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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속으로] 나라 위해 죽어간 아들들 외면 … 8년간 쌓인 울분 터져 나온 것

김영철 방남에 분노한 천안함 유가족들
1일 오전 대전국립현충원 천안함 묘역을 방문해 헌화대를 쓰다듬는 권은옥씨(오른쪽)와 이성우 천안함 유족회 회장. [프리랜서 김성태]

1일 오전 대전국립현충원 천안함 묘역을 방문해 헌화대를 쓰다듬는 권은옥씨(오른쪽)와 이성우 천안함 유족회 회장. [프리랜서 김성태]

김영철.
 
이 이름 ‘세 글자’가 천안함 유족의 상처를 다시 후벼팠다. 천안함 피폭의 배후로 알려진 김영철 북한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평창 겨울올림픽 폐막식에 참가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부터였다. 유족 40여 명이 김영철 부위원장의 방남을 앞두고 지난달 24일 전국 각지에서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왔다. 광화문 광장과 통일대교, 청와대 앞을 오가며 집회를 벌였지만 김 부위원장의 방남을 막을 순 없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대부분이 “좀처럼 마음을 잡을 수 없다”고 했다.
 
태극기가 전국에서 나부낀 3.1운동 99주년인 1일 오전. 천안함 유족 중 일부는 대전국립현충원의 천안함 묘역을 찾았다. 김 부위원장의 방남을 막아서지 못해 아들과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이성우(57) 천안함 유족회 회장은 아들의 묘역을 어루만지며 한참을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회장은 “우리 유가족들이 천안함 사고 이후 모여서 집회나 시위를 한 것은 지난주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김 부위원장의 방남 소식에 유족들의 상심이 컸다는 이야기다. 집회나 시위를 해본 적이 없다는 이 회장을 말처럼 집회에는 쩌렁쩌렁 울리는 스피커나 굉음을 내는 악기는 등장하지 않았다. 앞줄에 선 이들의 손에 들린 ‘김영철 방남 반대’ 피켓과 이 회장의 확성기 한 대가 도구의 전부였다.
 
이 회장은 천안함 사건으로 아들 고(故) 이상희 하사를 떠나보냈다. 이 하사는 폭침 이후 23번째로 물에서 뭍으로 나왔다. 이 회장은 “행운”이라고 말했다. 사건 당시 천안함 수색에 참여하려다 침몰한 ‘98금양호’가 사고로 침몰하며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오자 유족들은 ‘더는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 천안함 전사자 수색 대신 인양으로 의견을 틀었다. 이 회장은 “끝까지 수색해달라고 주장했으면 지금보다 전사자의 시신을 더 찾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하사의 묘비 바로 아래쪽에는 끝내 시신을 찾지 못해 산화자가 된 고(故) 강태민 상병의 묘가 있었다.
 
이날 이 회장과 함께 묘역을 찾은 이 하사의 어머니 권은옥(54)씨는 아들을 다시 만났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권씨는 “시신을 못 찾았을 때는 아들이 물속에서 고통스럽게 떠난 것은 아닐까 죽을 것처럼 힘들었는데, 막상 시신을 찾으니까 그렇게 좋더라”라고 말했다. 이 하사는 천안함에서 조리병으로 복무했다. 시신은 선체 후미 샤워장에서 발견됐다. 이 하사 주검의 머리에 큰 상처가 나 있는 것을 보고 권씨는 “머리 상처를 보니 물속이 아니라 충격으로 목숨을 잃은 것 같았다. 그나마 고통이 덜했을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며 눈물을 쏟았다.
 
아버지 고(故) 김경수 상사의 묘에 참배하는 김주석군, 김다예양, 윤미연씨(왼쪽부터). [프리랜서 김성태]

아버지 고(故) 김경수 상사의 묘에 참배하는 김주석군, 김다예양, 윤미연씨(왼쪽부터). [프리랜서 김성태]

당시 사건으로 장병 46명이 목숨을 잃었다. 6명은 강 상병처럼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이들이다. 주검으로 가족 곁으로 돌아온 전사자 40명의 시신은 화장됐다. 이들의 유해는 사건이 발생하고 25일째 되던 2010년 4월 30일 현충원에 안장됐다. 사건이 발생한 날인 3월 26일이 되면 유가족은 매년 묘역을 방문해 먼저 떠나보낸 가족과 만난다.
 
“저번 주에 집회를 끝내고 집에 와보니 올림픽 폐막식이 진행 중이더군요. 그걸 지켜보다가 김영철이 화면에 나와서 보다가 말았어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도 그랬을 거예요. 감정이 얼마나 복받치던지…”
 
다시 김 부위원장 이야기에 이 회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난달 25일 북한 고위급 대표단과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 방남한 김 부위원장은 같은 날 강원도 평창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폐막식에 참석했다. 그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때까지 일정 대부분을 숙소인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에서 해결했다. 방남 이틀째인 지난 26일에는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비공개 만찬을 갖기도 했다.
 
