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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앞에서 흑인 선수와 팔짱 끼고…‘2등’한 그들이 더 빛난 이유

트랙에 선 이 순간, 눈앞엔 오직 결승선뿐입니다.  
관중석의 어마어마한 함성도 들리지 않습니다. 제시 오언스(스테판 제임스)는 속으로 되뇝니다.
 
‘트랙에선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어.’
 
여기는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 아프리카계 미국인 제시는 온갖 차별과 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이곳에 섰습니다. 실존 인물이 주인공인 영화 ‘레이스’(2016)의 가슴 떨리는 장면이 펼쳐지려는 찰나입니다.  
 
영화로 국제뉴스를 보는 [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 세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영화 '레이스'의 한 장면.

영화 '레이스'의 한 장면.

9일 드디어 평창 동계올림픽의 문이 열렸습니다.  
 
세계적인 축제에 외국 언론들도 분주히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데요, 그중 워싱턴포스트(WP)의 한 보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평창에 오는 미국 선수단이 예전보다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긴 했지만, 여전히 아프리카계를 비롯한 비백인은 극소수란 분석이었죠. WP는 “미국 올림픽위원회(USOC)는 다양성ㆍ포용 책임자를 두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팀 내 다양성은 부족하다”고 평했습니다.  
 
물론 공정함이 생명인 스포츠에서 선수를 뽑는 기준은 실력입니다. 다만 인종 차별은 미국의 여전한 사회적 문제이기에, 혹여 정책과 절차에서 비백인이 소외되는 일이 없는지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는 거죠. USOC는 다양성ㆍ포용 위원회가 “USOC 내부 및 외부의 정책과 절차를 검토한다”고 설명합니다.
9일 강원도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개회식. 평창=김현민 기자

9일 강원도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개회식. 평창=김현민 기자

이런 노력에도 여전히 백인 위주인 것은 왜일까요. 
 
WP의 설명은 명료합니다. 동계 스포츠는 특정 지역에서만 가능한 데다 장비값이 만만치 않아 부모의 경제력과 지원 없이는 입문조차 힘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유한 백인 선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거죠.

이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동계올림픽에는 언제나 ‘부자 나라, 백인들의 잔치’라는 꼬리표가 붙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판이 꾸준히 나오는 건, 세계인의 축제가 되어야 할 올림픽에서 인종 차별의 아픈 역사가 꽤 길기 때문이죠.  
영화 '레이스'의 한 장면.

영화 '레이스'의 한 장면.

영화 ‘레이스’는 이 문제가 가장 심각히 대두했던 베를린 올림픽을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실제 사건을 알고 보시면 더 재미있습니다.)
 
당시 독일 총통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는 올림픽을 ‘아리아 인종의 우수성’을 알리고 나치를 선전하는 도구로 삼으려 했습니다. 독일 내에선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고, 비백인에 대한 차별이야 말할 것도 없었죠.  
 
그러자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선 보이콧 움직임이 일었습니다. 이들 국가 내에서도 차별은 심각했지만, 히틀러는 너무 노골적이고 위협적이었거든요. 결국 독일은, 우려하는 일은 없을 거라 약속한 후 예정대로 올림픽을 개최합니다. 그러나 대회 기간 내내 유대인과 비백인에 대한 차별은 계속됐죠.
 
이때 히틀러의 심기를 너무도 불편하게 만든 한 선수가 나타납니다.
 

네, 바로 제시였습니다.  

 
히틀러는 엄청난 규모로 지은 경기장에 흑인이 들어오는 것 자체가 싫었습니다. 그런데 눈엣가시인 제시가 육상 100m 경기에서 금메달을 땄으니 얼마나 속이 뒤틀렸을까요. 게다가 그의 메달 행진은 시작일 뿐이었고요.  
 
그런데 말이죠. 
이런 분위기를 세심히 담아낸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제시가 금메달을 따는 순간이 아닙니다.
 
제시는 이어 멀리뛰기 종목에도 출전했는데요.  
긴장한 탓인지 심판의 불공정함 때문인지 그는 예선에서 탈락 위기를 맞습니다.
  
기회가 단 한 번 남았을 때, 긴장한 제시에게 루츠 롱이란 독일 선수가 다가옵니다. 그리고 살며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팁을 주죠.   
영화 '레이스'의 한 장면. 극중 루츠 롱(왼쪽)과 제시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영화 '레이스'의 한 장면. 극중 루츠 롱(왼쪽)과 제시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덕분에 제시와 루츠는 결승에서 만납니다. 역시나 제시는 또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쟁취하죠. 
 
그런데 루츠의 다음 행동이 압권입니다.
  
자존심 왕창 구긴 히틀러가 뻔히 보고 있는 것을 알고도, 카메라가 모두 찍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제시와 팔짱을 끼고 달리며 수십만 관중에게 인사를 한 겁니다. 루츠 롱은 히틀러가 가장 기대했던 선수였는데 말이죠.
 
영화는 다루지 않지만, 루츠 롱은 이 일로 히틀러에게 단단히 찍혀 몇 년 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장으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30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죠. 
 
