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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체가 생명을 구하고 운명을 가를 수 있을까?

김진평의 레터링. 시옷이 줄무늬 바지로 표현되어 가시성이 높다. 300쪽 책에서 ‘사슴’이건 ‘회사원’이건 모든 ‘사’가 이런 모양으로 생겼다면 읽기 피로해질 것이다. 그러면 가독성이 낮아진다.

김진평의 레터링. 시옷이 줄무늬 바지로 표현되어 가시성이 높다. 300쪽 책에서 ‘사슴’이건 ‘회사원’이건 모든 ‘사’가 이런 모양으로 생겼다면 읽기 피로해질 것이다. 그러면 가독성이 낮아진다.

인간의 눈은 글자를 ‘보기’도 하고 ‘읽기’도 한다. 보기 좋은 글자와 읽기 편한 글자가 항상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글자에는 가시성·판독성·가독성이라는 기능이 있다.
 
‘가시성’은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힘이다. 특정 단어나 짧은 문장의 글자체가 예쁘거나 독특하면 가시성이 높다. ‘판독성’은 글자들이 서로 잘 판별되는가의 문제다. 가령 ‘흥’과 ‘홍’이 혼란을 일으키면 판독성은 떨어진다. 한편, 긴 글을 읽을 때 인체가 피로감을 덜 느끼는 것을 ‘가독성’이 높다고 한다. 300쪽 분량의 책에서 ‘흥’과 ‘홍’이 뚜렷이 구분이 되지 않아도 편히 읽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다.
 
이렇듯 가시성·판독성·가독성은 기본적으로는 서로 연관이 있지만,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가시성이 단거리 경주라면, 가독성은 마라톤에 가깝다. 가시성이 ‘보기’의 영역이라면, 가독성은 ‘읽기’의 영역이다.
 
생명을 구하는 글자체
위는 한길체, 아래는 산돌고딕체로 표기된 도로 표지판. ‘정자’라는 위아래 글자를 비교해보면 두 글자체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위는 한길체, 아래는 산돌고딕체로 표기된 도로 표지판. ‘정자’라는 위아래 글자를 비교해보면 두 글자체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위아래 쌍 중 아래쪽 글자체들의 판독성이 더 높은 네 가지 원인 분석 (출처: MIT AgeLab)

위아래 쌍 중 아래쪽 글자체들의 판독성이 더 높은 네 가지 원인 분석 (출처: MIT AgeLab)

점 하나, 획 하나를 신속정확하게 판독하는 일이 생명을 구하고 운명을 가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이것이 ‘판독성’의 영역이다.
 
일상에서 판독성이 중요한 대표적인 예는 교통표지판이다. 교통표지판의 글자가 독특한 개성으로 시선을 자극하면 큰일난다. 또 교통표지판을 명상적으로 음미하며 독서하는 사람도 없다. 정확한 정보를 순식간에 전달하면 된다.
 
독일의 경우 독일국가표준위원회 회장이었던 지멘스의 공학자가 총책임을 맡아 개발한 교통표지판의 글자체가 딘(DIN)체였다. 독일의 대표적인 글자체였다가, 높은 기능성으로 이후에는 디자이너들을 사로잡아 지속적으로 다듬어지고 용처가 넓어지면서 지금은 세계적으로도 널리 쓰인다.
 
한국에는 ‘한길체’가 있다. 2008년 당시 국토해양부 도로운영과의 의뢰로 디자인됐다. 기존 표지판에는 산돌고딕체가 쓰였다. 산돌고딕체는 글자의 획수가 많든 적든 모든 글자가 같은 크기의 네모틀 안에 들어간다. 이에 비해, 한길체는 받침이 있을 때 세로 길이가 길어지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것을 탈네모틀이라고 한다. 탈네모틀에서는 획수가 많은 글자에서 뭉침이 덜하고 글자별로 외곽의 형태에 더 차이가 생겨, 눈의 판독성이 향상된다.
 
한편,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에이지랩(MIT AgeLab)의 과학자들은 모노타입의 폰트 디자인 전문가들과 협업해서 자동차 대시보드용 폰트의 판독 시간을 연구한 바 있다. ‘그림 2’에서 아래쪽 폰트를 판독하는 시간은 위쪽보다 0.5초 정도 단축된다. 0.5초를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 고속도로에서 100km/h 속도로 주행할 때 0.5초면 약 14m의 거리를 간다. 그러니 0.5초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를 수 있는 유의미한 시간 차이다.
 
