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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김정은의 ‘남매 정치’ … 붉은 올리브 가지로 평창을 흔들다

김여정의 2박3일 체류에 대한민국이 휘청였다. 청와대의 육중한 문이 활짝 열렸고 대통령과 국무총리, 장차관과 핵심 인사가 장사진을 이뤘다. 그녀가 들고 온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친서 한장에 ‘평양 정상회담’의 꿈이 영글 기세다. 남북관계의 상전벽해(桑田碧海)다. 절대 권력자인 오빠의 후광을 업은 김여정의 대남 깜짝 이벤트는 속편을 예고한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평양에서 빨리 뵀으면 한다”며 재회를 예견한 때문이다. 평창 겨울올림픽에 붉은 올리브 가지를 던진 김정은의 ‘남매 정치’ 노림수와 한계는 무엇일까.
 

7년 전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식장에서 눈물짓던 그녀가 아니었다. 세습 권력의 후계자로 등극한 오빠를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던 모습도 찾기 어렵다.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자 중앙당 제1부부장으로 우뚝 선 김여정. 그녀는 북한 정권의 핵심이자 김정은의 최측근 보좌관으로 자리했음을 ‘남조선 행차’로 과시했다. ‘믿을 건 핏줄뿐’이란 남매의 의기투합 결과물이다.
 
예고편은 몇 차례 있었다. 김정일 사망 이듬해인 2012년 11월 북한 관영 조선중앙TV엔 말을 탄 모습의 김정은이 등장했다. 여기에는 고모 김경희와 함께 김여정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무 설명이 없었지만 메시지는 분명했다. 김정일 시기 여동생 김경희가 국제부와 경공업부 등을 거치며 오빠의 당 사업을 보좌했듯이, 김정은 시대엔 김여정 차례라는 시사였다. 그녀가 탄 백마(白馬)는 이른바 ‘백두혈통’이라 선전되는 김씨 일가 세습통치의 직계를 상징했다. 대북첩보망에도 징후가 감지됐다. 김정은이 여정과 친형 정철(건강 문제로 후계에서 밀려남)이 참석하는 정기적 모임을 통해 통치 노선과 노동당과 군부 핵심 인선 등을 숙의한다는 휴민트(humint, 인적 채널을 통해 수집한 정보)였다.
 
권력의 풍향계를 읽는 데 동물적 감각을 지닌 고위 권력층 사이엔 금세 입소문이 번졌다. “모든 길은 여정 동지로 통한다”는 건 그녀를 거치지 않고는 되는 일이 없다는 얘기였다. 적어도 평양에선 김여정이 ‘로마로 통하는 길’보다 더 확실한 줄이 됐다. 지난해 10월 김정은이 당 전원회의를 열어 김여정을 정치국에 진입시키자 판세는 굳어졌다. 70여년 노동당 역사에 최연소(당시 28세) 정치국 후보위원의 탄생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평창 올림픽이 개막한 지난 9일 대한민국에 온 김여정은 도도했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몸을 꼿꼿이 세운 채, 턱선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고개를 든 모습이었다. 이튿날 청와대 방문 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김정은의 ‘국가’ 직책)의 특명을 받고 왔음을 온몸으로 드러내려 했다. 현장 연출자는 김창선 전 국방위 서기실장이다. 김씨 정권의 노회한 집사인 그는 누구보다 의전에 통달한 인물이다. 북한이 ‘적구(敵區)’라고 부르는 서울에서 김여정이 어떤 처신을 해야 하고, 절대 해서는 안 될 사안을 감별해주는 수행원으로 온 것이다.
 
이런 김여정의 모습에서도 이상징후는 감지됐다. 인천국제공항을 들어서며 그녀는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밀착 카메라의 앵글에는 공항시설과 인파를 힐끗거리는 20대 방문객의 호기심이 고스란히 포착됐다.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장의 화려한 축제는 그녀의 마음을 더 흔들었을 수 있다. 하루 전 김일성광장 군사퍼레이드와의 극명한 대조다. 서울의 야경과 KTX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 등도 마찬가지다. “서울은 처음이지만 낯설지가 않다”는 그녀의 말은 ‘솔직히 많이 낯설다’는 고백으로 들린다.
 
