 주장을 펼친 근거는 ‘정통한 소식통’ 뿐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원로 북한학자는 “TV 등에 출연한 대학교수·전문가들이 청와대 참모나 정부 당국자와 다름없는 찬사 일변도의 처신을 하는 것은 건전한 남북관계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남북관계에 속도가 붙을수록 더욱 신중한 대북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염돈재 전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은 “무엇보다 국민의 눈높이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지키는 게 절실하다”고 말했다. 정상회담 만찬장에서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김정은 위원장에게 자신의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청원한 건 부적절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수많은 이산가족의 입장을 고려 않고 집권 여당의 대표가 이런 식으로 불쑥 나선 건 문제라는 얘기다. 통일부 당국자는 “과거 남북회담차 평양에 간 우리 대표단 가운데 실향민을 북측이 재북가족을 동원해 회유하려 한 사례를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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