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흐루쇼프, 44세 케네디 애 취급…핵전쟁 위기 부른 '빈 회담'

[정효식 특파원의 아하! 아메리카]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1950년 정상회담(Summit)이란 용어를 만든 건 최종 결정권자인 정상간 협상이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칠의 믿음은 현실에서 일부분만 실현됐다. 실제 초강국 미국 대통령이 직접 나서 분쟁을 해결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정상회담은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가 될 리스크가 상존했다.
 
대니얼 드럭먼 조지메이슨대 명예교수는 중앙일보에 “냉전동안 미·소 정상회담은 오히려 실패하면 핵전쟁으로 치닫는 위험한 도박이었다”고 말했다.
 
196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총리가 악수하고 있다. 미·소 대결이 팽팽할 때 강행한 이들의 비공식 회담은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남았다. [JFK도서관]

196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총리가 악수하고 있다. 미·소 대결이 팽팽할 때 강행한 이들의 비공식 회담은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남았다. [JFK도서관]

교과서적 실패 사례가 갓 취임한 존 F. 케네디 대통령(44)과 노회한 혁명가 니키타 흐루쇼프(67) 소련 총리의 1961년 오스트리아 빈 정상회담이었다. 25년이 지난 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 간 레이캬비크 회담은 중거리핵무기 폐기 협정(INF)을 포함한 냉전을 해체하는 전환점을 만들었다.
 
1978년 9월 5일 지미 카터 대통령의 초대를 받고 캠프 데이비드에 도착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 [사진 지미 카터 도서관]

1978년 9월 5일 지미 카터 대통령의 초대를 받고 캠프 데이비드에 도착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 [사진 지미 카터 도서관]

반면 지미 카터 대통령과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메나헴베긴 이스라엘 총리 3자간에 진행된 1978년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은 중동전쟁을 종식한 역사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 30년간 네번의 전쟁을 치른 중동의 숙적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13일간의 협상에서 평화조약을 이끌어낸 이후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았다. 사다트와 베긴은 이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나란히 받기도 했다. 
 
드럭먼 교수는 “트럼프-김정은 회담도 사전 비밀 접촉과 비공식 만남이 효과적일 수 있고 막후 한국·중국과 협의를 더할 경우 긴장 완화는 물론 핵전쟁의 가능성을 줄이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얄타협정(2월)과 포츠담협정(8월)은 세계를 서방과 소련 공산 진영으로 양분했다. 냉전의 시작이었다. 유럽에서 냉전의 진앙은 미국·영국·프랑스와 소련이 분할 점령한 베를린. 서독 국경에서도 160㎞ 떨어진 동독 내 외딴섬 같은 베를린은 동·서독 주민들이 자유로이 통행하는 일종의 해방구였다. 스탈린은 서방 3국이 자신의 독일 중립국 통일방안을 거부하고 서독 독립을 추진하자 48년 6월부터 도로·철도·운하통행을 차단하는 ‘베를린 봉쇄’를 실시했다. 연합국은 연 20만회 이상 항공편으로 물자를 공급한 ‘베를린 공수’로 맞섰다. 오히려 동독 경제마저 어려워지자 스탈린이 봉쇄를 풀었고 49년 동·서독 정부가 각각 출범했다.
 
문제는 베를린을 통한 동독 주민의 대거 이탈이었다. 마셜 플랜을 통해 서독 경제가 급속히 부흥하자 50년대 매년 20만~30만명이 동독을 떠나 61년까지 동독 인구의 20%인 450만 명이 서독으로 이주한 것이다. 이탈자 대부분은 과학자, 기술자, 변호사 등 전문직이거나 숙련 노동자들이었다. 동독 경제는 노동력 부족으로 위기에 빠졌다. 이에 1958년 흐루쇼프는 서방 3국에 군대를 철수할 것을 최후 통첩했지만, 미국 등은 포츠담협정 위반이라며 반대했다. 흐루쇼프는 59년 9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에서 베를린 문제 해결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노회한 흐루쇼프와 패기의 케네디 만남
 
1953년 스탈린 사후 집단지도체제에서 권력투쟁을 거쳐 집권한 흐루쇼프로선 베를린 문제 해결이 발등의 불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중국은 날로 세를 키우고 있었다.
 
그는 미국 정상과의 성공적 회담을 통해 공산 진영의 수장임을 확인받고 싶어했다.
 
