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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쫓아낸 ‘태양왕’의 최대 실수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4세 초상화. 절대 권력을 누리며 유럽에서 프랑스의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조부인 앙리 4세가 개신교도인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와 국민 권리를 부여했던 낭트 칙령을 1685년 폐지했다. 이 때문에 대부분 상공업자로 국가 경제의 주축이던 20만~100만 명의 위그노가 프랑스를 떠나면서 나라 살림이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전성기는 때로 몰락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4세 초상화. 절대 권력을 누리며 유럽에서 프랑스의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조부인 앙리 4세가 개신교도인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와 국민 권리를 부여했던 낭트 칙령을 1685년 폐지했다. 이 때문에 대부분 상공업자로 국가 경제의 주축이던 20만~100만 명의 위그노가 프랑스를 떠나면서 나라 살림이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전성기는 때로 몰락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420년 전인 1598년 4월 13일 국왕 앙리 4세의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으로 새 세상을 열었다. 프랑스 개신교도인 위그노는 신앙의 자유와 국민의 권리를 인정받고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됐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는 신·구교도 간 갈등을 종식하고 안정을 되찾으면서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다. 프랑스가 이후 ‘부르봉의 전성기’를 누리면서 유럽의 강자로 군림한 것도 그 영향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앙리 4세의 손자인 국왕 루이 14세((1638~1715)는 1685년 10월 22일 낭트 칙령을 폐지했다. 개신교를 불법화하고 위그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을 대신 내렸다. 낭트 칙령이 반포된 지 불과 87년 만이다.  
 
믿음과 생각의 다양성 인정 않은 절대권력
‘태양왕’으로 불렸던 루이 14세는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국왕의 신앙에서 찾을 가능성은 별로 크지 않다. 루이 14세는 패권 강화를 위해 같은 가톨릭 국가인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치르고 대립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개신교 국가와 연합하기도 했다. 대신 경쟁국이던 개신교 국가 영국과 위그노가 내통할까 봐 우려했다는 설 등 다양한 주장이 있다. 그중 루이 14세와 재상인 리슐리외 추기경(1585~1648)이 국민을 ‘하나의 군주, 하나의 신앙, 하나의 법률’로 묶는 것이 절대왕정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던 때문이라는 주장이 가장 큰 설득력이 있다. 왕의 권력은 신이 내린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며 ‘짐이 곧 국가다’라고 외쳤던 루이 14세가 권력 강화라는 정치적인 이유로 국가적 안정을 가져왔던 종교적 관용정책을 포기하고 편 가르기에 나선 셈이다. 퐁텐블로 칙령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렸다. 프랑스는 다시 위기에 빠졌다.  
 
경제인 떠나면서 인재 기근으로 경제 타격
퐁텐블로 칙령은 루이 14세의 왕권 강화에 도움을 주고 가톨릭 국가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프랑스 경제에는 결정적인 타격을 줬다. 퐁텐블로 칙령으로 20만~1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위그노가 프랑스를 떠났기 때문이다. 루이 14세 본인이 1686년 1월 17일 “80만~90만 명의 위그노 중에서 지금 프랑스에 남은 자는 1000~1500명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발언한 기록이 있을 정도다.  
위그노 탄압을 그린 그림.

위그노 탄압을 그린 그림.

이를 두고 ‘갈 테면 가라’라고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위그노의 상당수가 상공업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부의 정당한 축적을 인정한 칼뱅주의 교리 때문이다. 수학자, 천문학자, 역사학자, 작가, 교사 등 지식인도 많았다. 당시 프랑스 기업인, 장인, 기술자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위그노의 국외탈출로 프랑스는 심각한 ‘인재 기근’ ‘두뇌 기근’을 겪어야 했다. 상공업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지식, 노하우, 기술, 인맥, 품격을 보유하고 있던 위그노들이 떠났으니 경제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실크, 시계, 열쇠와 자물쇠, 판유리, 은공예, 가구 산업은 숙련된 기술자의 상당수가 프랑스에서 사라졌다. 경제의 핵심을 차지하던 위그노가 해외로 떠나면서 프랑스는 휘청거렸다. 상품의 품질과 수준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위그노 정착한 나라들 세계 경영국가 되다
기술과 경제 노하우를 지닌 위그노 이민자를 환영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모자 쓴 사람)을 다룬 조각. 프로이센과 네덜란드, 영국 등은 위그노를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인재로 활용했다. 위그노가 향했던 이들 나라와 북미대륙은 그 뒤 세계를 경영하는 나라로 발전했다.

