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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O는 월가, ICO(암호화폐 공개)는 스위스…“디지털 시계에 밀린 명품 시계 역사, 반복하지 않겠다”

[암호화폐, 투기 대상에서 산업으로 <중>] 
ICO 천국 스위스 추크의 마티아스 미쉘 경제장관이 말하는 스위스의 샌드박스 규제와 진흥책. 
 
암호화폐(일명 가상화폐)는 혁명일까 바람일까. 투기 바람은 잠잠해졌다. 이제는 산업 발전을 고민해야 할 때다. 규제는 불가피하다. 하지만 적어도 세 나라에서는 적절한 규제와 함께 암호화폐 및 블록체인 산업 진흥에 대한 고민이 진지하게 익어가고 있다. 일본·스위스·에스토니아를 다녀왔다. 그들의 현실은 어떻고, 어떤 미래를 만들기 위해 제도적 노력을 하는지 조명했다.
 
스위스의 경제 중심지 취리히에서 남쪽으로 30분쯤 떨어진 추크(Zug)는 얼핏 관광지로 보이지만 스위스 최대의 기업도시 중 하나다. (사진=주크 칸톤 제공)

스위스의 경제 중심지 취리히에서 남쪽으로 30분쯤 떨어진 추크(Zug)는 얼핏 관광지로 보이지만 스위스 최대의 기업도시 중 하나다. (사진=주크 칸톤 제공)

 
스위스의 경제 중심지 취리히에서 남쪽으로 30분쯤 달리면 추크(Zug)라는 소도시가 나온다. 투명한 추크 호수를 형형색색 지붕의 집이 둘러싼다. 그 뒤로 하늘과 닿은 알프스가 절경을 연출한다. 
 
얼핏 관광지로 보이지만 추크는 스위스 최대의 기업도시 중 하나다. 일찌감치 정보통신기술(ICT)·헬스케어 클러스터가 들어서 지멘스·로슈·바릴라 등 수많은 글로벌 기업이 둥지를 틀었다. 탁월한 기업환경과 유연한 규제가 강점이다. 8.6~14%인 법인세율은 스위스 26개 칸톤(주·州) 중 가장 낮고, 세계 각국과 비교해도 경쟁력이 뛰어나다.
 
크립토밸리 5년, ICO 성지(聖地) 된 스위스
 
최근 추크엔 세계 각국의 암호화폐 관계자가 몰려들고 있다. 암호화폐공개(ICO)의 성지로 알려지면서다. 추크는 일찌감치 크립토밸리(Crypto Valley)를 만들어 이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2013년 비트코인 스위스가 설립됐고, 이듬해엔 암호화폐 시가총액 2위인 이더리움 재단이 자리를 잡았다. 지난해 한국기업이 참여한 에이치닥(Hdac)·아이콘(ICON)이 수백억 원 규모의 ICO에 성공하면서 국내에도 이름을 알렸다. 아이콘은 공개 이후 가치가 급상승해 시가총액이 3조원을 오갈 정도로 성장했다. 에이치닥 역시 거래소 상장을 앞두고 있다.
 
비트코인스위스가 위치한 건물. 추크 중앙역에서 한 블록 떨어진 이 거리에만 5~6개의 암호화폐 관련 기업이 입주해 있다.(사진=장원석 기자)

비트코인스위스가 위치한 건물. 추크 중앙역에서 한 블록 떨어진 이 거리에만 5~6개의 암호화폐 관련 기업이 입주해 있다.(사진=장원석 기자)

