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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법

백성호 기자 사진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담당차장
 
 
중국 당나라 때 남전이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남전은 훗날 ‘무심선(無心禪)’으로 이름난 선사가 되었습니다. 불자들은 다들 ‘무심(無心)’을 동경합니다. 그런데 ‘무심’이 과연 뭘까요.  
 
 
어떤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텅 빈 마음”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어떠한 잡념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오히려 더 헛갈립니다. 도대체 남전 선사가 말한 ‘무심’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마침 큼직한 힌트를 주는 선문답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잠깐 살펴볼까요?
 
가을 무렵이나 되었을까요. 하루는 남전 선사가 동료 스님과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당에 참새떼가 내려와 앉았습니다. 참새는 계속 부리로 땅을 쪼아댔습니다. 요리조리 움직이며 콕, 콕, 콕 바닥을 쪼았습니다. 뭔가 먹을 걸 찾느라고 그랬겠죠. 그걸 바라보던 동료 스님이 말했습니다.  
 
“아니, 어째서 참새는 저렇게 바쁜 겁니까?”  
 
 
그 말을 들은 남전 선사의 반응이 참 뜻밖이었습니다. 남전은 갑자기 자신의 신발을 훌러덩 벗었습니다. 그걸 들고서 땅바닥을 ‘탁! 탁! 탁!’ 세게 내리쳤습니다. 소리가 크게 울렸습니다. 동료 스님이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스님, 왜 신발을 벗어서 땅바닥을 때리십니까?”
 
이 말을 듣고서 남전 선사가 답했습니다.  
 
“바쁜 참새를 쫓으려고 그런다네.”
 
 
이야기는 여기가 끝입니다. 나머지는 우리들 각자의 몫입니다. 눈을 감고 당시의 광경을 그려봅니다. 동료 스님의 황당해 하는 표정이 눈앞에 선합니다. “참새가 바쁘다”는 말을 듣고 남전 선사는 왜 신발을 벗었을까요. ‘바쁜 참새를 쫓으려고 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선가(禪家)에 내려오는 선문답 일화는 언뜻 들으면 수수께끼 덩어리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커다란 물음표입니다. 그런데 깊이 들여다보면 다릅니다. 깨달음의 열쇠를 품고 있으니까요. 남전 선사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런 행동과 말을 할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선사들이 남긴 선문답 일화는 우리에게 물음이 일어나게 합니다. 저는 거기가 선(禪)의 출발선이라 봅니다. 내 안에서 자연스레 올라오는 물음을 좇으며 ‘남전의 깨침’을 찾아가는 마음여행의 출발선입니다.  
 
 
그럼 ‘남전의 일화’ 속으로 여행을 떠나볼까요. 동료 스님은 “참새가 바쁘다”고 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참새가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바닥을 쪼아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날 두 스님이 만났던 참새만 그런 게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참새가 늘 그렇게 움직입니다. 그러니 참새에게는 ‘바쁜 행동’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그럼 왜 동료 스님은 ‘참새가 바삐 움직인다’고 했을까?” 이게 바로 화두(話頭)입니다. 수수께끼로 똘똘 뭉친 선문답을 풀어낼 첫 열쇠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눈을 감은 채 이 물음을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던지는 겁니다. 마치 깊은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던지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물음을 던지고 골똘히 생각하면 되지요. 그게 바로 ‘궁리(窮理)’입니다. 사물의 이치를 깊이 참구(參究)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내 안에서 답이 올라옵니다. “참새가 정말 바쁜 걸까. 아니야. 참새에게는 ‘바쁘다, 바쁘지 않다’는 생각도 없을 텐데.” 답이 올라오면, 그 답을 물고 다시 물음을 던지면 됩니다. “그럼 동료 스님은 왜 참새가 바쁘다고 했을까? 그의 눈에는 왜 바쁘게만 보였을까?” 물음과 답, 물음과 답을 반복하며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아하!”하는 탄성이 터집니다.  
 