김여정은 북한 정권이 마주한 냉혹한 현실도 절감했을 것이다. 유엔은 물론 한·미 등의 독자 제재까지 겹겹이 둘러쳐진 대북 압박망이 숨통을 죄고 있다. 그녀가 타고 온 낡은 구 소련제 일류신 여객기(IL-62M)는 제재문제를 두고 막판까지 설왕설래했다. 일행인 최휘 국가체육위원장은 물론 김여정 자신이 제재 리스트에 오른 상태다. 곳곳이 지뢰밭이고, 무엇 하나 자유로울 수 없는 형국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이어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2018 평창 겨울올림픽까지 치른 대한민국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는 북한을 떠올렸을 것이다. 88올림픽을 훼방 놓으려 대한항공기 폭파 테러를 벌이고, 월드컵 땐 서해 북방한계선(NLL) 도발을 자행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오버랩 됐을 공산도 크다. 집권 7년째 되도록 해외방문이나 정상외교 한 번 못한 오빠의 얼굴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여정 남매는 해외유학파란 점에서 한 때 기대를 모았다.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까지 체류한 이들이 김일성·김정일과 다른 전향적 통치를 할 것이란 측면에서다. 김정은 집권 첫해인 2012년 7월 모란봉악단(단장 현송월) 창단 공연에는 미 자본주의 상징인 미키 마우스와 백설공주 캐릭터가 선보였다. ‘이렇게 좋은 세상’이라 선전되던 문구는 ‘이렇게 좁은 세상’으로 바뀌었다. 청년 지도자 김정은이 뭔가 선대(先代) 지도자와 다른 개혁·개방의 길을 갈 것이란 관측이 쏟아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최종 선택은 달랐다. 더 격렬해진 핵과 미사일 도발로 한반도와 국제사회를 겁박했다. 폭압적 공포정치를 펼쳐 고모부 장성택 마저 무참히 처형했다.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과 달리 민생은 파탄 났다. 고위 탈북인사는 “북한 장마당에서 올겨울 비명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전한다. 대북제재로 물자공급이 어려워지자 물가가 폭등했고, 민심이반을 우려해 당국이 겨우 쌀값만 억지로 잡아놓고 있지만 앞으로는 장담할 수 없다는 귀띔이다.
 
‘남매 정치’를 본격화한 김정은 위원장과 김여정 제1부부장에게 당부할 말은 세상을 너무 우습게 보지 말라는 점이다. 순혈주의 세습정권 덕분에 절대권력으로 2500만 주민을 지배하지만 한 걸음만 밖으로 나와도 현실은 척박하다. 국제스포츠 무대인 ‘평창’은 그 압축판을 보여줬다. 김여정이 오빠에게 내놓을 ‘남조선 리포트’에는 그 실상이 가감 없이 담겨야 한다. 입에 담기 거북한 말까지 진솔하게 전할 유일한 인물이란 점에서다.
 
불과 몇 달 전 ‘핵 불바다’를 위협하며 “서울을 타고 앉으라”고 다그치던 김정은의 모습을 대한민국 국민과 국제사회는 기억한다. 청와대를 본뜬 시설을 평양 외곽에 지어놓고 “불바다로 만들 것”이라며 타격훈련을 벌이던 장면도 그렇다. 거기에 이번엔 여동생을 보내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꼭 일 년 전 오늘 이들 남매의 이복형제인 김정남씨는 북한 공작원에 의해 말레이시아 국제공항에서 암살당했다. 김정은의 지시 없이 불가능한 일인 데다, 김여정 또한 진상을 모를 리 없는 자리다. 이런 모든 걸 망각한 채 불쑥 ‘붉은 올리브 가지’를 던진다고 평화가 오는 건 아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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