기술과 경제 노하우를 지닌 위그노 이민자를 환영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모자 쓴 사람)을 다룬 조각. 프로이센과 네덜란드, 영국 등은 위그노를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인재로 활용했다. 위그노가 향했던 이들 나라와 북미대륙은 그 뒤 세계를 경영하는 나라로 발전했다.

위그노는 탄압을 피해 종교·종파에 관용적인 네덜란드·스위스나 개신교가 다수인 영국·프로이센·덴마크·스웨덴 등으로 이주했다. 북미대륙과 네덜란드령 남아프리카에도 정착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위그노가 설립한 개혁교회가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경제를 잘 아는 위그노가 이주한 네덜란드, 영국, 프로이센, 미국 등은 그 뒤 세계를 경영한 나라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경제를 아는 위그노는 이주한 나라에서 축복이 됐다.  
 
네덜란드 발전과 남아공 와인 개척에도 기여
낭트 칙령 폐지 직후 몰려드는 위그노 난민을 받아들였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왈룬 교회. 네덜란드의 관용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물이다.

낭트 칙령 폐지 직후 몰려드는 위그노 난민을 받아들였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왈룬 교회. 네덜란드의 관용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물이다.

종교적 관용으로 이름났던 네덜란드는 위그노 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가 발전에 활용했다. 한때 암스테르담 인구의 25%가 위그노를 차지했다는 기록도 있다. 암스테르담의 개신교 교회로 프랑스어 예배를 보던 왈룬 교회는 낭트칙령 폐지 이후 몰려든 위그노 난민에게 임시 거처를 제공하기 위해 확장 공사를 벌였다. 일부 위그노는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식민지로 이주해 포도주 산업을 일으켰다. 오늘날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남아공 포도주는 위그노의 이주로 시작됐다. 네덜란드는 이미 1492년 이후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과 함께 추방된 유대인들을 대거 받아들여 무역업, 금융업, 해운업, 보석가공업을 키운 경험이 있었다.  
미국 뉴욕에 있는 위그노 기념비.

미국 뉴욕에 있는 위그노 기념비.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니콜라스 터프스트라(역사학) 교수는 2015년 케임브리지대 출판사에서 펴낸 저서 『근세 초기의 종교 난민(Religious Refugee in the Early Modern World)』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네덜란드는 절대 군주가 없어 ‘하나의 군주, 하나의 신앙, 하나의 법률’을 앞세워 전제정치를 추구했던 프랑스와 달랐기 때문에 종교적 관용이 다양해 위그노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전제정치나 독재정치가 없어 관용적이고 개방적인 사회 분위기를 유지해 해외에서 유용한 인재와 지식, 기술을 흡수해 무역 강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영국 섬유·제지·시계·금융 공헌
영국 캔터베리의 위그노 옛 거주자.위그노는 영국 실크와 제지, 시계 제작산업을 이끌었다.

영국 캔터베리의 위그노 옛 거주자.위그노는 영국 실크와 제지, 시계 제작산업을 이끌었다.

영국에도 위그노들이 몰려갔다. 런던 박물관에 따르면 1685년 낭트 칙령 폐지로 이주해온 위그노가 늘면서 1700년에는 무려 23개의 프랑스 위그노 교회가 런던에 있었다. 위그노들은 주로 실크 공장을 가동했다. 위그노 난민 오귀스탱 쿠르토는 잉글랜드 에식스에 이주해 이 지역  실크 산업을 개척했다. 영국의 위그노 실크 공장은 1900년대 초까지 가동하며 전 세계에 수출됐다. 1694년 설립된 영국의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Bank of England, 영란은행이라고도 함)의 초대 총재와 런던 시장을 지낸 금융인 존 허블런(1632~1712)도 프랑스 북부 릴에서 이주한 위그노 상인의 후손이다. 프랑스 중부 루앙에서 런던으로 이주한 장인 다비드 레투르장은 당시엔 첨단제품이던 시계추를 이용한 정밀 진자시계를 제작해 선보였다. 제지업자 출신 위그노의 후손인 앙리 푸르드리니에는 잉글랜드에 종이 공장을 차려 제지 산업의 초석을 다졌다.  
 
