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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한국 멜로영화에 김주혁이 남긴 것

[매거진M] 우리는 2017년 10월 30일 겨울의 길목에서 김주혁을 잃었다. 하나의 세계가 스러졌다. 그가 만들고 꿈꾸고 사랑한 세계. 30여편의 영화와 드라마. 우리는 오랫동안 그의 세계에서 행복했다. 재능있고 성실한 예술가였고, 품이 넓은 사람이었다. 배우 김주혁의 20년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게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배우였던 아버지(故 김무생)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주혁은 배우가 됐다. “뭐든 안으로 삭이는 성격인” 그가 “감정을 내뱉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연기할 때였다. 그런 그의 필모그래피는 온통, 사랑하는 누군가의 곤경에 발 벗고 나선 속 깊은 남자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여전히 믿기 힘든 부재를 견디며, 그가 스크린에 가장 뚜렷이 남긴 얼굴을 되뇌었다. 최근 침체기에서 좀처럼 헤어 나올 줄 모르는 한국 멜로영화는 이 결이 다른 배우에게 빚진 것이 너무도 많았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스스로 “잘생긴 얼굴은 아니”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김주혁. 그가 처음부터 ‘한국의 휴 그랜트’ 자리를 예약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리액션이 좋은 배우가 멜로 장르에 능한 건 필연적인 일. 상대 배우에게 감응하는 김주혁의 재능은 2001년 첫 주연 영화 ‘세이 예스’부터 드러났다.
 
결혼 1주년 여행 중 정체불명의 남자 M(박중훈)과 우연히 얽힌 정현(김주혁)은 M의 영문 모를 살기로부터 아내 윤희(추상미)를 지키려고 발버둥 친다. 많은 설명 없이 M의 악마성을 천재지변에 가깝게 그려놓은 영화에서 관객의 주의를 지탱하는 건 M에 대한 정현의 리액션이다. 아내에게 “오직 널 행복하게 만드는 게 내 진심”이라고 대놓고 말할 만큼 낭만적인 애처가였던 그는 제어되지 않는 공포와 분노 속에 서서히 다른 인격으로 변모한다. 엔딩에서 안경을 벗은 정현의 무표정에 겹쳐지는 M의 공허한 살의. 그 극단적인 전개를 김주혁은 다소 거칠되 제법 설득력 있게 표현해낸다.
 
'세이 예스'

'세이 예스'

흥미로운 건 훗날 김주혁을 결이 다른 멜로 배우로 자리 잡게 한 독특한 자질들 역시 이 미스터리 스릴러영화에서 이미 엿보였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정현이 아내에게 “내 옆에 있어주는 걸로 충분하다”고 말하거나, 아내의 꿈을 기꺼이 외조하겠다고 나서는 장면 등이다.
 
1990~2000년대 멜로·로맨스 장르의 영화와 드라마를 통틀어 남성 주인공들은 상대적인 우위의 입장에서 여성 주인공을 ‘신분 상승’시키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자신이 연인 관계에서 완전히 물러남으로써 여성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런 엔딩이 대다수였다. 그런 와중에 김주혁은 전혀 다른 노선을 걸었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연인이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그 욕망을 자신의 것 이상으로 성취하려 애썼다. 계속해서 사랑하길 포기하지 않으면서.
 
'청연'

'청연'

'홍반장'

'홍반장'

‘싱글즈’의 증권맨 수헌은 결혼을 약속한 나난(장진영)의 직업적인 선택을 위해 무기한 장거리 연애라는 불안을 감수한다. ‘청연’의 한지혁은 조선 최초 여성 비행사인 연인 박경원(장진영)에게 “하늘이 나보다 더 좋으냐”고 핀잔주곤 하지만, 목숨을 건 비행에 나서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가는 경원의 뒷모습을 향해 “조심하라”고 간절히 되뇐다. 
 
‘홍반장’에서 넉살 좋게 동네 대소사를 챙기던 홍두식은, 좋아하는 치과의사 혜진(엄정화)이 일이 잘 풀려 서울로 돌아간다고 하자 정작 잡을 엄두를 못 낸다. 이 여자, 힘들다고 찾아와서 술 먹고 싶다면 어쩌나, 혜진이 좋아하던 와인으로 속절없이 벽장만 채우면서 말이다(실속 차리는 데는 영 ‘젬병’인 이 ‘오지라퍼’ 캐릭터는 지난해 김주혁이 노총각 셰프로 분한 로맨스영화 ‘좋아해줘’에서 다시금 짠하고도 코믹하게 변주됐다).
 
