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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 생애 마지막 인터뷰 "납치 명령한 김정일도···"

최은희씨는 소녀 같았다. 장난기가 있었다. ’옛 추억을 꺼내니 절로 신이 나요. 30대로 보이게 찍어주세요. 안되겠죠. 하하.“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최은희씨는 소녀 같았다. 장난기가 있었다. ’옛 추억을 꺼내니 절로 신이 나요. 30대로 보이게 찍어주세요. 안되겠죠. 하하.“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세기의 배우’ 故 최은희 생전 마지막 인터뷰
 
영화배우 최은희씨는 3년 전 중앙일보와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요양병원에서 생활했던 그는 “더이상 언론과 만날 일은 없는 것 같다”며 아픈 몸임에도, 자신의 영화 팬들을 위해 마지막일지도 모를 자리를 마련했다. 자신의 지난 90평생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들려주었다. 
그날 기자는 꽃을 좋아하는 최은희씨를 위해 작은 선인장을 하나 선물했다. 오래오래 영화의 빛으로 살아주시라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병실에 항상 두고 보겠습니다.” 최씨의 얼굴에 화사한 꽃이 폈다. 2015년 6월 13일자 중앙일보 [박정호의 사람 풍경]에 실린 인터뷰 전문을 전한다. 
 
단아했다. 흐트러짐이 없다. 호피 무늬가 들어간 니트 모자에 작은 꽃 문양이 박힌 스카프, 그리고 겨자색 재킷 차림이었다. “오전에 병원에 들렀다가 몸단장을 하고 나왔어요. 오랜만의 외출이라 꽤 긴장돼요”라고 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속눈썹도 직접 그렸다”며 수줍어했다. “요즘 배우들 얼마나 편해요. 주위에서 다 알아서 해주잖아요. 우리 때는 꿈도 못 꿀 일이죠. 분장·의상·소품 등 모든 걸 스스로 챙겨야 했어요.”
 
올해 우리 나이로 구순(九旬). 그럼에도 재기는 여전하다. “벌써 그렇게 됐나요. 꼭 나이를 밝혀야겠어요. 11월생이니 한 살을 억울하게 더 먹은 셈이죠.” 환한 웃음이 번진다. 척추협착증으로 5년 전부터 휠체어 신세를 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년 전부터 1주에 3회 신장투석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가 또렷하다. 어제 본 듯 친근한 느낌이다. ‘세기의 연인’ ‘분단의 여배우’로 불렸던 전설의 스타 최은희씨 얘기다.  
  
“과찬입니다. 이제 ‘병신’이 다 됐어요. 눈이 침침해져 식탁 위의 반찬도 겹쳐 보일 때가 있어요. 젊어선 몰랐어요. 어머니가 아프다고 하시면 그저 주물러 드리곤 했는데, 이제는 그 고통을 피부로 느껴요. 요즘 젊은이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해요. ‘너희는 늙어 봤니, 나는 젊어 봤다’라고요.”(웃음)
 
최씨를 지난 1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가 최근 머물고 있는 재활병원 인근에서다. 남편 신상옥(1926~2006) 감독과 함께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를 이끌었던 그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등으로 한국 여인의 고전미를 대표했다. 78년 홍콩에서의 납북(拉北), 86년 오스트리아에서의 탈북, 10년 넘는 미국 생활, 99년 영구 귀국 등 영화보다 더 영화같이 살아온 그는 “한바탕 길고 긴 꿈을 꾼 것 같다”고 했다. 
입양한 두 남매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렸던 1960년대의 신상옥(오른쪽)·최은희 부부. [중앙포토]

입양한 두 남매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렸던 1960년대의 신상옥(오른쪽)·최은희 부부. [중앙포토]

 - 병원 생활이 외롭지 않으신가요.
 
 “오히려 위안을 받아요. 아픈 사람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팔자소관이라고 생각해요. 예전 화려하던 순간, 숱하게 고생했던 일 등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돼요. 제가 과연 잘 살아왔는지, 여생을 어떻게 마무리할 건지 정리하게 되고요. 나이 든다는 건 좀 더 자유로워지는 것 아니겠어요.”
 
 - 신 감독 생각이 많으시겠죠.
 
 “지금도 매일 꿈에 나타납니다. 말을 주고받을 순 없지만 그 양반은 항상 뭘 하고 있어요. 시나리오를 쓰거나, 책을 읽고 있거나…. 평생 영화밖에 모르던 외골수였잖아요. 술도 담배도 못했고요. 천당에서도 다른 영화인과 함께 뭔가 찍고 있을 겁니다.”
 
 - 천당에는 가셨을 것 같습니까.
 
 “무슨 말이죠.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아니잖아요. 제 속을 꽤 썩였지만요. 엊그제 꿈에선 제작비가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고 고민하고 있던데, 얼마나 안돼 보이던지, 천당에서나 편하게 지내실 것이지…. 말을 걸어도 대답 없이 빙그레 웃고만 있었어요.”
 
