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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그 후로도 오랜 동안 (최종회)

기자
사도시 사진 사도시
[일러스트 김회룡]

[일러스트 김회룡]

 
내가 쓴 편지가 아니타와 릭에게 전해졌다. 

 
“릭. 너와 플린트 힐 초등학교 다니던 시간이 생각나. 매 주말 우리는 축구공을 차며 상큼한 미소로 가득 찬 소년들이었지. 세속의 때가 묻지 않은 우리들의 모습이 그리워지긴 해. 나와 린다가 없는 이곳에서 너는 이제 비트코인의 유일한 주인공일지 모르겠다. 우리가 만든 비트코인이 그 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할까. 아름답고 혜택을 주고 은총이 가득한 길을 우리 셋이 걸어가는 상상을 해 본다. 너와 노스캐롤라이나의 아우터 뱅크의 모래 공원을 함께 간 기억이 새롭다. 바람이 만든 모래를 보내 만든 작은 사막에서 우리는 미끄럼을 탔잖아. 그때 그 모래사막은 지금도 여전하겠지. 설마 너와 린다와 내가 만든 비트코인이 무너지는 모래성은 아니겠지. 나는 괜찮으니 린다의 명복을 빌어줘. 그리고 잘못을 한 부분에 대해서는 용서를 빌어. 누구나 죄를 저지를 수 있지만 세상은 정의로 가득 차 있어야 해. 비트코인이 검은돈으로 사용된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파. 파리테러 사건은 내 가슴에 멍이 되었어. 비트코인의 명예를 살려줘. 죽은 린다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길 바란다.”

 
2015년 11월 13일 프랑스 파리 곳곳에서 자살폭탄과 총기를 이용한 동시다발적 테러가 발생했다. 이 테러를 자행한 IS는 정부시설이나 공공기관이 아닌 일반 시민을 표적으로 삼아 공연장, 축구경기장, 식당, 카페 등에서 테러를 저질렀다. 이날 발생한 테러로 132명이 사망하고 350여명이 다쳤다. 파리테러 공격을 감행한 이슬람세력들이 비트코인으로 자금을 조달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파리테러가 일어난 후 유럽연합(EU)은 비트코인이 테러리스트의 자금으로 이용되었는지를 조사했다. 릭에게 나는 신뢰의 바다로 가기 위한 항해를 위해 일련의 나쁜 행동을 중지할 것을 이야기했다. 내 죽음으로 릭의 태도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런 잘못된 행위에 대한 경각심을 알고 린다와 그녀의 언니에 대한 최소한의 일말의 양심을 갖기를 기도했다.

 
내 편지가 도착한 날. 아니타는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러브 인 뉴욕’을 남편 로버트 와트와 함께 보고 온 그녀는 편지를 읽다가 소리 없이 흐느꼈다.

 
“이 편지를 쓰길 손꼽아 기다렸어. 그런데 힘이 너무 빠져 손편지를 쓰기 어렵지만 내 사랑의 증표를 너에게 보이고 싶었다. 우리가 본 그 오래된 영화 있잖아. 사랑과 영혼(고스트) 아마도 나는 패트릭 스웨이지의 운명이었나 봐. 그 역시 암으로 죽었잖아.”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아니타와 나는 ‘사랑과 영혼’을 본 후 영화 흉내를 냈다. 아니타는 물레를 돌리는 여자 주인공 데미 무어였다. 나는 뒤에서 안듯 감싸는 패트릭 스웨이지를 흉내냈다. 그 사진은 아직도 내 서랍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아니타. 죽은 후에도 연인의 곁을 맴돌며 사랑을 전한다는 그 진부한 소재의 이야기가 나였으면 좋겠어. 그 영화가 그냥 함께 본 추억이 아니길 바란다면 과분한 욕심일까. 물론 너의 행복을 빌어. 이제 당신은 한 남자의 아내이니까. 그리고 성공한 여성의 대표잖아. 뉴욕 증권가에서 일하는 샘 팻은 직장에서도 잘나가고 연인인 몰리와도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강도의 습격을 당하고 죽었잖아. 그처럼 내 영혼이 육체에서 떨어져 나갈까. 당신은 내 시체를 안고 울부짖는 몰리일 수는 없겠지. 영화는 영화잖아. 하지만, 유령이 되어서도 사랑하는 연인을 지켜주는 샘이고 싶어. 나의 비밀일기를 동봉해. 읽고 난 후 불태워줘. 너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너의 곁에 있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담았어. 2009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패트릭 스웨이지의 걸작 더티 댄싱을 생각하며. 나도 그와 같이 불타는 열정으로 아니타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아줄 것을 요구한다면 사치일까. 그래도 너를 향한 내 진심은 믿어줘. 남의 아내라도 사랑해. 미안해. 그리고 감사해. - 빌..'

