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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칼럼] 적폐청산이 복수극이 안 되려면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퇴임 직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글을 읽어 보았다.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 몇 가지 글을 올렸다. 자서전 『운명이다』에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더 많은 유고까지 녹여 놓았다. “…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초연한 그 마음이 오히려 무겁다. 얼음 같은 냉정함은 칼날처럼 날카롭다. 산산이 부서진 꿈을 보며 얼마나 좌절했을까. 수치스러운 모욕에 얼마나 치를 떨었을까. 퇴임하자마자 그는 압박에 시달렸다.
 
“그(이명박 대통령)는 취임하자마자 임기가 아직 남아 있던 공공기관과 공기업, 문화·언론 분야 단체의 기관장들을 몰아냈다. 소관 부처와 감사원, 검찰 등 모든 권력기관을 총동원해서 그렇게 했다.… 마침내 나를 겨냥한 공격을 시작했다.” (『운명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저서 『운명』에 이렇게 썼다. “정치보복의 시작은 참여정부 사람들에 대한 치졸한 뒷조사였다.… 본인들에게서 흠이 잡히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거나 쥐어짜내기 시작했다.” 노 전 대통령은 “나하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많은 기업이 모두 세무조사를 받았다. 심지어 내가 자주 가던 식당도 세무조사를 당했다”고 했다. 그는 “그 모든 조사의 최종 표적은 노무현이었다”고 썼다.
 
아들 노건호씨가 관련된 500만 달러, 부인이 받아 쓴 3억원과 100만 달러가 공개됐다. 정상문 총무비서관이 대통령 특수활동비를 빼돌린 12억5000만원도 드러났다.
 
노 전 대통령은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고 했다. ‘논두렁 시계’는 수치스러웠다. 이인규 당시 중수부장은 국정원이 노 전 대통령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공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진국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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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수법은 이명박 정부만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채동욱 검찰총장의 사생활을 흘려 쫓아냈다. 대통령 기록물까지 끄집어내 고인이 된 노 전 대통령이 영해를 팔아먹었다고 몰아세웠다. ‘노빠’(노무현 지지자)들이 이를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직 대통령 주변 털기, 대통령 기록물, 특수활동비, 망신 주기, 공공기관장 몰아내기…. 어디서 보던 장면 아닌가.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민이 탄핵한 대통령이다. 그런 전직 대통령을 노 전 대통령과 비교하려는 건 아니다. 업보를 쌓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호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법 집행이 분풀이나 모욕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고 믿었는데, 돌아보니 원래 있던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운명이다』) 노 전 대통령은 아쉬워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랬을까.
 
“정권이 바뀌자 검찰은 정치적 중립은 물론이요, 정치적 독립마저 스스로 팽개쳐 버렸다.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 이러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중요한 것은 제도였다. 간부를 교체해 봤자 다음 정권이 또 바꾸면 그만이다. 입맛에 맞는 수사 결과를 갖다 바치면 제도 개혁을 잊어 버린다. 정보기관도 그렇다. 노 전 대통령이 정보기관의 독대 보고를 받지 않으려 한 것도 한번 맛을 들이면 끊을 수 없는 유혹이기 때문이다.
 
물론 제도만으로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하루아침에 하나회를 해체했다. 관련자들을 요직에서 몰아냈다. 그랬기에 성공했다. 엘리트 군인들이었다. 반발하면 위험한 작업이었다. 그렇지만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적폐청산도 많은 국민이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또다시 전 정권의 전철을 밟고 있지는 않은가. 굳이 모욕을 주어야 하나. 기가 막힌 시점에 청와대 문서들이 발견되고, 대통령비서실장까지 나서서 발표한다. 재판은 공개적인 모욕주기가 되어 간다. 까치 머리에 수의와 수갑, 그리고 호송차, 구속 기간 변칙 연장. 변기와 침대와 비아그라까지 야릇한 추측을 자극하는 수사 내용이 또 다른 논두렁 시계는 아닌가.
 
이 전 대통령 수사도 뜸을 들인다. 형사소송의 원칙보다 여론재판이 먼저 간다. 검찰 개혁, 방송 개혁은 법을 바꾸는 건 미뤄 놓고 사람만 바꾼다. 그러다 실패한 경험이 있건만 권력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역대 정권의 세금 빼돌리기는 밝혀져야 한다. 그렇지만 사나운 권력의 사냥개는 여전히 무섭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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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와 기사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