반면 미국으로선 소련이 1953년 수소폭탄 실험에 이어 57년 세계 최초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하자 경악했다. 대륙간 탄도미사일 기술을 선보인 셈이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군사적 위협은 묵과할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 와중에 케네디가 취임 3개월 만에 승인한 4월 피그만 침공사건이 변수가 됐다. 중앙정보국(CIA)이 쿠바인 망명 부대 1500여명을 비밀리에 파견해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하려고 했다가 대부분 체포되거나 사살됐다. 케네디로선 미·소 정상회담을 피할수 없게 됐다.
 
6월 3일 토요일 정오가 좀 지나 케네디는 회담장인 빈 미국 대사관저에 미리 도착해 흐루쇼프를 맞았다. 흐루쇼프는 의례적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피그만침공을 놓고 작심한 듯 케네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에겐 술주정뱅이에 여성편력만 일삼다 2차 대전중 사망한 장남(미코얀)이 있었는데 케네디와 동갑이었다. 67세의 흐루쇼프는 23살 어린 케네디를 얕잡아봤다. 그는 “자본주의가 봉건제에 도전해 승리했듯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 도전하는 건 역사발전의 법칙”이라고 공산주의 이론을 가르쳤다.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총리가 1961년 6월 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첫 날 회담을 마친 뒤 환영 만찬에서 재클린 케네디와 대화하고 있다.[JFK도서관]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총리가 1961년 6월 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첫 날 회담을 마친 뒤 환영 만찬에서 재클린 케네디와 대화하고 있다.[JFK도서관]

패기의 케네디는 “모든 사람은 선택의 자유를 누려야 하며 정치적 자유를 지지하는 게 미국의 입장”이라고 맞섰다. 그러면서 “쿠바 상황이나 한국전 중공군의 개입 등 소위 소련의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원은 오판을 통해 큰 위기로 확대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자 흐루쇼프는 격앙했다. “미국의 이란 새 왕정 지원과 쿠바 전복시도는 오히려 민중들의 반미 감정만 키우고 혁명세력을 강화해 줬을 뿐”이라고 되받았다. 또 케네디가 중국의 성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자 후루쇼프는 “미국이 대만을 지원하며 중국의 유엔 가입을 막고 있다. 어떤 국제기구가 인구 6억이 넘는 대국을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느냐”고 공격했다.
 
결국 케네디는 피그만침공은 자신의 오판이었다고 시인하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  흐루쇼프가 양복 상의에 매달린 훈장을 “레닌 평화상”이라고 한 데 케네디가 “꼭 간직하길 바란다”고 농담한 게 보도가 됐지만 회담장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첫날 회담이 이념 논쟁으로 흐르면서 양국의 굵직한 현안 논의는 둘째 날 회담으로 넘겨야 했다. 첫날 두 정상의 유일한 합의는 라오스 내전의 평화적 해결이 필요하다는 원칙 확인 뿐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월 27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 집 2층 회담장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판문점=한국공동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월 27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 집 2층 회담장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판문점=한국공동사진기자단]

이틀 회담 뒤 공동성명도 발표 못해
 
이튿날 케네디는 소련이 유리 가가린을 통해 최초 우주비행에 성공한 걸 칭찬하며 미국의 유인 달탐사(아폴로) 계획을 미·소 공동으로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회담 목표인 핵 실험 제한을 제안했다. 그러자 흐루쇼프는 “달 탐사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돈이 많은 미국에 양보하겠다”면서 “핵 실험 제한은 보편적, 완전한 군축부터 전제돼야 한다”고 거부했다.
 
흐루쇼프는 거꾸로 서방군대 철수를 전제로 한 독일 평화조약 체결을 주장하면서 “거부하면 단독으로 동독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겠다”고 했다. 케네디는 이날 오후 회담장을 떠나기 직전 흐루쇼프와 단독회담을 제안해 “소련의 평화조약 주장은 베를린에서 정면 대치만 부를 뿐”이라며 타협을 시도했지만 “전쟁이냐 평화냐는 미국의 선택에 달렸다”는 협박만 들어야 했다.
 
회담은 실패였다. 이틀간의 회담은 공동 성명 발표도 없이 끝났다.
 
케네디 스스로 회담 직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흐루쇼프는 피그만 사건 때문에 나를 경험도, 배짱도 없다고 생각하고 죽으라고 두들겨 패기만 했다”고 토로했을 정도다.
 
케네디는 귀국하자마자 소련과 핵 전면전때 미국 사망자가 얼마나 발생할지부터 확인했다. 펜타곤 추산은 당시 미국 인구의 약 절반인 7000만명이 사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핵미사일 한 발만 대도시 인근에 떨어져도 60만명이 사망할 것이란 추산이 곁들여졌다.
 
