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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평창 승부수' 속내는] 대화 공세로 포장한 화전 양면전술 가능성

은회색 계열의 양복 차림으로 2018년 신년사를 낭독하는 김정은.

은회색 계열의 양복 차림으로 2018년 신년사를 낭독하는 김정은.

핵과 ‘평창’ 카드를 내세운 김정은의 신년 승부수에 한반도 정세와 남북관계가 출렁이고 있다. 지난 1월 1일 신년사를 통해 “평창 겨울철 올림픽대회 대표단 파견” 용의를 밝힌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휘발성 높은 후속 조치를 잇따라 내놓은 것이다. 2016년 2월 이후 단절됐던 판문점 직통전화 채널이 즉각 복원되고, 북한의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를 위한 당국대화 테이블이 준비에 들어갔다. 일각에선 설 명절(2월 16일)을 계기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남북 당국 간 고위급 회담 가능성까지 점치는 등 과속 조짐까지 나타나고 있다. 얼어붙었던 남북관계에 대한 기대가 한껏 고조되고 있는 양상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북한의 전격적인 제안과 함께 문재인 정부의 적극적 호응이 뒷받침한 때문이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평창행을 직접 언급하고 이를 위한 남북 당국대화를 강조한 건 예상 밖의 일이다. 많은 대북 전문가는 북한이 지난 한 해 동안의 도발 드라이브에서 속도조절에 나설 것이란 새해 전망을 해왔다. 정부 당국도 조심스레 북한의 태도 변화를 점쳤다. 하지만 김정은이 평창 문제까지 직접 들고 나와 판세의 주도권을 쥐려 할 것이라고 예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김정은이 “민족의 위상을 과시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고, 대회가 성과적으로 개최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언급한 건 그래서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도발 드라이브에서 속도조절 관측
 
정부도 기다렸다는 듯 북한의 제안에 호응했다. 청와대는 김정은 신년사 발표 6시간 40분 만인 당일 오후 환영 입장을 냈다. 이어 1월 2일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북한 대표단의 평창 올림픽 파견과 남북 당국회담 뜻을 밝힌 것은 평창 올림픽을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의 획기적인 계기로 만들자는 우리의 제의에 호응한 것으로 평가하며 환영한다”고 밝혔다. 통일부 등에 대화의 조속한 복원과 후속 조치 등을 주문했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도 기자회견을 통해 “1월 9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고위급 당국 간 회담을 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은 하루 뒤인 1월 3일 이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직접 북한 TV로 나와 판문점 통신 채널 복원 방침을 알렸다. 개성공단 폐쇄 조치 때 함께 단절됐던 남북 직통 전화가 1년 11개월 만에 다시 열린 것이다.
 
북한의 평화공세는 고육지책?
 
신년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남조선 집권세력이 바뀌었으나 북남 관계에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며 문재인 정부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또 “오히려 미국의 대(對)조선 적대정책을 추종함으로써 북남 사이의 불신과 대결을 격화시켰다”는 말도 했다. 한국 정부에 대해 대북압박 공조에서 이탈할 것과 대북정책 전환을 압박하기 위한 주장이다. 하지만 더 이상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는 않고 자제했다. 오히려 평창 카드를 꺼내 들고 남북관계 개선이란 유화 제스처를 취하는 선택을 했다. 그동안 “남조선 것들 쓸어버리라”는 등의 극언을 퍼부으며 대남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온 김정은으로서는 큰 전환과 변화를 보인 것이다. 여기에는 국제사회의 강력한 대북제재와 한·미 공조가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중국까지 가세한 유엔 대북제재 결의 이행과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의 독자제재가 촘촘하게 짜이면서 김정은이 다른 선택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그의 평화공세가 고육지책이란 얘기다.
 
김정은이 신년사 곳곳에서 “겹쌓이는 난관과 시련”이나 “유례없는 엄혹한 도전” 등을 언급한 건 이를 잘 보여준다. “불순 적대분자 준동을 색출 분쇄하라”고 주문한 것도 대북제재와 경제난으로 엘리트 계층의 체제 이반이 심화되고, 주민들의 민심 동요가 우려되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대북제제와 관련한 북한 내부 분위기는 최근 들어 심상치 않은 양상이다. “어떤 제재와 압박에도 끄떡없을 것”이라고 자신하던 데서 위기감을 호소하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선전매체들은 연일 ‘미국과 제국주의 세력’의 제재에 철저히 대비하자는 캠페인을 쏟아내고 반미 군중집회가 이어진다. 제제로 인한 주민들의 불만이 최고지도자 김정은에게 쏠리는 걸 막기 위한 조치다.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평양에서 드디어 대북제재의 고통을 견디기 힘들다는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관측이 나올 정도다.
 