 
☞암호화폐공개(ICO)
ICO는 블록체인 기술을 가진 업체가 기술과 연계된 암호화폐를 투자자에게 나눠주고 사업자금을 모으는 것을 말한다. 기업이 주식시장에서 기업공개(IPO)로 자금을 조달하는 것과 비슷하다. IPO를 할 때 기업가치를 보고 투자를 결정하듯 ICO 역시 해당 업체가 가진 기술(서비스)의 가치나 성장성이 중요한 투자 결정 요인이다. ICO를 하면 업체는 투자자에게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같은 암호화폐를 받고, 투자자에게 자신들의 암호화폐를 지급한다. 업체는 조달한 비트코인 등을 현금화해 사업자금으로 쓰고, 투자자는 새 암호화폐의 시세가 오르면 수익을 낼 수 있다. ICO에 성공했다고 모든 암호화폐가 상장되는 건 아니다. 전 세계 암호화폐 거래소는 경영자나 개발자의 경험, 기술력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상장 여부를 결정한다. 상장되지 않은 암호화폐도 개인 간 거래는 가능하다.
 
2013년 추크에서 시작한 크립토밸리는 이제 북쪽 취리히와 남쪽 슈비츠를 아우르는 동심원을 형성할 정도로 커졌다. 사진은 취리히 전경. (사진=장원석 기자)

2013년 추크에서 시작한 크립토밸리는 이제 북쪽 취리히와 남쪽 슈비츠를 아우르는 동심원을 형성할 정도로 커졌다. 사진은 취리히 전경. (사진=장원석 기자)

 
이렇게 크립토밸리 설립 5년 만에 추크엔 170여 개의 암호화폐·블록체인 기업과 재단이 몰려 일종의 파이프라인을 형성하게 됐다. 현재 ICO를 준비 중인 업체도 40~50여 곳에 달한다. 추크에서 시작한 크립토밸리는 이제 북쪽 취리히와 남쪽 슈비츠를 아우르는 동심원을 형성할 정도로 커졌다.  
 
지난달 23일 현지에서 마티아스 미셀(Matthias Michel) 추크 칸톤 경제장관을 만났다. 크립토밸리의 지휘자다. 그는 “디지털 시계에 당했던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무슨 의미일까?
 
각국이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에 큰 관심을 보인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는 의미 아니겠나? 블록체인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기본 기술이다. 모든 참여자가 권리와 이익, 재산에 투명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든다. 계약은 스마트해질 것이고, 수요와 공급을 관리하는 건 간단해진다. 물건을 사고 파는 방식, 나아가 무역을 하는 방식을 바꿀 게 확실하다. 기존 은행이나 보험회사를 중심으로 한 금융 질서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긴장해야 할 거다. 이를 바탕으로 한 암호화폐 역시 단순한 지불 기능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다. 이 엄청난 변화를 그냥 두고만 볼 수 있겠나?”
 
2월 23일 스위스 추크에 위치한 칸톤 추크 청사 집무실에서 만난 마티아스 미쉘 경제장관이 스위스의 암호화폐 규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장원석 기자)

2월 23일 스위스 추크에 위치한 칸톤 추크 청사 집무실에서 만난 마티아스 미쉘 경제장관이 스위스의 암호화폐 규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장원석 기자)

 
암호화폐는 잠재력만큼 투기 우려도 작지 않다. 규제 측면에서 스위스의 선택은 주요국과 좀 다른 것 같다.
“우려는 당연하다. 약간의 오해가 있는데 스위스는 투기를 용인하고, 아무런 규제 없이 ICO를 허용하는 게 아니다. 아이를 키울 때 모래 상자(Sandbox)를 떠올려보자. 일정 크기에 모래 상자에 넣어두고 맘껏 놀게 하는 거다. 단 그 상자를 벗어나면 안 된다. 혁신적인 기술을 규제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땐 이런 식의 접근이 옳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해당 ICO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검증된 금융인이고, 그 목적이 크게 위험하지 않다면 일단 허가해준다. 프로젝트 규모도 일정 금액 이하면 그냥 따지지 않고 기회를 주는 거다.”
 
지난 2월 16일 스위스 연방금융감독청(FINMA)은 ICO에 관한 새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FINMA는 ICO를 준비하는 암호화폐가 지불형·기능형·자산형 세 가지 중 어디에 속하는지에 따라 규제를 달리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지불형은 지불 용도로 쓰는 경우, 기능형은 애플리케이션 등에서 각종 이용권이나 접근권 형태로 쓰이는 경우를 말한다. 
 
