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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핵(核) 파는 처녀

지난 1월 21~22일 강릉과 서울을 방문했던 현송월 북한 삼지연관현악단 단장. [사진공동취재단]

지난 1월 21~22일 강릉과 서울을 방문했던 현송월 북한 삼지연관현악단 단장. [사진공동취재단]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송호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저 하늘에도 슬픔이’, 전쟁고아 이윤복의 일기에 남녘 동포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던 1960년대, 북녘 동포들은 아동극 ‘꽃파는 처녀’로 혁명의지를 다졌다. 정비석의 『자유부인』에 심기일전한 한량 남녀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르며 스텝을 사뿐히 밟을 때, 북한 주민들은 ‘천리마운동’에 등골이 휘었다. 새벽별 보며 나서는 북녘 동포들의 허기를 혁명가곡이 채웠다. 전사의 등을 떠미는 힘은 음악과 미술에서 나온다는 게 사회주의 예술론이다. 동북항일연군과 조선의용군은 가두연극과 집단가창으로 지친 심신을 달랬다. 행군하다 쉬는 곳이 즉석 무대다. 그 전통이 김일성 부자와 손자대로 이어져 소위 ‘음악정치’의 전술적 의미가 완성됐다.
 
선군정치의 백코러스인 음악정치 유전자를 건드린 것은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이다. 그는 음악 소양을 갖춘 김일성대학 청년들을 조직해 ‘택성악단’을 창단했다. 이 발랄하고 당돌한 음악밴드가 정치범수용소를 위문공연하자 김정일의 분노가 폭발했다. 장성택만 빼고 모조리 처형됐다. 전술에 능한 김정일은 악단을 거꾸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재능과 끼를 갖춘 젊은 미인들로 예술단을 만들고 북한 체제를 미화 선전하는 것. 왕재산경음악단, 보천보전자악단이 창단됐다. 당정 고위간부 연회 때 기쁨조로 활약하다가 나이가 차면 음악정치라는 명분하에 국가행사로 내몰렸다. 2009년에는 이설주, 현송월이 속한 은하수관현악단이 창단됐다.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의 영화주제가를 김정일이 작곡했다. 금성악단 소속 화영초대소 성악배우가 주제가 ‘꽃 사시오’를 정말 눈물지게 불렀다. 북한의 내로라하는 작곡가들이 황금예술의 극치라고 김정일을 치켜세웠다. 한층 고무된 김정일은 북한 음악계의 거장이자 ‘당의 참된 딸’을 작곡한 이찬서에게 평을 부탁했다. 이찬서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심하네요. 이 노래는 미국 동요 ‘클레멘타인’의 명백한 표절입니다.” 그러고는 피아노 앞에 앉아 클레멘타인을 연주했다. 연회장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며칠 뒤, 이찬서와 가족은 평양에서 사라졌다(김평강, 『풍계리』).
 
송호근칼럼

송호근칼럼

아버지의 유전자가 작동했는지 김정은도 모란봉악단(2012년), 청봉악단(2015년)을 연달아 창단했다. ‘음악정치는 수만 t의 쌀, 수천 대의 탱크보다 더 위력적’이라는 아버지의 유훈을 떠올린 김정은이 세계의 겨울잔치인 평창올림픽을 그냥 스칠 리 없다. 아이스하키팀을 포함한 대표선수는 고작 40여 명에 불과한데 삼지연관현악단 140명, 응원단 230명, 태권도시범단 34명 해서 400여 명의 종합예술단을 선심 쓰듯 내려보내기로 했다. 근사한 말과 함께. “민족의 위상과 기상을 대내외에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며… 올림픽이 성과적으로 개최되기를 바란다.” 대화 창구를 고대하던 청와대가 자다가 벌떡 일어날 경사였다. 통일부를 필두로 ‘평양손님 모시기’가 극진하게 펼쳐졌다.
 
평양손님들은 어제도 왔고, 오늘도 온다. 혹시 눈발이라도 날리면 국정원은 우산을 받쳐들 것이고, 청와대는 평양 당국이 삐칠까 노심초사 온갖 수발을 다 들 것이다. 고인이 된 가수 백설희가 불렀던 ‘봄날은 간다’의 그 여인처럼 말이다.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서 ‘알뜰한 그 맹세’를 의심치 않는 여인. 알긴 알 것이다. 평양 당국이 글로벌 쇼무대에 젊은 예인(藝人)들의 끼를 한껏 살려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겠다는 속셈을. ‘꽃 파는 처녀’로 감정선을 자극해 핵놀이 기억을 지우겠다는 그 음악정치의 속 깊은 뜻을.
 
김정일 작사·작곡 주제가가 울려 퍼지는 무대 장면은 이렇다. ‘꽃 사시오 꽃 사시오 어여쁜 빨간 꽃/ 앓는 엄마 약 구하러 정성 담아 가꾼 꽃/ 꽃 사시오 꽃 사시오 이 꽃 저 꽃 빨간 꽃.’ 주연배우의 구성진 곡조가 심금을 울릴 때 배경화면에는 천리마운동과 미사일 발사 장면이 혁명의지를 고조시킨다. 이게 음악정치의 실체다.
 
평양은 한국 민요와 세계 명곡을 연주한다고 남한 당국을 미리 안심시켰다. 알뜰한 맹세대로, 아리랑을 부르고 베토벤의 교향악을 연주한다. 현송월이 남녘 남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세계인의 찬사를 받는다. 남북대화 창구가 열린다. 민족의 위상과 기상이 천정부지로 상승한다. 그랬으면 좋겠다. 진정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잊지 말 게 있다. 음악정치의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임을, 현송월의 앞모습은 ‘꽃 파는 처녀’이고, 뒷손엔 핵무기가 들려 있음을. 말하자면 ‘핵(核) 파는 처녀’다. ‘핵 사시오 핵 사시오 인민의 피로 빚은 어여쁜 핵’. 알긴 알 것인데 ‘오늘도 언 가슴 두드리며 실없는 그 기약’에 또 마음을 실어보는 남녘 정권에 님은 올까, 아니면 쌍코피 터질까. 봄날은 벌써 갔는데.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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