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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현장 출동 24분 늦고도…책임 발빼는 경찰에 법원은

 2015년 9월 12일 오후 9시 12분. 서울지방경찰청 112종합상황실로 걸려온 전화기 너머로 한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한남동 753-XX 103호요. 어머니와 여자친구가 전화로 싸운 후 여자친구가 집으로 오고 있는데, 어머니가 칼을 갖고 여자친구를 죽이겠다며 기다리고 있어요.”
 
상황실에서 출동 지령을 받은 한남동파출소 근무자는 “(앞서 접수된) 가정폭력 건과 동일 건 같다”고 응답했다. 10분 전인 오후 9시 10분 “한남동 7XX 1층 가정집에서 가족 싸움이 있다”는 신고가 들어와 이미 순찰차가 출동한 상황이었다.
 
경찰의 출동을 다급하게 요청하는 남자의 신고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상황실은 출동한 순찰차 근무자에게 “신고된 주소가 다르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칼을 갖고 있다고 신고됐으니 칼의 존재도 확인하라고 재차 강조했다.
살인사건 발생 장소(붉은 표시)는 한남동파출소로부터 900여m, 차로 5분 거리다. 경찰이 가정폭력 신고가 들어온 곳(사람 표시)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24분이나 출동이 늦어 살인을 막지 못했다. [중앙포토]

살인사건 발생 장소(붉은 표시)는 한남동파출소로부터 900여m, 차로 5분 거리다. 경찰이 가정폭력 신고가 들어온 곳(사람 표시)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24분이나 출동이 늦어 살인을 막지 못했다. [중앙포토]

 
공교롭게도 두 신고 장소는 불과 9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한 동네였다. 게다가 앞선 신고는 1층 3호, 뒤이은 남자의 신고는 103호로 비슷했다. 가정폭력 신고 장소로 출동한 경찰관은 “주소 확인했다. 동일 건이다”고 보고했다.
 
현장을 정리한 뒤 순찰차에 오른 경찰관이 두 개의 신고가 별건이란 걸 깨달은 건 남자의 첫 신고 접수로부터 24분이 지난 뒤였다. 순찰차를 급히 몰아 현장으로 도착했다. 젊은 여성이 가슴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고, 나이 많은 여성은 손에 흉기를 쥐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여자친구를 살해한 현장을 목도한 남자는 넋이 나가 있었다.  
 
숨진 여성 이모씨(당시 34세)의 부모는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순찰차가 출동한 한남동파출소와 사건 발생 장소의 거리는 900여m, 자동차로 5분 거리였다. 경찰이 신고 내용과 주소만 제대로 확인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비극이었다.  
 홧김에 저지른 흉기 살해 이미지 [중앙포토]

홧김에 저지른 흉기 살해 이미지 [중앙포토]

 
법원은 경찰관의 과실이 명백해 직무상 의무를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1심 법원은 “이씨를 살해한 여성 박모씨가 60대로 비교적 나이가 많아 경찰관이 제때 도착했다면 충분히 제지할 수 있었으므로 직무상 의무 위반과 살인사건에는 상당한 인과관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국가가 이씨의 부모 등 유족 4명에게 1억70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정부는 항소했다. 이씨의 유족에게 범죄피해자보호법에 따라 이미 유족구조금 5200여만원을 지급했기 때문에 이를 손해배상액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항소심 법원은 국가가 유족구조금을 잘못 지급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정부의 항소는 기각했다.
 
국가가 잘못 지급한 구조금을 환수하려면 구조금을 지급 결정한 심의회에서 환수 결정을 해야 하는데,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고등법원 민사33부(부장 유해용)는 “국가는 심의회 결정을 거쳐 환수금액이 정해진 다음, 국세 징수의 예에 따라 납세 고지‧독촉‧체납처분‧공매 등의 절차로 진행해야 한다”며 “그러나 심의회 결정을 거쳐 환수금액이 정해졌다고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부산 연제구 연일초등학교 앞 옹벽에 설치된 긴급전화기. 자세를 낮추고 귀를 기울이는 경찰관을 그린 대형 벽화 가운데 귀 부분에 설치된 전화기로 112에 신고할 수 있다. [연합뉴스]

부산 연제구 연일초등학교 앞 옹벽에 설치된 긴급전화기. 자세를 낮추고 귀를 기울이는 경찰관을 그린 대형 벽화 가운데 귀 부분에 설치된 전화기로 112에 신고할 수 있다. [연합뉴스]

 
정부는 대법원에 다시 판단을 구했다. 이씨의 죽음에 대해 국가가 배상해야 할 책임이 없다는 항변에 대법원은 “공무원에게 부과된 직무상 의무는 사회구성원 개인의 안전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라며 “그 직무상 의무를 위반해 피해자가 입은 손해에 대해서는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범위 안에서 국가가 배상 책임을 진다”고 일축했다.
 
다만 법원이 산정한 손해배상액에서 이미 지급한 유족구조금을 빼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선 일리 있다며 수긍했다. 대법원 2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1심이 산정한 손해배상액 중 이미 지급한 유족구조금 5200여만원을 공제해 배상액을 다시 산정하라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고법이 파기환송심에서 구조금을 빼고 배상액을 다시 산정해 판결한 뒤 정부가 재상고하지 않으면 국가 배상 책임이 확정된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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