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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 중앙일보 외교안보선임기자 kim.sujeong@joongang.co.kr

[김수정의 포린 어페어즈] 트럼프의 수표 챙기기, 미국 소프트파워 추락 신호인가

11일 베트남 다낭 APEC회의에 모인 21개국 정상들. 아·태지역 경제협력을 증진하는 이 회의에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보호무역을 역설했다. [김상선 기자]

11일 베트남 다낭 APEC회의에 모인 21개국 정상들. 아·태지역 경제협력을 증진하는 이 회의에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보호무역을 역설했다. [김상선 기자]

14일 종료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은 국제 외교사에서 미국의 위상 변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사례로 꼽힐지도 모르겠다. 미국은 자체의 결점에도,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같은 인류 보편의 가치와 공동의 번영을 주창해 왔고 이를 통해 국제질서 리더로 자리매김해왔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아메리카 퍼스트’를 기반으로 ‘수표 챙기기’에 몰입하는 모습으로 전임 미국의 지도자들이 쌓아온 ‘소프트 파워’에 생채기를 내고 홀로 보호무역을 주장했다. 아시아 정책의 그림도 제시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미국’이 미국의 전부가 아닐 것이지만, 트럼프의 등장과 그의 행보가 미·중 파워 시프트의 연결 고리에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10~12일 베트남 다낭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21개국 정상들 중 유일하게 보호무역을 주장했다. 취임 전 자신이 ‘재앙’이라 했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대해 “지역을 포괄하는 무역협정에 다시 서명하지 않겠다”고 탈퇴를 확인했다. 오바마 등 전임 행정부가 10여년 공 들인 무역틀이다. ‘트럼프 장벽’이란 말도 나온 가운데 일본 등 11개 국가는 미국을 빼고 TPP 핵심 사항에 합의했다. APEC 정상들은 자유와 개방, 포용의 다자무역체제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APEC 선언문도 채택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은 “개방된 발전 만이 옳은 선택임을 역사가 가르쳐 줬다”며 개방 경제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앞서 트럼프가 한·중·일 3국을 방문했을 때 받은 의전은 화려했다.일본의 경우 국내에서 ‘과잉 의전’논란까지 일 정도였고, 중국은 자금성과 천안문 광장까지 내줬다. 한국도 최선을 다했다. 신각수 전 외교부 차관은 “중국은 원래 극진한 의전으로 실리를 얻어내는 외교 전통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며 “이번엔 세 나라간 의전 경쟁이 벌어진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과대 의전은 대선 후보시절 부터 무역불균형(연간 3000억 달러 적자)으로 중국을, ‘안보 무임승차’(free riding)론으로 한국과 일본을 압박한 트럼프를 구워 삶기 위한 방편이지만 한편으론 미국의 힘이 여전히 강함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번 순방은 국제사회 리더의 역할을 방기하는 미국과 이 틈새를 파고드는 이미 거대해진 중국의 모습을 보여준 계기가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먼저, 1992년 조지 H.W 부시 이후 미 대통령으로선 최장기 아시아 순방에 나선 트럼프는 신(新) 아시아 정책을 내놓지 않았다. 이성현 세종연구소 상임 연구위원은 “오바마 대통령의 ‘피봇 투 아시아’(Pivot to Asia,아시아 중시 정책) 이후 자신의 정책을 내놓을 기회를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13~14일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정상회의 및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북핵 및 남중국해 이슈를 다뤘지만 존재감은 떨어졌다는 평가다. EAS에 불참하려다 참모들의 권유로 참석키로 했다는 말도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외교 참모들의 지정학적 현실주의와 정치 참모들의 경제 민족주의에 갇혀 있다”며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에 근본적인 혼란이 생겼다”고 보도했다.
 
앞서 한·중·일 방문에서 트럼프는 전례없는 ‘쩐’외교를 보여줬다. 무역불균형(중국), 대북 정책 순화(한국), 대북 강경책 및 납북자 문제(일본) 등 현안에 맞춤형으로 대응하며 한국(약 100조)과 중국(약 282조)에서만 380조원의 수표를 끊어갔다. 정상회담 합의문은 마치 비즈니스 계약서 같았다. 일본도 상당 규모 투자협정을 했으나 구체적으로 수치가 나오진 않고 있다.
 
‘수표 외교’(checkbook diplomacy)란 말이 있다. 외교 영향력 확대를 위해 수표장(체크북)을 들고 다니며 경제 지원, 투자를 하고 다니는 걸 뜻한다. 중국의 대 아세안, 아프리카 외교가 대표적이다.이번엔 세계 경제력(GDP 기준) 1위인 미국이 각각 2·3·12위인 중국·일본·한국에 대해 ‘역(易) 수표 외교’를 한 셈이다. 그는 한·미장병을 앞에 두고서도 “(미국의)일자리 창출을 위해 여기 왔다”며 미국민을 대상으로 한 발언을 이어갔다. 국정수행 지지율이 38%까지 떨어진 트럼프의 내치용 외교였다.『신세계 질서와 한국』을 쓴 이백순 전 미얀마 대사는 “미국이 외교를 국내 정치에 대놓고 이용한 드문 사례”라고 말했다.
 
13일 아세안 의장국인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과 악수하는 트럼프 미 대통령. [뉴시스]

13일 아세안 의장국인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과 악수하는 트럼프 미 대통령. [뉴시스]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외교’도 실종됐다. 그는 시진핑 주석에게 인권 문제를 공개 거론하지 않았다. 마약사범에 대한 ‘초법적 처형’으로 비난받는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방문국에서 일반인들과의 접촉도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 등은 현지 대학에서 연설하고 일반인들을 접촉하며 미국의 가치와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주력했다.
 
미·중이 북핵과 무역불균형,남중국해 문제를 놓고 날을 세우진 않았지만, 향후 양국의 국제질서 주도권을 위한 경쟁은 더 세질 전망이다. 이성현 위원은 “19차 당대회를 통해 도광양회(韜光養晦·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림)의 파기를 선언한 시진핑은 공격 외교를 가속화할 것”이라며 “주변국을 자기쪽으로 불러들이는 네트워킹 전쟁이 치열해 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 언론보도문에 포함됐지만 청와대가 부인하면서 논란이 된 ‘인도·태평양 라인’도 그 한 예다. 신 전 차관은 “향후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와, 미·일·인도·호주의 ‘인도·태평양 라인’이 대결하는 시대가 펼쳐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신 대사는 “중국이 미국을 위협할 단계까지 가려면 수십년은 더 걸릴 것”이라며 “그 사이에 한국은 신뢰 외교를 토대로 통일을 이루고, 주변국에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국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김수정 외교안보선임기자  kim.su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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