제시는 미국에서 ‘흑인의 희망’과 같은 존재가 됐지만, 유럽의 대스타였던 루츠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겁니다.  
 
올림픽 이후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와 우정을 주고받았던 제시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조국 내에서조차 지독히 차별받던 제시에게 진짜 우정을 보여준 친구였으니까요.  
생전 루츠 롱(왼쪽)과 제시 오언스의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생전 루츠 롱(왼쪽)과 제시 오언스의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전쟁 이후에도 인종 차별 문제는 여전했습니다.  
 
1968년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올림픽.  
 
육상 200m 결승에서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미국의 흑인 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칼로스는 시상대에서 검은색 장갑을 낀 채 주먹을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자국 내 극심한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의미였죠. 일명 ‘블랙 파워 설루트(Black Power salute)’였습니다.  
 
하지만 관중은 야유를 퍼부었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이들이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는 정치적 행위를 했다며 메달은 물론 선수 자격까지 박탈했습니다.
동료 흑인 선수들을 지지하고 있는 호주 선수 피터 노먼(왼쪽). [사진=위키피디아]

동료 흑인 선수들을 지지하고 있는 호주 선수 피터 노먼(왼쪽). [사진=위키피디아]

 
그런데 이 시상대에서 이들과 함께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호주 대표이자 백인인 피터 노먼이었죠.  
 
은메달리스트 노먼은 주먹을 들어 올리진 않았지만, 스미스와 칼로스를 지지한다는 의미로 ‘인권을 위한 올림픽 프로젝트(Olympic Project for Human Rights)’의 배지를 달았습니다. 
당시의 험악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웬만한 용기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죠.  
 
그는 이 일로, 역시 인종 차별이 심했던 호주에서 큰 비난을 받았고 최고의 실력에도 이후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었습니다. 철저히 외면당했죠. 평생 동안요.  
 
노먼의 정의로운 행동은 그가 2006년 세상을 떠난 후에야 조금씩 알려졌습니다. 그의 장례식에 스미스와 칼로스가 참석하기도 했고요. 노먼의 이런 이야기는 ‘설루트’(2008)라는 다큐멘터리로 나왔습니다.  
 
루츠 롱과 피터 노먼. 
이들이야말로 차별에 맞서 진정한 ‘올림픽 정신’을 실천한 스포츠맨이었던 겁니다.  
 
다큐멘터리 '설루트'의 한 장면. 국내에선 개봉하지 않았기에 확인할 수 없지만, 노먼의 장례식에 참여한 스미스와 칼로스로 추측된다.

다큐멘터리 '설루트'의 한 장면. 국내에선 개봉하지 않았기에 확인할 수 없지만, 노먼의 장례식에 참여한 스미스와 칼로스로 추측된다.

 
시대는 변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세계적인 스포츠 대회에서 인종 차별은 종종 문제가 되곤 하지만, 베를린과 멕시코시티에서의 상황과 같진 않죠.
  
 
그러나 워싱턴포스트의 지적대로 상대적으로 빈곤한 비백인일수록 아예 겨울 스포츠에 접근조차 못 하는 경우가 많고, 이는 저개발 국가일수록 더 심하다는 점에서 특히 동계 올림픽에 대한 회의론은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의 인종 차별은 아닐지라도 ‘기회의 차별’은 있단 얘기죠.  
 
다시 평창으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7년 전 평창은, 동계올림픽의 ‘새로운 지평’(뉴 호라이즌)을 열 것이라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대로 겨울 스포츠를 접하기 힘든 아시아ㆍ아프리카 지역 청소년들을 강원도로 초청해 교육하는 ‘드림 프로그램’를 진행했죠.
 
이 프로그램으로 피겨와 인연을 맺은 선수가 이번에 평창에서 꿈을 펼칩니다. 말레이시아의 줄리안 이가 그 주인공이죠. 또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에 데뷔하는 나라도 말레이시아ㆍ에콰도르ㆍ나이지리아 등 6개국이나 됩니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겨울 스포츠를 접하고 즐길 기회를 준다면 얼음과 눈이 없는 나라에서도, 가난한 사람이라 해도, 올림픽이란 축제를 함께 즐길 수 있을 거란 희망이 평창에서 돋아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강릉=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미국 첫 흑인 여자 스케이팅 선수인 마메 바이니가 2일 강원도 강릉의 2018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훈련장에서 훈련하고 있다.

(강릉=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미국 첫 흑인 여자 스케이팅 선수인 마메 바이니가 2일 강원도 강릉의 2018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훈련장에서 훈련하고 있다.

 
‘레이스’에서 결승전에 오른 루츠는, 자신이 실격하는 바람에 굳이 최종 시기에 뛰지 않아도 승리가 확정된 제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경기를 뛰어 줘.”
 
이 말을 평창에 온 모든 선수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 편견을 딛고 온 선수들에겐 더 힘차게요.  
 
“금메달이든 노메달이든 상관없어. 그저 멋지게 네 경기를 뛰어 줘.”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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