스위스 ICO 가이드라인, 샌드박스 규제가 핵심
 
자산형은 회사의 수익과 배당금 등을 직접 받을 수 있는 경우다. 이렇게 나눈 뒤 지불형은 현행 자금세탁규정, 자산형은 증권법을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기능형은 증권으로 취급하지 않되 자산형의 성격을 가진 경우엔 증권법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ICO 가이드라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적어도 법에 없으니 하지 말라고 단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잘 생각해보라. 블록체인이든 암호화폐든 지금 있는 법체계로는 다룰 수 없다. 정해진 답이나 틀이 없다면 경험적으로 접근하는 게 맞지 않나? 각각의 암호화폐가 어떤 기술을 바탕으로 움직이는지, 또 그 용도가 어떤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카테고리도 나누고, 어떤 것이 되고, 어떤 것이 안 되는지 시간을 두고 선별해가는 과정인 셈이다. 가이드라인은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만든 것으로 안다.”
  
실제로 스위스 정부는 가이드라인의 목적이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산업 진흥임을 분명히 했다. 마크 브랜슨 FINMA 회장은 “역동적인 암호화폐 시장 상황과 수요 확대를 고려할 때 투명성 확보가 중요하다”면서도 “암호화폐의 성격이 다양한 만큼 금융법이나 규제를 모든 ICO에 일괄 적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FINMA는 가이드라인에 “블록체인 기술의 잠재력을 인정하고 그들이 참여하는 워킹그룹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을 적시하기도 했다.
 
2월 23일 스위스 추크에 위치한 칸톤 추크 청사 집무실에서 만난 마티아스 미쉘 경제장관이 스위스의 암호화폐 규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장원석 기자)

2월 23일 스위스 추크에 위치한 칸톤 추크 청사 집무실에서 만난 마티아스 미쉘 경제장관이 스위스의 암호화폐 규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장원석 기자)

 
스위스는 전통적으로 금융의 강자였다. 암호화폐의 육성이 기존 금융 질서와의 결별로 비치기도 한다.
“스위스 시계는 오래전부터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디지털 시계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전통을 고집했다. 물론 지금도 일부 명품은 가치를 인정받지만, 진짜 큰 시장을 일본 등에 내줬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거다. 산업 측면에서 ‘시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다. 물론 암호화폐가 성장하면 은행 등 기존 금융 질서와 부딪히는 일이 생길 거다. 그러나 혁신은 언제나 주어진 토양 위에서 자라는 것이고, 나는 암호화폐가 기존 금융의 파괴자가 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추크뿐만 아니라 연방 정부도 암호화폐 육성과 ICO 유치에 적극적이다. 지난 1월 요한 슈나이더 암만 스위스 연방 재무장관은 “암호화폐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며 “스위스를 암호화폐 허브로 키우겠다”고 말했다. 20세기 스위스는 중립국 지위를 앞세운 ‘비밀 금고’로 금융 강국이 됐다. 그러나 ‘투명하지 않은 돈’을 규제하려는 각국의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최근 그 위상이 흔들리는 상황이다. 암호화폐를 새로운 동력 삼아 국가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장기 전략인 셈이다.
 
“공청회론 안돼. 비공식적 만남 늘려야”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가 젊은 세대의 도전과 혁신을 상징한다면 법체계를 만드는 건 기성세대다. 갈등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장관도 굳이 분류하자면 기성세대일 것 같은데.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다. 나이를 묻지 않아 줘서 고맙다.(웃음) 나는 이 신기술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는 편이지만 당연히 현장 기술진보다 뛰어나진 않을 거다. 어쩔 수 없이 정치인이나 리더가 새로움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나? 공부하려면 만나야 한다. 그런데 공청회 같은 형식적인 만남은 한계가 있다. 제대로 공부하려면 따로따로, 수시로 만나야 한다. 크립토밸리 업무를 하면서 관련 업계 사람들과 비공식적인 점심을 자주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을 받고 있다. 물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걸 듣는 기회도 된다. 암호화폐를 둘러싼 기술 변화는 매우 다이내믹하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움직여야 한다.”
 