이 회장은 “우리는 북한과 대화를 하려는 정부를 탓하려던 게 아니다. 북한과 화해하는 것, 평화통일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냐”면서 “그저 우리는 천안함 폭침 주범으로 알려진 김영철이 이 땅에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모였던 것”이라고 말했다.
 
천안함 46용사 유족회, 천안함 예비역 전우회 회원들이 지난달 24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 방남 규탄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천안함 46용사 유족회, 천안함 예비역 전우회 회원들이 지난달 24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 방남 규탄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김 부위원장 방남에 대한 천안함 유족회의 감정은 분노보다는 서운함이 더 컸다. 정부가 천안함 유족들에게 미리 알리거나 양해를 구하지 않았다는 섭섭함이다. 이 회장은 “우리가 정부에 손톱만큼이라도 무언가 요구한 것이 있다면 지난주 같은 집회도 안 했을 것”이라며 “우리 아이들이 나라를 위해 희생하며 죽어갔는데 왜 우리를 몰라주는지 안타깝다”고 말했다.
 
청와대 앞 집회에서도 이런 섭섭함에 일부 유족은 청와대 진입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작은 충돌도 발생했다. 당시 윤미연(40·여)씨가 가장 앞에 섰다. 윤씨는 천안함 폭침으로 남편 고(故) 김경수 상사를 떠나보냈다.
 
윤씨도 1일 오전 현충원을 찾았다. 김 상사가 남기고 떠난 다예(17)양, 주석(15)군도 함께였다. 사건 당시 9살, 7살이던 남매는 어느덧 중고생으로 성장했다. 윤씨는 집회 둘째 날 청와대 정문 쪽으로 가려고 시도한 것에 대해 “집회 첫날도 참을 만큼 참았는데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밤을 새워서라도 대통령으로부터 김영철 방남에 대한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와대 앞에 또 찾아갔지만, 전날과 똑같이 대통령은 우리에게 조금의 시간도 내주지 않았다는 것에 너무 화가 났다”고 말했다.
 
17일 현충원에서는 천안함 용사 추모 걷기대회가 열린다. 23일은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태, 제2연평해전을 추모하는 ‘서해수호의 날’이다. 26일은 천안함 희생자들의 기일이다. 3월은 유족들에게 가족을 기리는 특별한 달인 셈이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의 기억 속에서는 점점 잊혀가진 않을까.’ 유족들은 그게 두렵고 서운하다.
 
권씨는 “남편이 직장에서 동료로부터 ‘천안함 사건 북한이 일으킨 것 맞아?’라는 얘기를 듣고 만취해서 들어온 적이 있다”며 “그래서 가까운 이웃들에게도 자식을 천안함 사건으로 잃었다는 얘기를 못 한다. ‘근무태만’이니 ‘경계실패’니 하는 인터넷 기사의 댓글도 차마 볼 수가 없다”고 말하며 흐느꼈다.
 
일상으로 돌아간 유족 몇몇은 자신들의 시위를 이렇게 회고했다.
 
“김영철의 방남은 촉발제가 됐을 뿐 지난 8년 동안 쌓여있던 감정이 터진 것 같다. 천안함을 부정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섭섭함이었던 것 같다.”
 
[S BOX] 천안함 이어 연평도 포격 … 김영철, 대남 도발 기획·주도
김영철. [뉴스1]

김영철. [뉴스1]

김영철(사진) 북한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은 천안함 폭침의 배후로 지목됐었다.
 
천안함 폭침(2010년 3월) 당시 그의 지위는 대남 공작활동을 책임지는 정찰총국장으로 2009년 이 자리에 올랐다. 천안함 폭침 외에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암살 지시, 연평도 포격 등 대남 도발을 기획하고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 민·군합동조사단과 국제조사단 공식 보고서는 천안함의 침몰에 대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조사 활동을 실시하여 천안함이 북한의 소형 잠수함정에서 발사된 어뢰에 의해 침몰됐다”고 결론냈다.
 
침몰 해역 인근에서 쌍끌이 어선의 그물로 수거한 어뢰의 부품을 분석한 결과 정찰총국 소속의 소형 잠수정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된 것이다. 김 부위원장이 배후로 지목된 배경이다.
 
김 부위원장은 북한 군부 내에서도 호전성이 강한 강경파로 분류된다. 2016년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뒤를 이어받았다. 남북 회담에만 30년 넘게 참여해온 대남통이기도 하다. 1989년 남북 고위당국자회담 예비접촉 때 북측 대표를 맡았다. 이후에도 각종 남북 군사회담에 관여해왔다.
 
국립대전현충원=오원석 기자 oh.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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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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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