홍상수 감독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영수는 여자 친구 민정(이유영)이 다른 남자들과 술을 마시고 다닌다는 친구들의 말에 민정에 대한 의심으로 괴로워하지만, 종국에는 “당신이 너무 좋아서 당신을 믿겠다”며 민정의 품에 안긴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사랑하는 민정을 있는 그대로의 그 자신으로 받아들이겠노라 맹세하면서(이 영화로 이유영과 그는 실제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뷰티 인사이드’에서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바뀌는 남자 우진이 지쳐가던 연인 이수(한효주)를 위해 안녕을 고하는 이별 신. 우진 역에 캐스팅된 스물한 명의 주요 남자 배우 중 김주혁을 하필 이 장면에 출연시킨 건 그럼에도 영원히 이수를 잊지 않을 우진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방자전'

방자전'

'좋아해줘'

'좋아해줘'

김주혁은 이전까지 러브스토리에서 주로 여성에게 강요됐던 헌신과 배려를 더없이 현실적인 남성 캐릭터의 자장 안에서 호소력 있게 소화해냈다. 대통령의 딸이자 유능한 외교관과, 강력계 말단 형사의 사랑을 그린 TV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으로 호흡을 맞춘 전도연을 비롯해, ‘YMCA 야구단’의 김혜수, ‘아내가 결혼했다’의 손예진, 장진영, 엄정화 등 당대를 대표하는 여성 배우들이 앞다퉈 그와 함께한 이유다.
 
사랑을 배반할 줄 모르는 ‘현실 연인’. 몇몇 작품을 제외하곤 견고하게 다져 온 김주혁 특유의 캐릭터를 ‘이래도?’라고 반문하듯 잔혹한 시험에 들게 했던 인상적인 멜로영화로 동명 소설 원작의 현대극 ‘아내가 결혼했다’와 『춘향전』을 크게 비튼 사극 ‘방자전’이 있었다. 두 작품에서 모두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면서 딴 남자와도 관계를 맺는 연인과 갈등과 번민 끝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 젖힌다. 이렇게나 극단적인 치정극이 대중영화로서 납득될 수 있었던 건 두말할 필요 없이 김주혁이 길잡이 역할을 충실히 해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온 시대와 사회의 상식을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던 극 중 남자들은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그 상식을 뛰어넘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 심란하고도 지리멸렬한 심리 변화를 탄력 있게 드러내는 김주혁의 내면 연기는 고스란히 관객들을 극에 빠져들게 하는 징검다리가 됐다. 대체 불가능한 배우란 수식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비밀은 없다'

'비밀은 없다'

'공조'

'공조'

그를 잊지 못하게 만드는 건 비단 멜로영화뿐 아니다. 그가 인생의 내리막길에서 개과천선하는 중년의 야구선수(‘투혼’), 시대를 극복한 영웅(‘무신’ ‘구암 허준’), 시대와 호흡하는 언론인(‘아르곤’) 등의 캐릭터로 자장을 넓히기 시작한 건 마흔 언저리 들면서다. 정계 진출을 노리는 전직 유명 앵커로 분한 ‘비밀은 없다’에서 화면을 장악했던 음험한 욕망의 눈빛은 그가 이전에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것이었다. 올해는 드물게 악역을 한 ‘공조’로 영화로는 데뷔 20년 만에 처음 남우조연상(더 서울 어워즈)을 받은 참이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4부작 옴니버스 ‘장옥의 편지’ 등 단편영화로 새로운 도전을 하며 김주혁은 그렇게 더 넓어지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더 근사해질 그를 예감했다. 황망한 사고가 아니었더라면. 최근 인터뷰마다 “연기가 부쩍 재밌어졌다”고 했던 김주혁. 너무 빨리 떠난 그가 못다 보여준 모습들을 아쉬워하기엔 이 기나긴 겨울밤도 짧기만 하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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