 
“그렇구나! 참새가 바쁜 게 아니었구나! 참새를 바라보는 동료 스님의 마음이 바쁜 것이었구나.” 처음에는 금방 탄성이 터지진 않습니다. 그렇지만 궁리를 계속 하다 보면 어느덧 자신의 무릎을 치게 됩니다. 이 과정을 거듭하면 어떻게 될까요. ‘마음의 근육’이 생깁니다. 생각하는 근육, 궁리하는 근육이 생깁니다. 이 근육이 커질수록 우리의 안목이 더 깊고 넓어집니다. 삶에서 마주치는 온갖 문제들을 근육의 힘으로 지혜롭게 헤쳐가게 되지요.  
 
 
 
아직 물음은 남아 있습니다. “그럼 남전 선사는 왜 신발을 벗어서 땅바닥을 때렸을까요? 왜 그런 행동으로 참새를 쫓으려 했을까요?” 이 물음도 깊이 던져보세요. 그럼 답이 올라옵니다. 그렇습니다. 남전 선사가 쫓으려 했던 참새는 짹짹거리며 땅바닥을 오가는 눈앞의 참새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동료 스님의 마음 속에 있는 ‘참새’였습니다. 바쁘지 않은 참새를 바쁜 참새로 보는 동료 스님의 ‘바쁜 마음’이었습니다. 남전 선사는 바로 그 마음을 쫓아버리기 위해 신발을 벗어서 땅바닥에 두드린 겁니다.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이지요.  
 
 
그럼 ‘바쁜 참새’는 선문답 일화에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 우리의 일상에도 ‘바쁜 참새’는 종종 나타납니다. 가령 숟가락을 쥐고서 자신의 힘으로 밥을 떠서 먹으려는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밥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던 아이는 자꾸만 밥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맙니다. 아직 익숙치 않은 거지요. 처음에는 가만히 지켜보던 엄마도 시간이 지나면 달라집니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속이 터집니다. 답답하고 갑갑해서 참지를 못하지요. 결국 아이의 숟가락을 뺏어서 직접 밥을 떠다 먹입니다.  
 
 
여기에도 ‘바쁜 참새’가 있습니다. 어디에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실수 없이, 정확하게, 그리고 빠르게 밥을 먹어야 한다는 엄마의 마음이 ‘바쁜 참새’입니다. 왜냐고요? 아이는 자신의 손으로 밥을 먹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습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밥을 먹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니 아이는 ‘바쁜 참새’가 아닙니다. 대신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바쁜 마음이야말로 ‘바쁜 참새’입니다.  
 
 
남전 선사는 우리에게 “이걸 알아차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발을 훌러덩 벗어서 땅바닥을 내려칩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바쁜 참새’를 쫓아내려고 말입니다. 만약 참새를 쫓아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아니까요. 아이는 기회를 잃고 말지요. 자신의 힘으로 숟가락을 잡으며 근육을 스스로 키울 기회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런 아이는 커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몸의 근육뿐만 아니라 마음의 근육도 약하기 때문이지요.  
 
 
불가(佛家)에 내려오는 온갖 선문답이 다 ‘수수께끼’인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물음을 던져서, 스스로 숟가락을 들게 하려는 겁니다. “이게 뭘까?”라고 골똘히 생각하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물음을 던지며 숟가락을 들다보면 어느새 강해져 있는 내 마음의 근육을 보게 됩니다. 생각하는 근육, 궁리의 근육입니다. 이런 근육을 키우고 키워서 나중에는 “나는 누구인가”“내 마음의 주인공은 무엇인가”라는 궁극적 화두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 화두를 뚫는 힘도 결국 궁리의 근육에서 나옵니다.  
 
 
그러니 선가의 화두는 공안집에만 있는 게 아니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바쁜 참새’가 보일 때마다 화두가 하나씩 생겨나는 겁니다. 남전 선사는 말합니다. 그런 화두가 올라올 때마다 ‘내 안의 바쁜 참새’를 잡으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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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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