 “제가 끼고 있는 반지를 보세요. 묵주반지입니다. 몸이 불편해 성당엔 가지 못하지만 묵주기도는 하루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알고 지내온 사람들의 평화와 건강을 빌어요. 성나자로마을을 세운 이경재(1926~98)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어요. 70년대 초 안양예술학교장 시절 위문공연을 갔었지요. 세례명은 신데레사입니다. 남편 성을 땄죠. 신 감독은 시몬이고요. 병원에서도 신데레사로 불러요. ‘저 사람, 혹시 최은희?’ 하며 쳐다보던 사람도 ‘신데레사’ 소리를 들으면 아닌가 보다 하고 돌아서요. 재밌죠?”
필모그래피

필모그래피

 
 - 신 감독이 배우 오수미(1950~92)씨와 아이를 낳으면서 이혼한 적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원망스러웠죠. 죽이고 싶도록 미웠어요. 아이 하나까지는 눈감아 주었는데, 둘째를 보니 물러나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이는 생모가 키워야 하잖아요. 둘 사이에 ‘개밥의 도토리’가 될 순 없었죠. 속으로는 깊은 사랑이 남아 있었지만 말이죠. 납북 5년 만에 신 감독을 평양에서 다시 만났어요. 저와 같은 해에 납치됐던 신 감독은 북한에서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하면서 저를 찾았다고 하더군요. 지난 일이 얼음 녹듯 다 용서됐어요. 이제 살았구나,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죠.”
 
 - 6·25가 다가옵니다. 당시 고생이 크셨죠.
 
 “전쟁 발발 후 서울에 남았다가 북한 내무성 소속 경비대협주단에 들어가게 됐어요. 낮에는 연극 연습을 하고 밤에는 사상교육을 받았습니다. 이후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평남 순천까지 올라갔다가 겨우 탈출했죠. 청천강도 건넜어요. 그러고는 한국군을 만났는데, 이번엔 또 정훈공작대에서 위문공연을 하게 됐어요. 시대의, 분단의 아이러니죠. 동족상잔이 반복돼선 절대 안 됩니다.”
 
 - 28년 뒤 북한에 다시 납치됐고요.  
 
 “납치를 명령했던 김정일 위원장도 다 용서했어요. 오랜 시간이 지났잖아요. 방법은 옳지 않았지만 신 감독과 저를 활용해 북한의 낙후된 영화를 살리려 했던 뜻만은 이해가 됩니다. 연출도, 연기도 천편일률적인 북한 영화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우리 부부의 마음을 돌려놓겠다는 목적에서 5년을 참고 기다린 것도 쉬운 일이 아니죠. 다만 오해하지 마세요. 그를 용서했다고 체제를 인정하는 건 아니니까요.”
 
 - 탈출 과정도 한 편의 영화였습니다.
 
 “지금도 북한 공작원에게 쫓기는 악몽에 시달립니다. 누군가 저를 겨누고 있는 것 같은 공포심과 불안감에 사로잡혀요. 안 겪어본 사람은 모릅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북한 사회도 전보다 자유로워졌다고 하는데, 제 경험에 비춰볼 때 수긍이 안 돼요. 라디오 채널조차 고정시켜 놓은 곳이거든요. 오스트리아 미국대사관 안가에 도착해 ‘웰컴 투 웨스트(Welcome to West)’라는 말을 들었을 때 눈물이 펑펑 쏟아졌어요. 목 놓아 울었어요.”
 
 - 납치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처음 북한에 가서 펄펄 뛰었죠. 가족도, 친구도, 모든 걸 잃게 됐잖아요. 신 감독과 이혼하고 정신 없이 일했을 때거든요. 안양예술학교를 대학교로 키우고 싶었죠. 박정희 대통령도 생각납니다. 혹독한 영화 검열 때문에 신 감독이 운영하던 신필름이 문을 닫게 됐고, 한국 영화 전체도 후퇴했지만 그분만큼 나라를 위해 일했던 정치인도 없을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그런 사람이 보이지 않아요. 자기 잇속만 챙기려고 하죠. 북한에서 박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했죠.”
 
 최씨는 1940년대 초반 연극 무대로 출발했다. 배우가 기생처럼 천대받던 시절, 동네 친구의 권유로 극단 아랑을 찾아간 게 천직이 됐다. “연극을 하면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시대상도 작용했다. 철 모르고 결혼했던 첫 남편과 헤어진 후 신 감독과 운명처럼 만나면서 톱스타로 떠올랐다.
 
 -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경순’입니다. 해방 직후 ‘은희’로 개명한 이유가 있을까요.
 
 “창피하게 별걸 다 묻네요. 은희는 인기소설가 박화성씨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었죠. 멋있어 보였어요. ‘순’자가 들어간 본명이 촌스럽게 느껴졌거든요.”
 
 - 평소 배우의 자존심을 강조하셨는데요.
 
