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허리띠 조이지 않게" … 공수표 된 6년 전 김일성광장의 약속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건 검박한 생활을 하거나 단단한 각오를 다질 경우를 일컫는다. 배고픔이나 궁핍함을 드러낼 때도 쓰인다. 만성적 경제난에 시달려온 북한 주민에게는 꽤나 친숙해진 표현이다. 북한 당국은 “미 제국주의의 대북제제 소동으로 경제가 난관에 봉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3대 세습 폐해로 초래된 국가 자원의 비효율적 투입과 생산성 부진이 핵심이다. 핵·미사일 개발로 자초한 대북제재는 가뜩이나 허약한 경제체질을 빈사 상태로 이끌었다.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자는 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입니다.”
 
지난 2012년 4월15일 평양 김일성광장. 집권 100일을 갓 넘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당시 직책은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처음으로 공개 연설 자리에 섰다. 마침 김일성(1994년 사망) 주석 출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군사퍼레이드 열린 자리다. 몸을 좌우로 흔들며 연설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다소 미숙한 면이 드러났지만, 청년 지도자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는 적지 않았다. 해외 유학파에다 개방적인 성향일 것이란 측면에서다. 김정은은 연설에서 “적들이 원자탄으로 우리를 위협 공갈하던 시대는 영원히 지나갔다”고 강조했다. 체제 안정 속에 경제와 민생 문제를 챙길 수 있을 것이란 다짐이었다. 그러면서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 앞으로!”라는 구호로 말을 맺었다.
 
김정은의 개혁 드라이브는 야심 찼다. 같은 해 6월에는 노동당이 통제하는 공장·기업소 등 경제 단위에 자율권을 대폭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 6.28 개혁 조치를 내놓았다. 이듬해 5월에는 경제개발구법을 만들어 중앙급 경제특구(5개)와 지방급 경제개발구(22개) 등 모두 27곳을 지정했다.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은 건 2013년 3월 말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이 내놓은 ‘경제·핵 병진노선’이다. 핵 보유로 재래식 무기인 전차와 함정·전투기 등을 구입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여력이 생겼으니, 이를 인민이 먹고사는 문제와 사회보장에 투입하겠다는 논리다. 1960년대 김일성이 주창한 ‘경제·국방 병진정책’의 재탕이란 비판도 제기됐다. 군수공업과 중공업에 치우친 개발정책으로 북한 경제를 수렁에 빠트린 주범으로 꼽힌 노선을 답습한다는 차원에서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런데도 김정은식 병진정책에 기대가 없었던 건 아니다. 북한 당국과 경제학자들은 논리를 튼실하게 하는 데 공을 들였다. 재일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병진노선 발표 석 달 뒤 “경제발전을 저해해 온 근본 원인인 조선반도의 전시체제, 분단상황이 하루빨리 극복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노선의 성패가 평화체제 안착에 달려있다는 분석이다. 북한 계간 학술지인 사회과학원 학보(2017년 4호)는 “최강의 핵 보유국이 된 오늘 우리에게는 강위력한 전쟁 억제력에 기초해 경제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투쟁에 자금과 노력을 총집중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마련됐다”고 강조했다. 경제·핵 병진노선에 대해 “조국수호전과 경제강국 건설을 동시에 다 같이 밀고 나갈 수 있게 하는 확고한 담보”란 주장도 제시했다.
 
하지만 핵 개발을 표방한 병진노선은 벽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촘촘해진 대북제재는 해상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던 환적 행위까지 포착해 추적했다. 산소호흡기까지 떼인 북한 경제에는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김정은의 핵·미사일 도발 폭주는 지난해 11월 말 ‘국가 핵 무력 완성’ 선언으로 정점을 찍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즈음 평양에서는 제재의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잇달아 흘러나왔다. 한국국방연구원 조남훈 책임연구위원은 “지난해 대북 제재로 군사 훈련 횟수와 강도가 줄어드는 등 북한군의 대비태세를 약화시킬 수 있다”며 “특히 북한군에 문제가 되는 건 유류 금수조치”라고 지적했다. 지난달 헬싱키 1.5트랙 회의에 참석한 북측 인사는 대북제재와 관련해 “효과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직 죽고 살 문제는 아니다”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은 위원장은 그제 노동당 중앙위 정치국회의를 열어 대남·대미 정책과 경제 노선 등과 관련한 중요 사안을 논의한 것으로 관영 매체들은 전하고 있다. 경제통인 박봉주 총리와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당 제1부부장도 참석했다. 수령의 교시나 비준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시행하던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기와 달리 노동당의 의사결정 체계를 십분 활용한다는 점을 과시하려는 움직임이다.
 
이 자리에서 김정은은 보고를 통해 “자력갱생의 혁명적 기치를 항구적으로 틀어쥐고 나가자”고 강조했다. 또 “자체의 기술 역량과 경제적 잠재력을 총동원하라”고 요구했다. 외국의 좋은 문물이나 기술을 적극 도입하라고 지시하던 과거 발언과 달라졌다. 여력이나 현실적 대안이 없다는 얘기다. 간판급 정책으로 내세워온 경제·핵 병진 노선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매년 3월 말 치러오던 병진노선 발표 기념행사도 올해엔 건너뛰었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상태에서 핵 문제가 부각되는 걸 부담스러워한 때문이란 관측과 함께, 경제·핵 병진 노선이 파탄에 이른 징후란 분석이 나온다. 최근 수 년간 최고인민회의가 발표한 북한 예산 집행 결과에 따르면 16% 수준의 국방비(실제로는 은닉예산을 포함해 30% 정도일 것으로 정부 당국은 추산) 비중은 병진노선 제시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다. 통일부 당국자는 “11일 열릴 최고인민회의 13기 6차회의에서 어떤 변화가 나타날지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달 말 전격적인 중국 방문을 통해 시진핑 국가 주석과 첫 정상외교를 펼쳤다. 서울과 워싱턴을 가면서 베이징을 건너뛴다는 건 아직 상상하기 힘든 일이란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부인 이설주를 동반한 ‘미소 외교’는 북·중 관계의 얼음장을 녹이는 데 일조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찬성표를 던진 중국을 겨냥해 “대국이 줏대 없이 미국의 제재놀음에 동참했다”고 비아냥거리던 김정은 체제에 중국 지도부가 면죄부를 준 듯한 인상이다. 진귀한 술과 비단·보석 등을 선물로 받아안은 김정은은 평양으로 돌아가는 열차에서 “이 맛에 핵 개발하는 거야”라며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압록강을 넘으며 그가 목도한 경제 실상은 녹록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 개혁·개방으로 번창해가는 중국과의 대비가 극명했을 것이란 얘기다. 김정은은 방중 기간 ‘베이징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중관춘(中關村) 소재 중국과학원에 들러 가상현실(VR)을 체험했다. 그가 살펴봐야 할 건 가상이 아닌 북한 경제의 실상과 인민의 삶이다. 김정은이 장마당을 현지지도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이런 이유에서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다른 기자들의 연재 기사 보기

뉴스레터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