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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탈출 8번째…최고 드라마는 67년 이수근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은 남북한 분단을 보여주는 현장이면서 자유세계로의 탈출로이기도 했다. 판문점 탈출사(史)에 여덟 번째 사례가 더해졌다. 지난 13일 목숨을 건 북한군 오모(24)씨의 귀순이다.

 
지난 13일 군용 차량이 꼼짝 못하자 운전자인 귀순 북한군 오모(24)씨가 나와 남쪽으로 뛰고 있다. [사진제공=유엔군사령부]

지난 13일 군용 차량이 꼼짝 못하자 운전자인 귀순 북한군 오모(24)씨가 나와 남쪽으로 뛰고 있다. [사진제공=유엔군사령부]

 
판문점 탈출로를 개척한 사람은 옛 소련의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의 평양지국 기자인 이동준이다. 그는 59년 1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96차 군사정전위원회(군정위)를 취재 중이었다. 회담장 바로 옆 유엔군사령부 사무실로 가 귀순 의사를 밝힌 뒤 미군 군복으로 갈아입고 식사 운반원으로 가장해 탈출했다.
 
가장 주목을 받은 탈출은 67년 3월 22일 ‘위장간첩’ 이수근이었다.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그는 제242차 군정위 취재를 하다 오후 5시 23분쯤 유엔군 대표인 밴 클러프트 준장의 차에 뛰어올랐다. 북한군 경비병이 차에 매달리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자 북한군 지휘관이 권총 1발을 하늘로 발사했고, 북한군의 일제 사격이 이어졌다. 판문점에서의 첫 총격이었다.
 
드라마틱한 귀순을 한 이수근은 2년 후인 69년 1월 27일 콧수염과 가발로 위장하고 위조여권을 사용하여 해외 탈출을 시도하다 체포됐다. 그는 간첩죄로 69년 7월 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됐다.
 

귀순 기자회견을하고있는 이수근씨. [중앙포토]

귀순 기자회견을하고있는 이수근씨. [중앙포토]

이수근이 귀순할 때 탑승한 유엔군 승용차. [중앙포토]

이수근이 귀순할 때 탑승한 유엔군 승용차. [중앙포토]

 
 
1980년대엔 옛 공산권 외국인들의 탈출이 이어졌다. 81년 중립국감독위원회(중감위) 소속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체코)군 로버트 오자크 일병이 판문점을 통해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84년 11월 23일 당시 소련(러시아) 국적의 바실리 야코블레비치 마투조크가 판문점 북측 지역에서 갑자기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망명했다. 북한군이 경고사격을 했지만 마투조크가 계속 남하하자, 군사분계선까지 넘어 사격했다. 유엔군이 대응하면서 30분 넘게 남북 간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 1명이 숨지고 미군 1명이 부상했다. 북한군 피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경비병도 3명이 죽고 1명이 부상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북한 김일성대 교환학생이었던 안드레이 란코브 국민대 교수는 마투조크의 망명 현장을 목격했다고 한다. 란코브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군이 선(MDL)을 넘자마자 총격이 시작됐다. 양측 모두 기관총이나 유탄발사기 등 중화기를 사용했다”며 “북한군은 극심한 저항에 부딪히자 손을 들었고, 시신을 챙겨 MDL을 넘어 되돌아갔다”고 말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경계 중인 양측 경비병. 이처럼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진공동취재단]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경계 중인 양측 경비병. 이처럼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진공동취재단]

 
89년 7월 29일엔 북측 군정위 소속인 중국군 주오슈카이 소교(소령) 부부가 중감위 회의실을 통해 월남했다. 그는 평소 진급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고 그해 천안문 사건을 접한 뒤 미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했다고 한다.
 
오자크와 마투조크, 주오 소교 부부 모두 미국에 망명했다.
 
98년엔 북한군 변용관 상위(대위)가 남측으로 넘어왔다. 적공과(적군을 상대로 공작을 펴는 조직) 요원인 그는 JSA 내에서 한국군을 상대로 했던 포섭공작을 밝혔다. 그의 귀순 후 고(故) 김훈 중위가 JSA 내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변 상위의 진술과 김훈 중위 사건은 2000년 개봉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모티브가 됐다.  
 
2007년 JSA 귀순 사건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가 지난 13일 귀순 사건을 계기로 공개됐다. 군 당국이 지난 14일 국회 국방위원회에 귀순사건 경위를 보고하면서다. 정보당국에 따르면 북한군 차모씨는 개성공단 후방 부대에 근무 중이었다. 잦은 구타로 군 생활에 불만을 품은 그는 개성공단 불빛을 보면서 남한 생활에 대한 동경을 품었다고 한다. 귀순을 결심한 뒤 JSA 남측 지역 측면의 철조망 아래 땅을 파고 들어왔다. 이때 전기철조망에 감전돼 흉터가 남았다고 한다. 정부 소식통은 “당시 군 당국이 경계에 실패했다는 질책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정부도 남북한 관계 악화를 우려했다. 이 때문에 차씨의 귀순에 대해 다들 쉬쉬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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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을 통한 월북 사건도 있었다. 90년 3월 1일 유엔군사령부 JSA 경비대대 소속 한국군 김모(당시 23세) 이병이 MDL을 넘어 월북했다. 그의 월북 이유에 대해 군 당국은 함구하고 있다.
 
53년 이후 모두 아홉 차례 판문점에서 남한 또는 북한으로 탈출이 있었던 이유는 JSA라는 특성 때문이다. 76년 도끼만행 사건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JSA에선 MDL 표식도 없었다. 북측과 유엔사측 초소가 남쪽 또는 북쪽을 가리지 않고 설치돼 있었다. 양측 인원은 JSA 내부에선 자유롭게 통행했다. 그러다 도끼만행 사건 이후로 남북이 엄격히 갈리고 MDL 경계도 생겨났다. 그렇지만 워낙 거리가 가까워 상대편으로의 탈출이 그리 어렵지 않은 편이다.
 
중국군 주오 소교 부부 망명 사건의 경우 당시 임수경씨가 북한에서 열렸던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뒤 판문점 귀환을 요구하며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에서 단식농성 중이었다. 주오 소교 부부는 판문점 북측 지역이 어수선한 상황을 이용했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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