 
아니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남편 로버트가 물었다.

 
“왜 그래.”

 
“아니에요. 친구가 죽었어요. 아이를 데리고 잠시 여행 좀 다녀올게요.”

 
아니타에게 모든 걸 고백한 것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니타의 남자로 남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게 허황한 욕심이었을 수도 있다. 왠지 모르게 아니타가 남의 여자가 되었어도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모든 걸 털어놓고 난 뒤 잃을 게 없는 사람에겐 더 추락할 바닥도 없다. 아니타는 내 편지를 불태웠다. 이 세상에 사토시 나카모토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다만 내 계정의 비밀번호는 간곡한 부탁으로 노트에 적어 놓았다. 내 유산이기에 부모님이 언젠가 좋은 일에 쓸 수 있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니타는 옷을 갈아입고 편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아뵙는다. 아니타를 맞이하면서 옆에 있는 아이를 본 어머니가 먼저 말씀하신다.

 
“참 잘생겼어. 누군가를 똑 닮은 아이 같아. 어디서 많이 본. 빌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아. 여보 그렇지 않아요?”

 
“그렇군. 눈이 특히나.”

 
아버지는 울고 있었다.

 
“아이를 한번 안아 봐도 될까요?”

 
“네.”

 
아버지는 아이를 꼭 안아 보았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아이를 포옹해 보라고 권유했다.

 
“아이 이름이 뭐죠.”

 
“벤자민입니다.”

 
아니타는 옆에 있던 아이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 주길 원했다. 아이에게 아버지는 농구공을 주었다. 아이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농구공을 가지고 드리블도 하고 슛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슬픔에 빠진 아버지가 먼저 말씀하신다.

 
“빌이 진정 사랑했어요. 천국에 있는 빌이 행복을 빌 거예요. 부디 행복한 가정 잘 지키고 우리 빌의 아픔은 이제 잊어 주세요. 때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는 걸 영화로 보았는데. 이게 현실에서 그것도 내 자식이 겪은 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네요.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뿐입니다.”

 
아니타는 슬픈 표정을 애써 억누르며 조용히 아버지에게 말한다.

 
“처음에는 빌을 원망했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사랑한 첫 남자였거든요. 빌은 떠났지만, 그의 명예를 살리는 방법을 찾겠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게 할 수만은 없어요. 세간의 오해도 풀게 할 것이고요.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는 벌을 주기도 해야죠.”

 
아이가 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버지는 아이 곁에 가서 농구를 같이 한다.

 
“이 할아버지가 나이는 들었지만, 슛은 잘 넣는단다. 나랑 누가 슛을 더 많이 넣나 한번 해 볼래.”

 
아버지와 벤자민은 호흡이 잘 맞는 환상의 콤비처럼 금새 친해졌다.

 
“벤자민, 가끔 엄마랑 여기 놀러 올 수 있어. 이 할아버지가 네가 무척 그리울 것 같아. 네가 누구를 똑 닮았거든. 너 이다음에 커서 뭘 하고 싶니.”

 
“저요. 월가의 사나이요.”

 
“왜?”

 
“음. 월가의 영웅이었던 피터린치분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요. 그가 한 말이 있어요. 주식투자는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다. 모든 걸 정밀하게 수량화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은 상당한 불리함을 갖고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어려운 말을 네가 이해하니?”

 
“그럼요. 사람이 이성만으로는 살 수 없지요. 감성과 이성이 조화되어야 감각이 생기는 것 아닐까요.”

 
“착한 월가의 사나이가 되렴.”

 
“그럼요. 저희 어머니가 얼마나 철저하게 좋은 돈의 개념을 가르치시는데요.”

 
곧 10상 생일을 맞이하는 벤자민. 누군가의 후예가 될 것 같은 그의 머리에 바람이 불어 빌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같은 오후다. 아니타는 조용히 아버지 어머니에게 말한다.

 
“훗날 빌앤 재단을 만들까 해요.”

 
아니타는 두 분의 손을 꼭 잡고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었다. 아버지는 다시 벤자민을 크게 포옹했다. 사라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벤자민을 통해서 충족하려는 것일까. 그는 속으로 울고 있었지만 애써 태연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사토시 나카모토는 몰라도 빌이란 한 인간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다. 햇살이 그들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들은 삶을 이야기하고 빌을 추억했다.
 
※ 지금까지 비트코인을 다룬 첫 소설 '누가 사토시 나카모토를 죽였나'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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