스위스나 독일 등은 꼼꼼한 서류 작업과 복잡한 절차로 유명하다. 블록체인 육성과 그런 행정 관행이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좋은 지적이다. 그러나 꼼꼼하게 할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나눠서 접근한다. 예컨대 스타트업이 추크에서 창업 등록을 하는데 48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인 법률 자문 등은 칸톤에서 직접 지원하고 절차를 최대한 간소화한 결과다. 물론 더 빨라져야 한다. 행정도 바꿀 부분이 여전히 많다. ‘빠르고, 간단하다고 덜 안전한 게 아니다’라는 게 블록체인의 또 다른 의미 아니던가?”
 
추크의 법인세율은 8.6~14%로 스위스 26개 칸톤 중 가장 낮다. (자료:KPMG, 2016년 기준)

추크의 법인세율은 8.6~14%로 스위스 26개 칸톤 중 가장 낮다. (자료:KPMG, 2016년 기준)

 
스위스는 세계적인 금융 허브인 동시에 탄탄한 기업 네트워크를 보유한 나라다. 법질서가 유연하고, 청렴도 또한 매우 높다. 케빈 랠리 크립토밸리협회(CVA) 수석 매니저는 “스위스는 또 다른 강점은 중립적이고, 예측 가능한 정치 체제”라며 “이런 분권화된 상향식 정치 문화는 블록체인 기술과도 닮았는데 추크는 이런 장점을 극대화한 곳”이라고 말했다. CVA는 스위스에서 ICO를 추진하는 업체들에 정보를 제공하고 컨설팅을 해주는 기관이다.
 
인구12만4000명 추크…주민 국적 131개에 달해
 
추크 칸톤 전체 인구는 12만4000명이다. 그런데 기업 수는 3만2000개나 된다. 큰 글로벌 기업도 있지만 젊고 도전적인 기업이 많다. 추크 지역 거주자의 국적이 무려 131개국에 달할 정도로 다양한 것도 특이한 점이다. 케빈 랠리 수석매니저는 “CVA만 해도 총 5명인 이사회 멤버 중 스위스 국적자는 단 1명뿐이고, 5명은 모두 국적이 다르다”며 “이런 글로벌 인프라를 가진 곳은 흔치 않다”고 말했다.  
 
크립토밸리가 이름처럼 실리콘밸리처럼 성장할까?
“불과 7~8년 전까지만 해도 블록체인이고, 암호화폐고 대부분 몰랐다. 예전엔 10년을 준비해 100년 갈 산업을 키웠지만, 지금은 아니다. 크립토밸리 역시 앞으로 어떻게 될 진 나도 알 수 없다.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기반을 닦는 게 미래 예측보다 중요하다.”
 
 추크 ICT 클러스터 전경. (사진=주크 칸톤 제공)

추크 ICT 클러스터 전경. (사진=주크 칸톤 제공)

 
한국도 지금 고민이 많다.  
“개발자를 지원하고 그들이 맘껏 뛰놀도록 해야 한다. 한국은 기술적으로 우수한 나라다. 정부가 방향만 잘 잡아주면 될 것 같다. 다만 돈으로 하는 건 큰 효과가 없을 거다. 예를 들어 프랑스가 최근 수십억 유로를 투자해 신기술을 육성한다고 발표했는데 나는 정말 그 돈이 어디에 쓰일지 의문이다. 급할수록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야 한다. 예를 들어 스타트업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오면 그들을 상대하는 건 결국 공무원이다. 그런데 그들이 신기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정말 좋은 아이템이 사장될 수 있다. 이런 게 국가적 손실 아닌가? 이런 일이 없게 하는 게 투자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핵심은 교육이다.”
 
추크=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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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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