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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시시각각] 차라리 분열이 낫다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영국의 로버트 필(1788~1850) 총리는 ‘근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귀족과 지주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던 토리당을 광범한 보수층을 지지기반으로 한 근대정당, 보수당으로 탈바꿈시켰다. 하지만 보수당을 분열시킨 인물이기도 한데, 두 가지 모두의 중심에 ‘곡물법’이 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면서 곡물 값이 폭락하자 지주계급이 다수를 이루던 영국 의회는 1815년 곡물 수입을 금지했다. 이 곡물법으로 지주들의 이익은 보호됐지만 평민들은 비싼 식량 값을 치러야 했다. 이후 수입곡물에 보호관세를 매기는 것으로 완화됐어도 여전히 서민들에게는 부담이 컸다. 1846년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들자 필은 곡물법 폐지안을 밀어붙여 통과시킨다. 보수당의 3분의 2는 반대했고 이 과정에서 찬성 의원들과 깊은 골이 파였다. 이후 찬성파가 휘그당과 합쳐 탄생한 것이 자유당이다.
 
영국 얘기를 꺼낸 건 유령 하나가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어서다. ‘보수대통합’이라는 유령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명분도 없고 순서도 틀렸으며 자격도 갖추지 못한 통합이다. 그저 허황한 망령일 뿐이다. 중세교회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음습한 그림자가 거기에 어른거린다. 성경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성서에 대한 배타적 해석권을 주장하다 나중엔 평신도들에게서 성경 읽을 권리마저 박탈했던 로마가톨릭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세교회가 종교개혁을 피해가려 했듯, 보수통합은 진정한 보수개혁을 바라는 유권자들의 눈을 가리는 대국민 사기극이다. 대한민국의 어느 보수 유권자가 그런 ‘야합’을 명령했는가.
 
통합을 외치는 자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문재인 정부의 폭주다. 보수가 분열돼서는 진보정권을 견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적폐청산으로 포장된 정치보복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부정하지 않는다. 지난 정권들보다 하나도 나을 게 없는 이 정권의 ‘내로남불’ 행태에 정나미가 떨어질 지경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무릇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1년 전만 해도 언감생심이었던 인물이 당연지사 대통령이 되고, 존재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정당이 의석 하나 늘리지 않고 집권당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뭔가. 보수의 옷은 걸쳤지만 지켜야 할 보수의 가치인지 뭔지도 몰랐던 얼치기 가짜 보수정권의 ‘자살골’ 탓 아니었던가. 천년만년 해먹을 것처럼 국정을 농단하는 권력자 주변에서 꼬리나 흔들고 그의 허물에는 애써 눈감았던 탓 아니었나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통렬한 반성과 처절한 자기희생이 먼저였어야 했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는 대신 모래부대를 짊어지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으려 노력했어야 하는 거였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 없이 잔머리만 굴리다가 이것저것 안 되니 재통합을 운운하는 건 보수 유권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국민을 우롱하다 버림받은 정당이 수만 불린다고 해서 떠났던 민심이 돌아올 거라 믿는 건가. 거대야당의 담장 뒤에서 땟국 흐르는 목숨을 부지하는 것 말고 뭐가 더 있을까. 더욱 복잡해진 계파 간 헤게모니 다툼과 정부·여당에 사사건건 딴죽이나 거는 진영 대결의 구태가 덤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분열의 상태로 남는 게 낫다. 필의 보수당도 분열했지만 곡물법 폐지는 곡물가 인하는 물론 제조업 부흥과 자유무역 도래라는 축복을 가져왔다. 필은 이렇게 말했었다. “내 이름은 독점업자들에게 증오의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보수당이 기득권만 지키는 반동집단이 아니라 시대요구와 변화에 부응하는 정치생명체라는 걸 증명해냈다. 그것이 수백 년 이어진 힘의 원동력이다. 이 땅의 보수정당이 가슴에 새겨야 할 진리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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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와 기사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