프로이센, 칙령 내려 위그노 적극 유치
특히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이자 프로이센 공작인 프리드리히 빌헬름(1620~1688, 재위 1640~1688)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프로이센은 1685년 10월 29일 ‘포츠담 칙령’을 내려 정책적으로 위그노의 입국과 정착을 장려했다. 프로이센을 비롯한 신성로마제국의 상당수 국가는 30년전쟁(1618~1648) 기간 동안 학살, 기아, 역병으로 인구의 3분의 1을 잃었다. 인구를 늘려줄 외국의 이민이 절실했다. 더구나 상공업 지식과 기술, 노하우를 가진 위그노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상황이었다. 그 뒤 프로이센이 부국강병책을 펼치며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고 독일 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데는 17세기 위그노 이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산업진흥을 꾀했던 것이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파베르제 달걀, 위그노 후손들이 제작
위그노의 흔적은 러시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러시아의 보석 공예가 파베르제 집안도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에서 이주한 위그노 난민의 후손이다. 이들은 1842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보석가게를 창업하고 각종 보석으로 치장한 달걀 모양의 공예품을 개발해 전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다.  
러시아 귀금속 문화의 정수 '파베르제의 달걀'. 위그노 후손이 제작했다. [사진제공=전호성 객원기자]

러시아 귀금속 문화의 정수 '파베르제의 달걀'. 위그노 후손이 제작했다. [사진제공=전호성 객원기자]

 
위그노 추방, 프랑스 대혁명 원인 주장도
반면 1685년 낭트 칙령 폐지로 관용의 정신에서 이탈하고 위그노 상공업자를 해외에 유출한 프랑스에선 경제적 어려움이 시작됐다. 그 뒤 100년쯤 지난 1789년 대혁명이 일어났다. 재정이 어려워지자 국왕 루이 16세(1754~1798, 재위 1774~1792년)가 소집한 삼부회가 ‘테니스코트의 맹세’로 번지고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이어지면서 프랑스의 절대왕정은 종말을 고했다.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년, 재위 1774~1792년)는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았다.  
프랑스 대혁명의 기폭제인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을 다룬 그림.

프랑스 대혁명의 기폭제인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을 다룬 그림.

 
물론 대혁명의 원인에 대해선 수많은 분석이 있다. 하지만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배고픈 국민이 불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어떤 절대 권력도 이를 막을 수가 없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대혁명은 절대왕정의 붕괴로 끝나지 않았다. 단두대로 상징되는 공포정치 시대와 나폴레옹의 제1 제정 시대, 왕정복고와 붕괴, 제2 제정 등 혼란의 시대가 100년 가까이 지속했다. 역사적 시행착오의 피해는 민중이 고스란히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민중의 고통을 겪고 목숨을 잃었다. 환희와 영광은 짧았고 고통은 길었다. 1871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프랑스 제2 제정이 무너지고 제3공화정이 들어서면서 간신히 정리됐다. 그 뒤로 프랑스는 지금까지 공화정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 부유세 현대판 퐁텐블로 칙령 주장도
국가 경제 원동력을 국외로 몰아낸 퐁텐블로 칙령과 관련된 논쟁은 현대에도 반복되고 있다. 사회당 소속인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재임 2012~2017년)이 재임 중 실시했던 증세와 부유세 강화가 논란의 핵심이다. 당시 수많은 프랑스 부자들이 세금을 피해 국외로 이주했다. 부유세 강화를 현대판 퐁텐블로 칙령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지난해 집권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경제에 활력이 필요하다며 노동개혁과 함께 감세를 선언했다. 그러자 노동자들이 의무적으로 내야 할 사회보장분담금이 증가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물론 이는 프랑스 국내에서 다양한 논쟁을 거치면서 해결할 사안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교훈을 찾을 필요는 있다. 이런 우려가 있는 나라가 어디 프랑스뿐인가.  
 
미테랑 사과했지만, 위그노는 돌아오지 않아  
프랑스 사회당 소속의 프랑수아 미테랑(1916~1996년, 재임 1981~1995년) 대통령은 퐁텐블로 칙령 선포 300주년을 맞았던 1985년 10월 전 세계에 있는 위그노의 후손들에게 공개 사과를 했다. 미테랑 대통령은 역사 앞에 겸허했으며 교훈을 얻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번 떠난 위그노는 프랑스에 돌아오지 않았다. 박해를 피해 조국을 떠난 위그노는 전 세계에서 번영의 역사를 이뤘다. 국민을 단합시킨 낭트 칙령과 국민을 외국으로 떠나게 한 퐁텐블로 칙령 중 국가 경영에서 무엇이 중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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