 “그게 없었다면 수많은 시련과 유혹에 버텨낼 수 없었을 겁니다. ‘잘난 척’하는 우월감이 아니에요.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태도입니다. 화려하게 살아온 것 같지만 지금까지 변변한 패물 하나 없습니다. 촬영장마다 짐을 풀고 다시 싸는 ‘트렁크 인생’이었죠. 신 감독과 함께하면서도 개런티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했어요. 돈 한 번 풍족하게 쓴 적도 없고요.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김도향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입니다. 장례식장에 틀어달라고 부탁도 해놓았어요.”
 
 - 자녀가 모두 넷입니다. 직접 낳은 경우는 없는데요. 노년에 효도는 받고 사시나요.
 
 “아이가 안 생겨 아들, 딸 한 명씩 입양했죠. 오수미씨가 낳은 아이가 둘이고요. 납북되는 바람에 애들을 잘 돌보지 못한 회한이 큽니다. 요즘 시대 효도가 뭔지 모르겠지만(웃음), 아이들 모두 착하게 커서 고마울 뿐입니다. 병원에 음식 해오고, 안부도 자주 전하고… 하느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봅니다.”
 
 -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요.
 
 “한때 남북 모두에 버림받았지만 미국에서 가정다운 가정을 처음 꾸려봤죠. 평범한 아내의 행복을 맛보았어요. 제가 원래 한번 본 것은 잘 따라 합니다. 바느질, 청소, 요리 등등. 배우가 아니었다면 1등 주부가 됐을 거예요. 여한이 있다면 신상옥 기념관을 아직 짓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내년이면 벌써 10주기죠. 제가 썼던 물건과 신 감독 소지품을 차곡차곡 모아놓았어요. 미국에서 신 감독이 사주었던 흰색 벤츠도 팔지 않았고요.”
 
 - 다시 태어나도 신 감독과 만나고 싶을까요.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웃음). 신 감독이 애인 같은 남편이었고, 또 과거가 아무리 좋았다 해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게 지금 솔직한 마음입니다.”
 
 - 배우는 훌륭한 인간이 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남의 고통에 공감해야 진짜 연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월탄(月灘) 박종화(1901~81) 선생이 지어준 안양예술학교 교훈이 ‘배우고 노력하는 인간이 되자’입니다. 저도 배우의 조건으로 마음씨·맵씨·말씨·솜씨·글씨 다섯 가지를 들어요. 그중 최고는 마음씨죠. 가장 좋아하는 선배가 한은진(1918~2003)씨입니다. 연기도, 인간됨도 모범이 됐어요. 반면에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김승호(1918~68) 선배는 연기 욕심이 너무 컸어요.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않았어요.”
 
 - 외모도 자산이죠. 선생님도 그 덕을 보셨고요.
 
 “마음이 깨끗해야 어떤 그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미모는 그 다음이죠. 그런데 요즘 배우는 왜 모두 쌍둥이 같아 보이죠. 성형을 너무 심하게 해요. 자기다운 개성, 그것 없는 배우는 오래 가지 못해요. 그게 자존심입니다.”  
 
박정호 문화·스포츠·담당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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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BOX] “내 영화 인생의 어머니” 이태영 변호사  

최은희씨는 “내게는 어머니가 두 분 계시다”고 말했다. 한 명은 낳아주신 어머니요, 다른 한 명은 사회에서 만난 어머니다. 후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였던 이태영(1914~98·그림) 박사다. 평생을 여성 인권을 위해 일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정대철(71)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의 생모이기도 하다.
 
 두 사람을 이어준 다리는 역시 영화였다. 58년 개봉한 ‘어느 여대생의 고백’이다. 영화에서 여변호사 역을 맡았던 최씨는 이 박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이 박사는 흔쾌히 조언을 했다. 최씨는 변론 장면에서 만년필을 소품으로 사용했는데, 이를 시사회에서 본 이 박사가 “법정에서 나를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것까지 알았느냐”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최씨는 “이후 집에 불러 밥도 해주시며 예뻐해 주셨어요. 지금도 계절마다 이 박사가 잠들어 계신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참배합니다. 정대철 고문도 ‘누님, 누님’ 하며 가끔씩 찾아오고요”라고 했다.
 
 이 박사는 최씨의 어려웠던 순간과 함께했다. 최씨가 신상옥 감독과 이혼한 후 친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어머니라고 불러라. 평소 딸같이 생각하니까”라며 위로했다. 최씨가 미국에서 은둔 생활을 했을 때는 워싱턴까지 찾아와 두 부부의 앞날을 축복했다. 아이들 잘 키우고 금실 좋게 살라며 청둥오리 인형 다섯 마리를 선물했다.
 
 “그분이 어떤 분인데, 제가 쉽게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었겠어요. 그렇게 하라고 해서 따랐을 뿐입니다. 딸 노릇을 제대로 못해서 못내 아쉬워요. 주위에서 우리 부부를 오해하고 비난할 때마다 늘 제 편이 돼주셨죠. 무엇보다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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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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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