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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박물관과 젊은 역사책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지난 연말에 전남 장흥으로 강연을 다녀왔다. 대상은 고등학생들이었는데 지역 노인들의 ‘구술 생애사’를 집필하는 동아리의 학생들이었다. 노인들은 그 자체가 거대한 역사 콘텐츠를 담고 있는 박물관들이다. 유아에서부터 80~90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개인들은 얼마나 많은 사건을 통과하는가. 역사학, 심리학, 의학, 경제학, 철학, 문학 등 수많은 학문 분과에서 이야기하는 그 모든 콘텐츠가 개인의 삶 속에 축적되어 있다. 몸은 이처럼 다양한 시공간의 수많은 서사가 기록되는 장소이다. 긴 세월에 걸쳐 고통과 환희, 억압과 자유의 ‘전쟁’을 통과해온 생존으로 읽을 때, 늙은 몸은 경이로워 보인다. 수많은 고통과 환희가 기록되는 동안 마모될 때로 마모되어 이제는 거의 수명을 다한 기계로 읽을 때, 늙은 육체는 슬퍼 보인다.
 
구술 생애사를 집필하는 학생들은 아직 이런 무게와 깊이를 가진 박물관들은 아니다. 그들은 앞으로 기록될 여지를 더욱 많이 가지고 있는 역사책이며, 풍랑의 바다 앞에서 조심스레 조타키를 잡고 있는 젊은 선장들이다. 이들과 늙은 몸의 만남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젊은이들은 이미 먼 길을 지나온 노인들에게 그들이 지나온 숲과 계곡과 바다와 폭풍의 이야기를 듣는다. 노인들은 자신들의 오디세이아를 돌아다보며 새로운 지도를 그리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숲의 천사들과 악령들, 꿈과 함정들, 그리고 위기 가운데 숨겨져 있던 보물들을 이야기한다. 늙은 서사와 젊은 서사가 만나면서 생이란 결국 세대와 세대에 걸쳐 이어지는 긴 열차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이들은 깨닫는다. 그들은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열차 칸의 동승자들이며, 이 선로에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비극이 일어났고, 새로운 희망들이 생산되어왔는지 확인한다.
 
‘구술’은 이렇게 늙은 존재와 젊은 존재가 서로에게 스며드는 통로이다. 물음을 당한 자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질문을 던진 자는 화석 같았던 몸에서 살아 있는 역사를 읽는다. 구술을 통하여 이들은 역사가 길게 이어짐을 느낀다. 이들은 지나간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며, 늙은 몸의 에필로그가 젊은 몸의 프롤로그로 이어짐을 본다. 길 위에 선 젊은 몸은 그 길을 지나간 수많은 발자국을 본다. 그 길은 자신들이 만든 것이 아니며 먼저 지나간 자들의 고통과 희망의 발자국이 낸 것임을 알게 된다. 늙은 몸은 한때 자신들을 해쳤던 역사가 뒤에 오는 젊은 몸을 치유하는 것을 본다. ‘그날’이 저들을 통해 마침내 오기를 고대하며 아픈 길을 걸어온 자신들의 여행이 헛일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입시준비라는 ‘지옥’에서 어렵게 짬을 내서 이런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 학생들은 매우 진지했다. 그들은 구술을 통해 한 개인의 생애를 만날 뿐만 아니라, 그를 에워싸고 있는 지역의 역사와 한국 현대사를 읽게 된다. 개인을 중심으로 배춧잎처럼 퍼져있는 관계의 동심원들을 하나하나 헤쳐 나갈 때 그들은 존재의 관계성, 사회성, 그리고 역사성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연대의 소중함에 대해 알게 된다. 이런 교육은 세계에 대한 감성적·개념적 개입이 없이 세계 밖에서 그것에 관한 정보를 앵무새처럼 외우게 하는 교육과는 다른 것이다. 비록 방과 후 프로그램이었지만 이런 프로젝트야말로 ‘살아있는’ 교육이다.
 
문제는 이런 성격의 공부가 ‘주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적과 입시 때문에 이런 소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학생들은 늘 ‘외도’의 불안감을 겪어야 한다. 한가하게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죄책감에 시달려야 한다. 무한 경쟁 안에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강연을 나갔다가 이들에게 반가움, 대견함과 더불어 연민을 느낀 이유이다. 공부라는 것이 강요된 학습이 아니라 즐거운 발견의 과정이면 얼마나 좋을까. 공부가 인내해야 하는 과정이 아니라 삶에 대한 자발적 탐구라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그날’은 왜 이렇게 더디 올까.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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