관련기사
하지만 케네디는 30억 달러의 예산을 추가하고 징집을 확대하고 예비군까지 동원하는 등 베를린 위기에 대비한 군비 증강에 착수했다. 트루먼 행정부 국무장관을 지낸 강경파인 딘 애치슨을 베를린 태스크포스 단장에 임명했다. 애치슨은 케네디에게 “베를린 사태는 초강대국 간 결의의 시험대라며, 필요하다면 핵전쟁을 불사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흐루쇼프는 평화조약 체결은 포기하는 대신 동독 정부가 8월 13일 새벽을 기해 동·서베를린 사이를 포함해 156㎞에 걸쳐 베를린 철책 장벽을 세우도록 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전투기 216대를 유럽에 급파했다.
 
 
미국 대통령의 성공한 정상회담과 실패한 정상회담

미국 대통령의 성공한 정상회담과 실패한 정상회담

‘준비 없는 정상회담의 실패’ 교훈 남겨
 
흐루쇼프는 케네디 대통령이 “전쟁보다는 장벽이 낫다”며 용인하자 케네디와 미국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해 이듬해 냉전사상 가장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다. 비밀리에 플로리다에서 불과 140㎞ 떨어진 쿠바에 핵미사일 배치를 시도한 것이다. 사거리 2000㎞ SS-4(R-12), 4500㎞인 SS-5(R-12) 기지 9곳을 건설한 후 9월부터 미사일 해상수송을 시작했다. 처음엔 미사일 기지 공습을 검토했던 케네디는 10월 22일 흐루쇼프에 외교적 해결책과 함께 강력한 해상봉쇄를 단행했다. 흐루쇼프에게 물러설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빈 정상회담 실패 이듬해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하자 쿠바 해상봉쇄 명령에 서명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JFK도서관]

빈 정상회담 실패 이듬해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하자 쿠바 해상봉쇄 명령에 서명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JFK도서관]

 
양측의 대치는 살벌했다. 미국은 당시 최신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에섹스, 와스프 기존 대서양함대 소속 항공모함을 총동원해 핵미사일 및 폭격기 IL-28 등을 실은 소련 화물선단을 가로 막았다. 쿠바 상공을 정찰하던 미국의 U-2기가 쿠바의 지대공미사일에 맞아 추락하는 일까지 있었다. 쿠바는 완전히 고립됐다. 즉각 핵공격이 가능하도록 B-52 전략폭격기 23대가 소련을 타격 가능한 거리에서 순회 비행하고,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145기도 비상대기 상태를 유지했다.
 
미·소 양국의 핵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는 결국 13일만에 흐루쇼프가 미사일 철수를 택하며 물러섰다. 당시 핵전력을 비교해도 220개의 핵탄두를 보유한 소련이 4000개를 보유한 미국에 절대적 열세였기 때문이다. 정상회담에선 풋내기 취급을 하며 케네디에 굴욕을 줬던 흐루쇼프가 핵전쟁을 앞둔 의지의 대결에서 거꾸로 굴욕을 당한 셈이다. 양국은 이렇게 냉전 이후 첫 핵전쟁 위기를 겪고 나서야 정상간 직통 핫라인을 설치했다.
 
빈 정상회담은 미·소 냉전사에서 준비 없이 회담을 했다가 실패한 최악의 정상회담 사례로 기록됐다. 두 정상은 서로에 대한 지식이나 기본적 이해도 부족했고 실무 회담을 통해 중요 의제에 대한 의견 접근도 시도하지 않았다. 베를린 위기는 물론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내전, 핵실험 제한 등 현안을 해결 하기는커녕 핵전쟁 직전까지 갔다.
 
이후 미국 대통령에겐 취임 첫해 소련 정상과 만나지 않는다는 게 불문율이 됐을 정도다. 소련 역시 쿠바 미사일 철수를 계기로 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을 상대로 무모한 협박을 해선 안 된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흐루쇼프 이후 지도자들이 전략 미사일 개발에 매달린 것도 회담 실패의 역효과 중 하나였다. 이 과정에서 소련 경제는 망가졌다.
 
미·소의 최고지도자가 다시 마주 앉은 것은 그로부터 11년 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레오니트 브레주네프 공산당 서기장의 정상회담이었다. 그 사이 세계는 냉전 구도에 갇혀있었다.
 
워싱턴=정효식 특파원 jjpol@joongang.co.kr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오영환 부소장 : oh.younghwan@joongang.co.kr (02-751-5515)
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