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마음읽기] 의리는 의미를 이길 수 없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가신’, ‘최측근’, ‘집사’의 증언 혹은 배신으로 불법과 편법의 과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로선 알 길 없지만, 최근에 일어난 드라마 같은 일들은 사람의 본성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하게 한다. ‘과연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왜 최측근에서 보좌하던 사람들이 진술을 번복하고, 분신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했을까?’ ‘제 한 몸 지키기 위한 방어 수단일까, 아니면 그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용인술의 실패일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사람’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의리’에 대한 ‘의미’의 승리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의리와 의미는 인간을 움직이는 두 개의 큰 힘이다. 의리는 집단과 관계를 중시하는 우리 문화를 지탱해온 큰 기둥이었다. 연고주의라는 극심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의리는 죽음까지도 불사하게 하는 힘을 발휘해왔다. 의리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낙인인지를 우리는 뼛속 깊이 알고 있다. 의리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힘이라면, 의미는 철저히 개인의 내적 사유에서 비롯되는 힘이다. 의리가 자기가 속한 집단의 논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라면, 의미는 삶의 목적과 자기 정체성에 기초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다.
 
우리는 의리가 지배하던 삶을 살아왔다. 불의는 의리라는 이름으로 은폐되고 미화되어왔다. 그럴수록 삶의 의미를 지향하는 개인의 위대한 본성은 약화하고, 우리의 내적 고통은 커져만 갔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이 똑똑하게 증언하듯이, 결국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의리가 아니라 의미이다.
 
키맨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인터뷰 때마다 자식들을 언급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과 의지의 표출이다. 자녀에게 부모란, 어떤 편법과 불의를 써서라도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더 이상 아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이 원칙 있고 품위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생존의 문제가 더 이상 절실하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삶의 나침반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것이 부모가 나이 들면서 스스로에게 부여한 새로운 의미이다. 자식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이 물질이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임을 깨달은 것이다.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인간은 의미에의 의지가 충만한 존재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인 빅터 프랭클이 2차 세계대전 중에 죽음의 수용소에서 깨달은 것도 이것이었다. 삶에 대한 희망이라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그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을 인간답게 행동하도록 한 결정적 힘은 다름 아닌 ‘삶의 의미’였다.
 
의미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천천히 발견되는 것이 의미이다. 의미는 즐거움과는 달리, 즉각적으로 우리를 움직이는 힘은 약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큰 힘을 발휘한다. 자녀가 태어나면서, 삶의 다양한 굴곡을 경험하면서, 그리고 결국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의미는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불의가 다 드러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의리 때문에 침묵하고 방조하던 사람들이, 시간이 만들어내는 의미를 등에 업고 마침내 진실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의미를 향한 인간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실험이 있다.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가 한 실험인데, 이 실험에서 그는 참가자들에게 알파벳이 가득한 종이에서 특정 알파벳을 찾아 체크하는 과제를 주었다. 마친 종이를 제출하면 다시 다른 종이를 제공했다. 참가자들은 자신이 완수한 만큼 돈을 받을 수 있었다. 한 조건에서는 종이에 참가자 자신의 이름을 적게 했고, 또 다른 조건에서는 이름을 적게 하지 않고, 종이를 제출하자마자 파쇄기에 종이를 넣어버렸다. 참가자들은 원할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할 수 있었고,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었다. 과연 참가자들은 어느 조건에서 더 많은 과제를 수행했을까?
 
돈의 관점에서 보자면 후자가 훨씬 유리하다. 적당히 하고 제출해도 들킬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자신의 이름을 적도록 한 조건에서 더 많은 과제를 해냈다. 자신의 이름을 적는 것은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비록 대충대충 하고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조건이 있었지만, 그 조건의 참가자들은 부서지는 종이를 보면서 그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런 존재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자신의 이름이 남겨지는 상황에서 의미를 지키는 행위는 그래서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니 의미 없는 불의를 의리라는 도구를 믿고 저지른다면, 큰 실수이다. 보이지 않는 의미가 보이는 의리를 이긴다. 인간의 위대함은 불의를 의리로 둔갑시키는 데 있지 않고, 비록 늦었을망정 의미가 결여된 의리를 깨는 데 있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오영환 부소장 : oh.younghwan@joongang.co.kr (02-751-5515)
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