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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칼럼] ‘논두렁 시계’는 흘리지 말자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업보의 연속이다. 구태 정치의 핵심은 정보공작이었다. 5·16 직후 공화당을 만든 건 중앙정보부다. 5공화국의 1중대, 2중대, 3중대를 만든 것도 보안사다. 그 망령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박주원 국민의당 최고위원이 ‘김대중(DJ) 비자금’ 의혹 자료를 제공했다고 한다. 구체적인 진실이 다 드러난 건 아니다. 주성영 당시 한나라당 의원과 거래가 있었다는 사실은 본인도 인정한다.
 
그의 업보다. 11년도 넘은 일이라고 억울해할 일이 아니다. 법은 시효가 있지만 정치에는 시효가 없다. 아직 의문이 남는다. 양도성예금증서(CD) 사본은 어디서 나왔나. 또 다른 배후는 없나. 한나라당은 왜 확인도 않고 그를 덜컥 공천해 줬나. 왜 대통령 선거가 다 끝난 2008년에야 이걸 공개했나. 검찰은 왜 수사하지 않았나. 그가 털어놓을 것들이다.
 
정보는 힘이다. 조금만 힘을 줘도 난폭하게 질주한다. 중앙정보부가 정치를 쥐고 흔든 시절이 있었다. 그런 시대는 정형근 전 의원과 함께 끝난 줄 알았다. 정보의 유혹은 그렇게 강렬하다. 2005년 정형근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40대 여성과 호텔에 있다가 공개돼 망신을 당했다.
 
정 전 의원은 묵주 100개를 받으러 갔다고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누군가 방송사에 제보해 카메라가 방문 앞을 비추는 가운데 문을 두드렸다. 그는 안기부 대공수사국장 출신이다. 1992년 총선 때 그의 부하 4명이 홍사덕 민주당 후보의 사생활 비난 유인물을 뿌리다 붙들렸다. 당시 김동길·최훈 등 다른 야당 후보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뿌린 대로 거둔 셈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하들의 여자관계에 관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야당 의원들은 이런 문제로 협박당했다. 65년 김대중 당시 의원은 “정보기관이 … 4중·5중의 정보망을 치고, 전화 도청하고, 미행하고 … 중앙정보부 눈치를 살피지 않고는 말도 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69년 김영삼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는 정보부가 3선개헌에 앞장선다고 공격했다가 초산 테러를 당했다. 야당 전당대회가 정보기관이 동원한 깡패들로 난장판이 되기도 했다. 야당 정치인을 매수도 했다.
 
김진국칼럼

김진국칼럼

정보정치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 줄줄이 대통령이 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뒤집어 놓았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아직 최대의 적폐청산 대상이다.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이 2012년 대통령 선거전에 쟁점이 됐다.
 
국정원개혁위원회가 국정원 서버를 열었다. 당시 1급 비밀로 분류했던 대화록이 공개되는 과정을 조사해 발표했다. 수사해서 책임을 묻겠다고 한다. 서훈 국정원장은 국내 파트를 아예 없애겠다고 한다. 이제 다 해결된 걸까.
 
국정원은 정권교체 때마다 큰바람을 맞았다. 엉망이 됐다. 그 역시 업보다. 그럴수록 정치권의 눈치만 보게 된다. 국가 안보를 위해 정말 필요한 전문가는 쫓겨다닌다. 특히 대북 정보망이 몇 차례에 걸쳐 망가졌다. 정보 능력이 바닥이고, 보안은 안 지켜지고… 어떤 외국 정보기관이 기밀 정보를 주겠나.
 
정보기관의 공작정치는 심각했다. 반드시 털어내야 한다. 하지만 이제 정말 끝내자. 조금 미진하더라도 기록물 관리의 체계를 세워야 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대한민국 정부는 계속된다. 정부의 계속성이 정권의 보복으로 훼손돼선 안 된다.
 
필자는 유신 시절이던 대학 1학년 때 일기를 열심히 썼다. 시간이 날 때마다 대학노트에 적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 가방을 두고 자리를 비웠다 그 노트를 잃어버렸다. 시국에 대한 생각, 선배와 동료들의 활동이 적혀 있었다. 한동안 전전긍긍했다. 다행히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다시는 일기를 쓸 수 없었다.
 
정권의 기록은 역사를 쓰는 데만 필요한 게 아니다. 전임 대통령의 기록을 모르고 어떻게 국정을 운영하나. 정상끼리 나눈 대화를 모르고 어떻게 그 정상을 다시 만나나. 통일·외교·교육·재정… 어느 것도 단절될 수 없다. 국가기록원에 넣는 게 끝이 아니다. 제대로 넘겨줘야 한다. 정상회담 발언이 정치적 공격 수단, 국정 기록이 보복 수사로 이어진다면 누가 기록을 남기겠나.
 
물론 무조건 덮으라는 건 아니다. 정치보복의 악순환은 끊어야 한다. 그래야 정상 정부다. 기밀문서를 공개하는 기준을 다시 정리해야 한다. 있으나마나 한 기준이 아니라 지켜지는 규범과 관행을 쌓아야 한다. 중요한 건 국익이다.
 
정쟁에 이용하지 않아야 한다. 범죄도 아닌 개인사를 흘려 망신 주고, 정치적으로 이용할 것까지야 없지 않나. ‘논두렁 시계’ 말이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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