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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lee.youngjong@joongang.co.kr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예능으로 번진 김정은 혐오…막말과 도발이 부른 자충수

북한 김정은에 대한 외부 세계의 평점이 바닥까지 추락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유튜브에는 조롱과 희화화된 영상물이 넘쳐난다. 한국의 TV 프로그램엔 김정은 비판과 3대 세습 폐해를 지적하는 코너까지 등장했다. 젊은 층의 대북 반감이 커지는 건 전례 없는 흐름이다. 북한에 우호적인 진보 성향 인사도 가세했다. 핵과 미사일 도발에 대남 막말까지 쏟아낸 김정은이 자초한 일이다. TV 예능으로까지 파고든 김정은 혐오현상을 진단한다.
 

중년 연배의 한국인 머릿속엔 북한 하면 떠오르는 드라마가 있다. KBS1-TV가 1982년 11월 시작한 ‘지금 평양에선’이란 작품이다. 북한 권력의 막전막후를 당시 후계자 신분이던 김정일에 맞춰 해부한 이 드라마는 2년 반 동안 200회 가까이 방영되며 공전의 히트를 쳤다. 저녁 황금시간대 시청률이 46%에 달했다. 마흔을 갓 넘긴 김정일이 노간부들을 하대하고, 대남 공작에 골몰하는 장면은 우리 국민의 대북 비호감지수를 한껏 끌어올렸다. 여성 편력에다 잔혹하고 호전적 리더십을 가진 최고지도자 김정일의 이미지를 굳히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것이다. 거칠고 직설적 방식인 1950~70년대 반공영화 메시지를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안방에 끌어들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민 대북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간판급 반공드라마란 얘기다.
 
그런데 80년대 말~90년 초 동구권 붕괴와 소련 해체, 92년 남북 기본합의서 발효와 2000년 정상회담으로 이어진 화해·교류 분위기 속에 변화가 나타났다. 북한 TV 영상자료나 탈북자 증언을 소재로 제작한 시사교양물 ‘남북의 창’(KBS·1989년)과 ‘통일전망대’(MBC·2001년)의 등장이다.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가 제공하는 자료를 쓰고 제작 방향을 간섭받는 한계가 있었지만 북한 영상이란 ‘사실’에 근거한 방송물을 선보인 것이다.
 
영상물을 통해 본 대북인식 흐름

영상물을 통해 본 대북인식 흐름

특히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반공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든 영화가 쏟아졌다. 과거 ‘빨갱이’로 치부된 보도연맹(좌익 전향 및 반공운동) 관련자를 ‘배고픔 때문에 보리 서 말에 도장을 찍어 준’ 피해자로 재조명하는 식이었다. 지나친 좌편향이란 우려와 반공에 함몰됐던 인식의 균형을 찾는 시도란 주장이 교차했다.
 
다시 미묘한 반전이 일어난 건 김정은이 후계자로 자리 잡은 2010년 즈음이다. 호전적인 26세 청년 지도자와 세습체제에 대한 거부감과 비판이 커지는 복고(復古) 국면이 닥친 것이다. 그해 3월 북한군의 어뢰 공격에 의한 천안함 폭침 도발이 터지고, 같은 해 11월에는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을 가하는 초유의 상황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듬해 종편 채널에서 탈북 여성들을 출연시켜 북한의 폭압적 통치와 김정은 체제를 비판하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탈북 미녀를 내세운 선정성’을 지적하는 시각도 있었지만 유사한 포맷이 타 방송에서 이어졌다. 지상파와 종편에서 탈북자 출신 전문가의 등장이 눈에 띄게 늘고 대북 비판 수위가 올라간 것도 이즈음이다.
 
