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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대북정책 비판 목소리 막나 … 문재인 정부판 ‘블랙리스트’?

‘내로남불’의 시대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의미의 이 속된 표현에 우리 사회는 어느새 익숙해졌다. 그만큼 역지사지의 배려가 결핍됐다는 의미다.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이전 권력의 행태를 ‘적폐 척결’이란 이름으로 단죄하겠다면서도 전철(前轍)을 밟고 있다. 옛 어른들이 깨우쳐 준 ‘미워하면서 닮아간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정책 노선에 비판 성향을 보였다는 이유로 연구기관과 박사·교수에게 재갈을 물리고, 은밀하게 압박하는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의 요지경을 들여다본다.
 
‘주의가 요구되는 인물 목록’을 일컫는 블랙리스트(black list)는 본래 미국 등 서방 국가 노동계에서 통용됐다. 노동조합 활동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 측이 핵심 노조원 명단을 은밀하게 관리한 데서 나왔다. 이 용어가 한국에 건너오면서 특정 정치 성향을 가진 인물이나 범죄자를 지칭하는 쪽으로 의미가 확대돼 왔다.

 
지난해 5월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 시기 블랙리스트 문제점을 파헤치는 데 집중했다. 주로 문화·예술계 인사를 대상에 올려 정부 비판 활동을 막거나 압력을 가하는 방식이 동원됐다는 게 검찰 수사 결과다. 박근혜 정부 핵심 인사가 줄줄이 구속되거나 재판을 받고 있고, 방송계 등 우리 사회 일각에선 후유증이 크다.
 
그런데 이전 정부에서나 있었을 법한 일들이 고스란히 재연되고 있다는 전언이 속속 이어져 눈길을 끈다. 이번엔 대북 문제와 외교·안보 현안을 다루는 연구기관과 전문가·학자 그룹이 주 대상이다. 정부 정책 노선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대북 비판 언급을 할 경우 직접적인 압박이나 간섭의 손길이 뻗친다는 얘기다. 특히 정부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는 국책 연구기관이나 부처 산하단체가 타깃이라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 연구기관 박사는 “과거 정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라고 전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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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외교원 S교수의 사례는 외교·안보 당국자와 전문가들 사이에 입소문이 파다하다. 지난 1월 JTBC 토론 프로에 참석한 S교수는 어쩔 수 없이 야당 쪽에 자리했다. 나머지 토론자 3명이 김홍걸 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과 청와대 안보실 정책 자문위원인 김연철 인제대 교수, 자유한국당 이재영 최고위원이다 보니 방송사 측이 지정한 대로 이 최고위원 옆에 앉은 것이다. 동료 박사는 “그 날 S교수의 토론은 중립적이면서도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에 힘을 실어주는 취지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청와대 쪽에선 몇몇 발언을 문제 삼았고, 야당 쪽에 자리한 것까지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한 관계자는 “문재인 캠프 출신으로 청와대 외교·안보 실세를 자처하는 모 인사가 발끈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고 귀띔했다. 이후에도 계속된 간섭과 제재를 견디다 못한 S교수는 사직을 결정했다.
 
국무부 한국 과장 출신인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박사의 경우는 국내 기관에 적을 둔 외국 연구자에게 압박이 가해진 특이한 경우다. 공직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과 한반도 정세에 대한 연구 발표와 강연·인터뷰 등을 해온 스트라우브는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임용 1년여 만에 짐을 싸야 했다. 국책 연구기관장 출신 전문가는 “스트라우브가 한·미 동맹 균열을 의미하는 ‘디커플링(decoupling)’이란 용어를 쓰고, ‘(문재인 정부가) 북한에 속고 있다’는 경고를 자주 한 게 눈 밖에 난 이유란 얘기가 돌았다”고 말했다. 스트라우브가 떠난 걸 두고 문정인 대통령 외교·안보특보까지 “트럼프의 대북 강경책을 비판하는 등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전문가였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는 후문이다.
 
스트라우브 해임은 노무현 정부의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이 지난 2월 세종연구소 이사장에 취임한 뒤 이뤄졌다. 연구소는 소장도 교체하기 위해 공모 절차를 진행 중이다. 외교·안보 관련 다른 국책 연구기관이나 산하단체도 기관장을 교체했거나 추진 중이다. 일부 기관에서는 임기를 채우거나 연임하려는 기관장이 소속 연구원이나 박사에게 무리한 코드 맞추기를 강요하는 현상도 나타난다고 한다.
 
외교·안보 분야는 과거 보수정권 시절에도 홍역을 앓았다. 국가정보원은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소속 일부 박사들이 당시 야당을 후원하는 등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는 이유를 들어 징계와 해임 조치를 취하려 했다. 야당 측 반발로 무산됐지만 해당 박사들은 마음고생이 심했다. 이들은 이번 정부 들어 국정원 요직에 발탁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요즘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몇 년 전 사태의 ‘데자뷔(deja vu)’라 불릴 만하다”고 말했다.
 
최근 북한에 비판적 입장의 학자·전문가들에겐 TV방송 출연이나 외부 기고 정지 조치가 내려지는 경우도 늘고 있다. 대부분의 국책 기관들이 외부활동을 사전에 서면 등으로 보고토록 규정하고 있는 데 근거를 둔 것이다. 이들의 손발이 묶이면서 편중 현상도 나타난다. 종편 등 방송의 통일·안보 관련 코너에는 대선 캠프 출신 등 친정부 성향 인사 몇몇을 중심으로 겹치기 출연이 이어진다. 그러다 보니 건전한 비판이나 대안 제시보다는 정부 정책을 설명하는 데 치중한다. 동종교배의 후유증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제 ‘월천 선생’(방송출연 등 외부활동으로 월 1000만원 이상을 버는 교수·학자)도 완전 진영교체가 됐다”는 말이 나온다.
 
그 부작용이 하나 둘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최근 급속히 진행되는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서 북한에 비판적인 탈북 인사의 등장까지 가로막힌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2016년 7월 망명한 태영호 영국 주재 북한 공사를 비롯해 관계기관의 보호를 받는 고위 탈북자들은 공개활동을 사실상 중단한 상태다. 지난해 11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탈북·망명한 북한군 병사 오 모씨도 부상에서 완치됐지만 당국은 기자회견 계획을 잡지 않고 있다. 오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에서 같은 지역으로 탈북한 병사가 부각될 경우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으로 분석된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만나는 정상회담은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이벤트다. 북한 핵 폐기를 비롯한 중요한 현안이 다뤄지고, 한반도 정세에도 큰 변동을 가져올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주도권을 쥔 청와대와 정부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 비판을 허용 않고, 반대 목소리를 억누르고 싶은 유혹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 자칫 독주로 흐를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런 국면에서 외교·안보 전문가 그룹에서 불거진 블랙리스트 논란은 서둘러 해법을 찾아야 한다. 국민과 여론의 눈엔 훤히 보이는 것들도 권력의 자리에선 놓칠 수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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