핵과 미사일 도발로 점철된 지난 한 해 대북제재와 관련한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보면 북한이 긴장하는 배경이 드러난다. 지난해 12월 2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 도발에 대응해 대북 유류 제재를 한층 강화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휘발유와 경유·등유를 포함하는 석유 정제품 공급량을 바닥 수준으로 줄이고, 외화벌이를 위한 해외 파견 노동자를 2년 이내 북한에 귀환토록 했다. 앞서 9월 6차 핵 실험 직후 나온 유엔 안보리 대북결의 2375호는 북한의 섬유 수출 금지와 원유 판매량 제한 등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강력한 내용을 담았다. 기존의 제재 리스트에 포함된 석탄과 철광석·수산물과 함께 북한의 주요 달러박스이던 섬유제품 수출길이 막힌 것이다. 1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해온 북한의 해외 노동자 송출도 금지돼 연간 5억 달러에 달하는 수익도 끊길 상황이 됐다. 속속 이어지고 있는 각 국가의 독자 제재도 만만치 않다. 잇단 외교공관 폐쇄 조치 등까지 이어지며 북한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북한 관영매체들은 상황을 ‘엄혹한 난국’이라고 표현한다. 김정은도 신년사에서 이와 궤를 같이 하는 언급을 했다. 그는 “지난해 미국과 그 추종세력들의 반공화국 고립 압살 책동은 극도에 달했으며 우리 혁명은 유례없는 엄혹한 도전에 부닥쳤다”고 말했다. 앞서 김정은은 지난해 10월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7기 2차 전원회의에서 대북제재 대책을 유난히 챙겼다. 연설에서 언급한 20여개 항목 중 5개가 제재 관련 내용으로 파악된다. 그는 “제재 압살 책동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화를 복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기본 열쇠가 바로 자력갱생”이라고 강조했다. 봉쇄 수준의 대북압박에 맞서 외부로부터의 자원 공급 없이도 버틸 수 있는 체제를 갖추자는 주장이다. 대북압박이 먹히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던 북한 당국이 ‘제재피해 조사위원회’를 만들었다는 건 제재가 약효를 발휘하고 있다는 고백이다. 조사위는 피해상황을 구체적으로 주장하며 국제사회의 동정을 구하고 있는 형국이다. 10월 담화에서는 “주민들의 일반 생활용품까지 이중 용도의 딱지가 붙어 제한받음으로써 어린이들과 여성의 권리 보호와 생존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제재 무용론과 함께 “미 제국주의의 고립압살 책동을 분쇄하자”고 선동하던 데서 ‘피해자 코스프레(costume play)’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미국에 대해 여전히 날을 세우는 태도를 보였다. 첫 대목에 핵 문제와 미국과의 관계를 언급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그는 “미국은 결코 나와 우리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걸어오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9월 6차 핵 실험과 11월에 감행한 ‘화성-15형’ 발사 등 이른바 ‘국가 핵무력’ 완성을 “역사적 대업 성취”라고 강조한 것이다. 김정은은 특히 “미국 본토 전역이 우리 핵 타격 사정권 안에 있으며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있다는 것은 결코 위협이 아닌 현실”이라고 말했다. A4 용지 10쪽 분량의 신년사에서 핵 관련 키워드는 22차례 등장했다. 지난해 신년사에서 5차례 사용됐던 것에 비하며 북한이 핵 문제에 매우 공을 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핵무력 완성을 수단으로 한 자기과시 형태의 공세적 레토릭(rhetoric)을 구사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정영태 북한연구소장)는 분석이 제기된다.
 
주목되는 건 한·미 합동군사연습 중단 문제를 들고 나온 부분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외세와의 모든 핵전쟁 연습을 그만둬야 한다”며 우리 정부를 압박했다. 문재인 정부가 겨울올림픽 기간 중 군사연습 연기를 고려하고 있고, 이를 둘러싸고 한·미 간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틈새를 파고든 것이라 볼 수 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북한의 올림픽 참가 표명으로 인해 한·미가 연합연습 연기를 조만간 공식화 하는 상황에 접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이를 둘러싼 갈등의 소지도 또렷하다. 한·미가 군사연습 연기에 무게를 둔데 반해 북한은 ‘중단’을 요구하고 있는 형국이란 점에서다. 북한이 막판까지 평창 참가를 앞세워 한·미 동맹 틈새 벌리기와 남남갈등을 획책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이런 배경에서다. 모처럼의 남북 당국대화 분위기가 깨지거나 올림픽에 북한이 오지 못하는 상황이 현실화 할까 속 태우는 정부의 속내를 꿰고 있을 북한이 이를 십분 활용할 것이란 진단도 나온다.
 
