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놔두자니 투기 걱정, 막자니 산업 저해…ICO 금지에 ‘엑소더스 코리아’

미국 정보기술(IT) 전문매체 테크크런치에 따르면 2017년부터 올해 2월까지 블록체인 기술을 바탕으로 한 전 세계 암호화폐 관련 기업이 암호화폐공개(ICO)를 통해 조달한 자금은 45억 달러(4조8200억원)에 달한다. 
 
파일코인(Filecoin)·테조스(Tezos)가 ICO로 각각 2억7700만 달러, 2억3200만 달러를 끌어 모은 게 대표적이다. 벤처기업의 전통적인 자금 조달 방식으로 볼 수 있는 벤처캐피탈(VC)을 통한 건 13억 달러(1조4000억원)에 그쳤다. 암호화폐 열풍이 벤처 업계의 투자 패턴까지 바꾸고 있는 셈이다.
 
한국은 이런 바람에서 비켜서 있다. 정부가 원칙적으로 ICO를 금지하고 있어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룰’이 없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9월 1일 “지분증권·채무증권 등 증권발행 형식의 ICO는 자본시장법 위반으로 처벌할 것”이라고 밝혔다. 9월 29일에는 더 나아가 “모든 형태의 ICO를 금지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금지 발표 이후 새로운 입법 조치가 있었던 건 아니다. 처벌 근거가 불명확하다는 얘기다. 물론 형법이나 자본시장법을 폭넓게 해석하면 처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단순한 ‘금지 선언’만으로도 관련 기업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다.  
 
ICO 금지 정부 방침에도 처벌 근거는 불명확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수의 국내 블록체인 업체들은 스위스나 싱가포르 등 해외에 법인이나 재단을 만들어 ICO를 추진한다. 국내 규제 완화 조짐이 보이지 않는 상황인 데다 아이콘 등 성공사례가 나오면서 아예 해외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해외 ICO의 경우 보통 여러 나라 업체와 합작 형태로 이뤄진다”며 “이 중 한국 업체가 중심이 된 프로젝트는 현재 유럽지역에서만 20개 이상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물론 해외에서 ICO를 진행해도 한국인에게 투자를 권유하는 행위는 불법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미 많은 국내 투자자가 해외 ICO에 참여하고 있다. 투자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간다는 얘기다. ICO가 당장 법인의 소재지 이전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장기적으론 우수한 인력의 유출도 우려할 만한 부분이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교수는 “ICO는 벤처기업이 사업계획을 설명하고 투자를 받는 것과 비슷한데 원금 보장이나 일정한 수익을 약속하고 자금을 모으는 유사수신과는 본질에서 다르다”며 “정부가 너무 경직적으로 접근하는 건 블록체인 산업의 성장을 저해하고, 일자리 창출 기회도 잃는 셈”이라고 말했다.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해 9월 3일 열린 암호화폐 TF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금융위원회)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해 9월 3일 열린 암호화폐 TF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금융위원회)

 
업계에선 ‘국내 기업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외에서라도 ICO를 추진할 여력이 있다면 모르지만 작은 업체는 엄두를 못 내는 게 사실이다. 실제로 지난해 해외에서 ICO를 추진한 국내 업체는 대기업 계열이거나 모기업이 있는 경우였다. 
 
김경훈 정보통신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블록체인 사업을 하는 대기업은 자금조달 창구가 다양하지만 스타트업은 그렇지 않다”며 “블록체인 생태계를 조성하려면 ICO가 필수적인데 법 테두리 안에서 부분적으로라도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마냥 풀어줄 순 없다. 지금의 ICO가 상당한 위험을 내포한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암호화폐 전문매체 비트코인닷컴의 조사에 따르면 최근 ICO를 추진한 902개 기업 중 142개 기업이 자금 조달 전에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276개 기업은 모금 후 실패했다. 
 
투자자와의 소통을 중단해 ‘사실상 실패’로 볼 수 있는 기업도 113개였다. 전체의 58.9%가 벌써 문을 닫은 셈이다. 당장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는 곳까지 고려하면 투자 성공률이 매우 낮다.
 
백서 한 장에 투자 올인…투기·과열 우려 여전
 
업체들은 보통 블록체인을 활용한 서비스(기술)의 가치와 사업 계획 등을 담은 백서를 내놓고, 홈페이지 정도만 연 상태에서 ICO를 한다. 개발은 돈을 받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팸플릿만 보고 물건을 사는 셈이다. 
 
또한 해당 암호화폐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기술 알고리즘이나 프로그램 코드를 분석할 능력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투자금을 받을 지갑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보안 문제는 없는지도 꼼꼼히 따져야 한다. 
 
그런데 대다수 투자자는 해당 업체가 제공하는 정보에 의존한다. 개발자와 경영자의 모럴해저드가 발생할 확률이 낮지 않다. 시세 조종이나 내부자 거래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통적인 금융강국 스위스는 최근 암호화폐공개(ICO) 중심지로 각광받고 있다. (사진=장원석 기자)

전통적인 금융강국 스위스는 최근 암호화폐공개(ICO) 중심지로 각광받고 있다. (사진=장원석 기자)

이렇게 마땅한 투자자 보호 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정부가 ICO를 전면 금지한 건 일종의 ‘시간 벌기’ 성격이 강하다. 급상승하던 암호화폐 가격이 어느 정도 안정됐다는 점에서 효과가 있었다고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만큼 정부가 하루 빨리 적절한 규제책을 담은 가이드라인을 내놔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미국은 ICO를 하려면 기업공개(IPO)에 준하는 자격을 갖추도록 했고, 일본은 거래소 등록제를 시행하고 있다. 암호화폐를 제도권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이다. 
 
박한우 영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규제 혹은 탈규제 중 하나를 선택하려는 관료주의부터 벗어 던져야 한다”며 “개발자·업체·거래소·투자자와 대화하고, 배우면 얼마든지 산업을 키울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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