올 들어 핵실험과 잇따른 미사일 도발로 한반도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면서 김정은에 대한 비판은 정점을 찍었다. 이런 분위기는 SNS와 유튜브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김정은(Kimjongun)’을 검색하면 호전성을 꼬집거나 조롱하는 영상이 압도적이다. 만화나 캐릭터를 통해 전달력을 높인 영상물도 두드러진다. 영어권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중동 지역까지 비판적 콘텐트가 번져 나가는 양상이다. 한류 바람을 타고 평양과 지방 도시에 상륙한다면 북한 당국으로선 낭패다. 북한 댓글부대가 조선중앙TV의 김정은 찬양 영상 등을 열심히 업로드해 물타기를 시도하지만 역부족으로 보인다.
 
우리 TV에도 김정은을 꼬집는 프로그램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달 JTBC의 시사교양 프로 ‘내 이름을 불러줘-한명(名)회’는 첫 회에 ‘김정은’을 다뤘다. 한국에는 이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이 1만3915명에 이르지만 북한에선 최고지도자의 존함이란 이유로 같은 이름을 쓸 수 없고, 강제로 개명당한다는 게 핵심 메시지다. tvN도 이달 방영한 예능 프로 ‘유아독존’에서 독재자의 권력 세습을 다루면서 북한을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세습 독재국가”로 지목했다. 평소 진보적 성향으로 알려진 한 출연자는 69년 동안 이어진 3대 세습 독재를 비판하고 주민에 대한 “일상생활에서의 세뇌”와 김정은 유고 사태까지 언급했다.
 
청소년과 대학생·청년 등 젊은 세대의 대북 비판 인식이 높아지는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촛불시위에서 알 수 있듯이 권력 부패와 ‘갑질’ 행태 등 국내 이슈에 대한 사회 기류는 진보 성향이 짙어졌다. 하지만 북한 체제와 김정은에 대한 인식은 보수적 성격을 더해 가는 추세가 가파르다. 기성세대보다 젊은 층이 더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점도 흥미롭다.
 
이원재 KAIST 교수가 2003~2016년 한국종합사회조사(KGSS) 데이터를 분석한 ‘노무현 정부 이후 한국 사회 세대별 정치·사회 성향 변화’(중앙SUNDAY 3월 12일자 보도) 결과에서도 이런 현상은 확인된다. 이 기간 북한에 대해 적대적 입장으로 변해 가는 추세는 유사했지만 가장 젊은 세대인 포스트86(1970년생 이후)이 특히 심했다.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도를 4점 척도(높을수록 적대적)로 보면 86세대(1960~69년생)는 2.64였고, 포스트86은 2.78로 나타났다. 산업화세대(1959년생 이전)의 3.04에 버금가는 수치다. 이 교수는 “포스트86세대는 2008년을 기점으로 민족주의적 자세를 버렸다”고 진단했다. 이른바 ‘반북(反北) 진보’ 성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런 기류는 김정은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핵·미사일 도발에서 대화 국면으로 전술적 전환을 하려 해도 한국 내 비판 여론이 쉽게 용납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다. 마음 내키는 대로 ‘서울 핵 불바다’를 공언하고 “남조선 것들 쓸어버리라”는 극언을 퍼부었던 후과다. 변변한 역량이나 검증 절차 없이 절대권력을 세습한 ‘평양판 금수저’에 대한 한국 또래 청년세대의 싸늘한 시선도 만만치 않다.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서울로 생중계되던 평양 정상회담 자리에서 “은둔에서 해방됐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북한 최고지도자에 대한 남한 사회의 반감을 누그러트리려는 제스처였다. 김정은은 자기 아버지의 이런 노력을 한 번에 무너트린 셈이다.
 
대북 접근에 공을 들여온 문재인 정부에도 큰 두통거리다. 오늘로 꼭 두 달 동안 도발을 멈춘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이끌어 내려면 대북 비판 여론을 무시할 수 없다. 자칫 북한에 저자세를 보이거나 대북 퍼주기를 시도하다간 뭇매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 2월 평창 겨울올림픽에 북한 선수단을 초청해 남북 관계의 물꼬를 트기 위한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는 까닭이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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