운명을 가르는 글자체
판결서체와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여러 명조체들의 ‘흥’과 ‘홍’ 판독성 비교

판결서체와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여러 명조체들의 ‘흥’과 ‘홍’ 판독성 비교

법관들에게도 판독성은 중요하다. 판사들이 판결문을 쓰는 한글 소프트웨어에만 지원되는 폰트가 있다. ‘판결서체’라고 한다.
 
비슷하게 생긴 ‘흥’과 ‘홍’이 잘 판별되지 않아 고유명사가 잘못 표기되었다고 하자. 그 판결문은 무효가 된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점 하나 획 하나에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운명이 크게 달라진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고자, 2004년부터 2년에 걸쳐 판독성을 높인 판결서체가 만들어졌다. 기존의 명조체보다 굵기를 견고하게 해서 각 글자들이 또렷이 보이도록 했고, 혼동하기 쉬운 글자들 간 판별력을 높였다. 가로획 중성 아래 받침 ㅇ의 꼭지를 떼는 등 여러 보완을 했다. 그렇게 폰트 전문가들이 한글은 4차, 로마자는 5차, 특수문자 역시 5차에 걸친 수정을 했고, 법 관계자들이 일일이 검수를 했다. 글자의 판독에 정확을 기함으로써, 정의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고 또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이었다.  
 
조선 내의원 의관들이 감수한 내의원자본  
허준의 『언해두창집요』 속 내의원자와 내의원한글자 (1608, 선조 41, 서울대학교 규장각 자료)

허준의 『언해두창집요』 속 내의원자와 내의원한글자 (1608, 선조 41, 서울대학교 규장각 자료)

조선의 내의원에서도 활자의 판독성을 위중히 여겼다. 의학서에서 획 하나가 잘못 표기되면 목숨이 왔다갔다 한다. 의관들은 긴장하며 꼼꼼한 교정을 봤다.
 
때는 1600년 전후, 7년간의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황폐하고 백성은 고달프던 시절이었다. 선조는 허준에게 명해서 의학서를 간행하도록 했다. 우선은 급한 불부터 꺼야했다. 백성들의 응급조치를 위한 『언해구급방』, 전쟁 후 창궐한 두창 치료를 위한 『언해두창집요』가 간행되었다. 두창은 마마 혹은 천연두를 뜻한다. 왕자였던 광해군도 두창을 앓았으니 왕실로서는 보통 근심이 아니었다.
 
산부인과 의학서인 『언해태산집요』도 간행되었다. 이상에서 ‘언해’는 한자를 한글로 옮겼다는 뜻이다. 한자를 깨치기 어려웠던 백성들과 부녀자들이 의료 혜택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특별히 이 의학서들을 한글로 보급한 것이었다.
 
전쟁 후의 고통 속에서도, 이렇게 책들의 복구와 간행에 힘을 쏟다니 조선은 과연 기록의 국가였다. 전쟁으로 인해 책을 인쇄하는 기관인 교서관은 삐거덕대었지만, 마침 훈련도감에 전쟁 후 유휴병력이 생겨나서 그 병사들에게 교서관의 인쇄 업무가 맡겨졌다. 인쇄 경험이 부족한 훈련도감 병사들의 솜씨는 거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책은 나왔다. 글자체나 인쇄 상태는 아쉬워도, 조선의 약재를 써서 조선 사람을 고치는 조선의 의학서들은 편찬되었다.
 
이후에 완성된 『동의보감』은 그 당시까지의 의학지식을 간결하게 집대성해냈다. 실로 백과사전적인 의학서였다. 허준이 저술하고 내의원 의관들이 교정을 본 활자체로 찍힌 이 의학서들을, 서지학자 천혜봉은 ‘내의원자본’으로 분류해서 불렀다. 이처럼 글자체 디자인이란 디자이너들만의 영역은 아니다.
 
‘가시성’의 영역에서는 디자이너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크다. ‘가독성’을 확보하려면 글자와 상호작용하는 인체와 기술 환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인간공학·인지심리학·컴퓨터공학 등 여러 분야의 연구와 협업이 요구된다.
 
‘판독성’으로 오면 과학자와 공학자, 법 관계자, 의학자들이 글자체에 적극 개입하기도 한다. 기술이 발달하고 사회가 변화하면 또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글자 디자인에 관여하며 자신의 분야에서 신속정확한 의미 전달을 도모하고자 할 것이다. 이렇게 각 영역에서 꼼꼼하게 검수하고 확인한 글자체들이 결국에는 우리의 생명과 운명에, 사회의 안전과 정의에 기여한다. ●
 
 
유지원 :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저술가·교육자·그래픽 디자이너. 전 세계 글자들, 그리고 글자의 형상 뒤로 아른거리는 사람과 자연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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