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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곳' 예루살렘, 그 수난의 역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일(현지시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긴다고 발표하자 중동이 요동치고 있다. 예루살렘이 대체 어떤 곳이기에 이토록 난리일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곳, 예루살렘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의 성지 '통곡의 벽' 사진=신인섭 기자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의 성지 '통곡의 벽' 사진=신인섭 기자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지만, 국제법상 어느 나라의 소유도 아닌 도시.’  
사전은 예루살렘을 이렇게 규정한다. 모순인 듯한 이 표현이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이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에서 모두 성지로 삼는 곳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란 뜻을 가진 이곳은 기원전 1000년 무렵 다윗왕이 들어와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은 도시다. 그러다 기원전 63년 로마군에 함락되고, 이후 로마의 국교가 기독교가 되며 자연스레 예루살렘은 기독교의 성지로도 자리매김했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지배 등을 거쳐 638년, 예루살렘은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에 함락된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이곳을 탈환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 1516년에는 오스만투르크제국이 예루살렘을 정복한다.  
 
이 수난의 도시에 다시 유럽 세력이 뻗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였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이 영국군에 패하며 예루살렘 또한 영국의 수중에 들어간다.  
현대 중동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서막
제1차 중동 전쟁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중앙포토]

제1차 중동 전쟁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중앙포토]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11월 영국 정부는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 건설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밸푸어 선언’을 발표한다.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돈줄을 쥐고 있는 유대인에게 전쟁 자금을 끌어내기 위한 전략이었다. 바로 2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는 아랍 민족에게 전후 독립을 약속한 것(맥마흔 선언)과 상반된 입장이었다.  
 
‘밸푸어 선언’ 이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으로 물밀듯 들어갔다. 아랍인들과 갈등이 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영국 정부가 이민을 제한하려 했지만 이미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된 후였다. 이 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간 이유다.  
 
유엔은 1947년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지구와 아랍지구로 분할하는 결의안 181호를 채택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분노에 들끓었다. 인구 상당수가 아랍인인데도 유대지구의 면적이 팔레스타인 전체 땅의 56%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비옥한 땅들도 유대인에게 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1948년 5월, 영국군이 철수하자마자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을 비롯한 아랍 국가들이 격분했다. 제1차 중동전쟁의 시작이었다.
 
예루살렘, 분할되다
예루살렘의 이슬람교 성지 '바위의 돔' [사진=위키피디아]

예루살렘의 이슬람교 성지 '바위의 돔' [사진=위키피디아]

결과는 아랍의 처절한 패배였다. 이스라엘 땅은 팔레스타인 전역의 80%에 달할 정도로 넓어졌다. 엄청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향을 등져야 했다. 그들은 난민이 됐다.  
 
예루살렘은 분열됐다. 서쪽 지역은 이스라엘, 동쪽 지역은 요르단의 손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이 ‘신성한 도시’에 대한 두 나라의 접근은 조심스러웠다. 이스라엘은 텔아비브 등에 상업지구를 건설하는 등 서쪽 해안 지역에 집중했고, 요르단의 압둘라 1세는 암만의 개발에 힘을 쏟았다.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의 역사학자 이삼 나사르는 뉴욕타임스(NYT)에 “당시 이스라엘은 유엔과 유럽 국가들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했기에 예루살렘에 공력을 쏟는 일에 주저했다”고 설명했다.
 
외국 정부들도 대사관을 텔아비브에 짓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완전한 점령
이스라엘군의 탱크에 돌멩이를 던지는 팔레스타인 소년. 분노와 저항의 표현이다.  [사진제공=니케북스]

이스라엘군의 탱크에 돌멩이를 던지는 팔레스타인 소년. 분노와 저항의 표현이다. [사진제공=니케북스]

전쟁은 계속됐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이 터졌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맞붙었던 2차 전쟁에 이은 것이었다. 이번엔 시리아와 이스라엘 간 영토 분쟁이 이유였다.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이 연합했고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전쟁은 6일 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유대인들의 땅은 더욱 넓어졌다. 팔레스타인 난민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동부마저 점령하고 만다.  
 
물론 국제 사회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합병과 유대인 정착 지원은 불법이며,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국제 사회의 공통된 시각”(라시드 할리디콜롬비아대 교수, NYT)이었다.  
 
그럼에도 1967년의 전쟁은 이스라엘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느낌을 준”(이스라엘 정치학자 메나쳄 클라인, NYT) 큰 전환점이 됐다. 강경한 민족주의가 이스라엘을 뒤흔들었다.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의 상징적 중요성은 더 커졌다.  
 
다시 ‘평화의 도시’가 될 수 있을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22일(현지시간) 중동의 화약고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순방을 시작하며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예루살렘 성지인 ‘통곡의 벽’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는 유대인 전통 모자인 키파를 쓰고 벽에 손을 대는 등 추모 의식을 했다. [예루살렘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22일(현지시간) 중동의 화약고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순방을 시작하며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예루살렘 성지인 ‘통곡의 벽’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는 유대인 전통 모자인 키파를 쓰고 벽에 손을 대는 등 추모 의식을 했다. [예루살렘 AFP=연합뉴스]

마침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불만은 폭발했다. 1987년 이스라엘군의 차량에 팔레스타인 주민 4명이 사망한 사건이 도화선이 됐다. 대대적인 반이스라엘 저항 운동인 ‘인티파다’가 시작됐다. 엄청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희생됐다.
 
결국 1995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 이듬해인 1996년에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됐다.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 팔레스타인 자치의회도 구성됐다.  
 
잘 진행되는 것 같았던 평화협정은 2000년에 깨지고 만다.  
 
이번에도 예루살렘이 문제였다. 이스라엘의 강경파 지도자 샤론이 이 도시의 성지를 방문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이 무장 투쟁을 벌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혹하게 진압했다.  
 
이후 2003년 미국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2005년까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창설하기로 한 ‘중동평화 로드맵’ 등이 진행되지만, 2006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격하며 갈등은 다시 시작됐다.  
 
예루살렘의 수난, 아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현재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가자지구 등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등 팔레스타인에 적대적인 정책을 강경하게 펼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 대사관이 예루살렘으로 옮기면 갈등은 증폭될 것이 분명하다.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닌 도시,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의 앞날에 국제 사회의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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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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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와 기사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