무엇보다 유엔과 미국 주도의 대북제재가 탄력을 받는 상황에서 한국만 남북대화 쪽으로 유턴하는 건 큰 부담이다. 북한과의 대화나 교류에 합의한다 해도 본격적인 진전을 위해서는 대북제재 그물망이 걷혀야 한다. 미국은 물론 유엔 제재에 발맞춰온 국제사회의 동의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 북한의 비핵화(혹은 신뢰할만한 초보적 이행조치) 등 근본적 태도 변화나 실천이 요구되지만 북한이 이를 보여줄 가능성은 작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미국과의 사전 교감을 통해 남북관계 복원 쪽으로 움직인 것이란 관측을 제기하지만 설득력은 떨어진다. 미국 조야에서 북한의 대남 대화공세와 평창 올림픽 참가,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적극적인 호응에 대해 우려의 시각이 쏟아지고 있다는 점에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월 2일 김정은의 대남 대화 제안에 대해 “좋은 뉴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1월 4일(현지시간) 남북 대화에 대해 “좋은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문재인 대통령을 100% 지지한다”는 말도 했다.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 동안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연기하자는 문 대통령의 제안도 받아들였다.
 
미국 “북핵 해결에 도움돼야 의미 있어”
 
물론 우리 정부로서는 김정은의 핵·미사일 도발과 대남 위협으로 싸늘하게 식은 국민 대북감정을 달래는 것도 쉽지 않다. 평창 올림픽까지는 그나마 심리적 저항이나 비판이 적을 수 있다. 국제스포츠 경기인 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한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이후 북한은 대남 청구서를 들이밀 것으로 예상된다. ‘남조선 잔칫상을 빛내줬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김정은은 한·미 합동 군사연습의 완전 중단이나 항공모함이나 전폭기 등 미 전략자산의 한반도 순환배치 중단 등을 요구할 공산이 크다. 남북 당국대화나 이산상봉 등의 전제조건으로 우리가 수용하기 쉽지 않거나 한·미 공조를 깨뜨릴 사안을 들고 나올 수 있다. 2007년 정상회담 때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10·4 선언의 경협 프로젝트를 이행하라는 압박 등을 펼칠 가능성도 있다. 통일부가 40조원의 예산이 들 것이라고 판단한 사업이다. 개성공단 재가동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도 마찬가지다. 이를 통해 대북 경제제재의 숨통을 트고 한국 내 남남갈등을 조장하는 전술을 구사하는 상황이 올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김정은 과거 신년사가 구두선에 그친 경우도 많다는 것도 정부로선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지난 12월 초 “북한의 ICBM 완성을 막을 기한은 3개월”이라고 공언하는 등 긴장은 여전하다. 자칫 북한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가는 시간 벌기에 말려들었다는 비판을 자초할 수 있다. 김정은도 신년사에서 “핵탄두와 탄도로켓(미사일) 대량 생산 및 실전배치”를 강조하는 등 도발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어 우려를 더하고 있다. 북한의 돌발 행동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올림픽은 지구촌의 평화를 상징하지만 북한은 늘 그 대척점에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훼방 놓으려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 테러를 저질렀다. 2007년 남북 정상 간에 합의한 10·4 선언에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북 응원단 참가’를 약속하고도 깨버렸다. 북한은 올림픽에 대해 “지난 100여년 기간 진보와 반동, 정의와 부정의와의 첨예한 대립과정을 거치며 심각한 정치투쟁으로 일관된 노정을 걸어왔다”([조선대백과사전] 2001년 판)고 깎아 내린다. 평창겨울올림픽을 “동족의 경사”라며 반색하고 나선 김정은의 속내가 여전히 미덥지 않은 것도 이런 앞서의 문제 때문이다.
 
김정은은 올해 집권 7년차를 맞았다. 그동안 좌충우돌하던 모습에서 점차 국제사회나 한국이 생각과 동선을 가늠할 수 있는 콘트롤박스로 들어온 것이란 평가도 있다. 그가 국내외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예상대로 대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진정성 있는 대화에 나설 것이라고 판단하기는 이른 상황인 듯하다. 대화 국면을 모색하면서도 추가적인 핵과 미사일 도발을 통해 미국을 테스트하고 우리 정부를 궁지에 모는 국면을 연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북한이 점차 대화와 교류 쪽으로 무게를 실어야 하는 대외적 압박 요인도 적지 않다. 더 이상의 도발은 북한 정권의 존립 자체를 흔들 파국을 의미할 것이란 측면에서다.
 
김정은의 입보다 발걸음 주시해야
 
새해 벽두 신년사를 통해 승부수를 던진 김정은은 한국과 국제사회의 대응 전열을 흩뜨리는 데 진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만큼 우리의 대응도 쉽지 않을 수 있다. 도발 일변도의 행보보다는 대화 공세를 결합한 화전 양면전술이란 점에서다. ‘평화 올림픽’을 표방한 평창을 앞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핵 버튼’을 움켜쥔 김정은과의 대좌는 새로운 판세읽기와 대응전략을 요구하고 있다. 김정은의 입보다는 발걸음을 주시하면서 신중한 대북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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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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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