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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가을만 느끼기엔 너무 아픈 우리 역사 남한산성

기자
김순근 사진 김순근
남한산성 성곽.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돼있다. [사진 김순근]

남한산성 성곽.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돼있다. [사진 김순근]

 
다시 남한산성이 화제가 되고 있다. 소설가 김훈의 ‘남한산성’에 이어 이 소설을 영화화한 ‘남한산성’이 상영되면서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 도성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산성중 하나다. 사방으로 탁트인 시야와 물이 풍부하고 경작지도 있어 방어목적의 산성으로선 천혜의 요충지라 할만하다.
 
지금은 성곽길 걷기와 산행, 둘레길 등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명소가 됐지만 옛 산성의 정취만 느끼기엔 너무나 아프고 교훈적인 역사를 품고 있다.
  
 
난공불락의 전략적 요충지
 
 
성곽길을 한바퀴 도는데는 2~3시간 걸린다. [사진 김순근]

성곽길을 한바퀴 도는데는 2~3시간 걸린다. [사진 김순근]

 
남한산성은 조선 제16대왕 인조와 병자호란(1636.12.15~1637.1.30)을 빼놓으면 평범한 역사유적지에 불과하다. 11월 단풍과 낙엽으로 만추의 서정이 물씬 느껴지는 남한산성 성곽길을 걸으며 병자호란 당시 45일간에 걸친 항쟁이 조선 최대의 치욕적 사건인지 조선의 저력을 보여준 역사인지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자.
 
남한산성 성곽길을 걷다보면 난공불락의 요새임을 금새 알수 있다. 때문에 청태종이 조선군보다 10배나 많은 12만 군대로 수많은 공격을 시도했음에도 함락에 실패하자 강화도로 피신한 왕자 등 인질을 붙잡아 협박하는 ‘꼼수’로 항복을 받아냈다.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 [사진제공=CJ E&M]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 [사진제공=CJ E&M]

 
물론 청나라 군대가 성을 포위해 고립무원이 된 상태에서 식량 등 물자 부족으로 버티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적진 깊숙이 들어온 청나라 군대 역시 후방의 보급로가 조선군의 공격으로 차단될 위험이 있어 장기전이 불리한 상황. 조선을 침공할 때 백마산성 등 주요 성들을 우회해 곧바로 한양으로 진격했기 때문에 전방의 조선 군사력은 건재한 상태였다.
 
특히 청나라의 궁극적 목적은 명나라 멸망에 있었기에 ‘조선 길들이기’에 국력을 집중시킬수 없는 상황이었다. 후금(後金.원래 금나라이지만 이전 금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후금이라 칭함)의 2대 칸에 오른 청태종은 명나라 정벌을 위해 나라이름까지 바꾼 것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청태종의 명나라 정벌 야욕이 강했다.
 
 
초소건물인 군포가 있던 자리. 산성안에는 모두 125개의 군포가 있었느나 현재 남아있는 군포는 없다. [사진 김순근]

초소건물인 군포가 있던 자리. 산성안에는 모두 125개의 군포가 있었느나 현재 남아있는 군포는 없다. [사진 김순근]

 
국호 개명의 확실한 이유가 전해지지 않지만 주역의 음양오행설에 따른 것이라는 논리가 설득력이 있다.
청태종은 꺼져가는 등불신세인 명나라가 수많은 공격에도 끈질기게 버티는 것은 명나라의 밝을 명(明)이 불(火)를 뜻해 화극금(火克金)이 되어 금(金)을 제압하는 형세였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과거 조상인 여진족이 세운 금(金)이 금극목(金克木)의 논리로 목기운의 송(宋)나라를 제압했듯, 명나라를 멸망시키려면 수극화(水克火)가 되게끔 물과 관련된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 이에 청태종은 1636년 국호를 금(金)에서 청(淸)으로 바꿨다.  
 
 
성보다 낮게 쌓은 담인 여장(女墻).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활이나 총을 효과적으로 쏘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사진 김순근]

성보다 낮게 쌓은 담인 여장(女墻).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활이나 총을 효과적으로 쏘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사진 김순근]

 
이처럼 청나라는 명나라 멸망에 국력을 집중시키는 상황이었고, 조선 침공은 명나라 침공시 조선이 지원하지 못하도록 관계를 끊게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속전속결로 침공해 항복을 받고 빨리 돌아가는게 청나라의 전략이었다고 볼수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강화도로 피신한 왕자 등 인질들이 붙잡히지 않고 남한산성에서의 항쟁이 좀더 길어졌다면 청태종은 군사를 돌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8km 길이 산성, 성안팍으로 걷기 
 
 
산 정상과 봉우리를 연결한 성곽. 산성안에는 많은 우물과 샘이 있고 경작지도 많아 유사시 임시수도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를 갖췄다. [사진 김순근]

산 정상과 봉우리를 연결한 성곽. 산성안에는 많은 우물과 샘이 있고 경작지도 많아 유사시 임시수도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를 갖췄다. [사진 김순근]

 
남한산성은 좁고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산성의 중심문인 남문이 나온다. 지하철 8호선 남한산성입구역과 산성역 인근에서 산성으로 가는 4km정도의 둘레길이 나 있어 산성 아래서부터 걸어서 갈 수 있다. 주변에 위례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산성으로 가는 등산로도 많아졌다.
산성을 한바퀴 도는데 2~3시간 정도 소요되니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여유롭게 걷기에 좋다.
 
남한산성의 성문은 모두 4개가 있다. 편의상 동,서,남,북문이지만 남문은 지화문(至和門) 동문은 좌익문(左翼門), 북문은 전승문(全勝門), 서문은 우익문(右翼門) 등 각자 고유의 이름을 갖고 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남문. [사진 김순근]

가장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남문. [사진 김순근]

 
이중 남문은 4대문중 가장 크고 웅장하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 또한 이 남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왔고, 강화도로 피신하기위해 남대문까지 나갔다가 청나라 군대 출현소식에 다시 되돌아올때도 이 문을 통했다.
 
산성을 찾는 대부분의 방문객들도 이 남문을 통해 출입하고 성곽길을 걸을때도 남문을 중심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성곽길을 걷는 방법은 성안 성곽을 따라 걷는 방법과 성밖길을 따라가는 방법 등 두가지가 있다. 성안길은 전망을 즐기기에 좋고, 성밖길은 암문을 통해 성안팍을 오가며 걷는 재미가 있다.
 
 
북문 주변 성곽길. [사진 김순근]

북문 주변 성곽길. [사진 김순근]

 
산성은 청량산(479.9m)을 주봉으로 북쪽으로 연주봉(466m), 동쪽으로 벌봉(514m), 남쪽으로도 여러개의 봉우리를 연결하고 있어 사방으로 탁트인 조망권을 자랑한다. 약 8km 길이의 성벽은 낮은 곳이 3m, 높은 곳은 7m 내외로 견고하게 쌓아졌다.
성안 성곽길은 경사가 완만하지만 성벽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가 많아 외부에서 공격하기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이처럼 성곽길을 걷다보면 청나라의 대군이 쉽사리 함락할수 없던 이유를 알수 있다.
 
 
삼전도 항복에 빛바랜 45일 항쟁
 
산성내 볼거리로는 군사지휘소인 '수어장대(守禦將臺)'와 행궁(行宮)을 꼽을 수 있다.
 
 
수어장대.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조 때 동서남북에 각 1개씩 모두 4개의 장대가 있었으나 수어장대만 남아있다. 당시 단층 누각이었으나 영조때 이층으로 증축했다. [사진 김순근]

수어장대.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조 때 동서남북에 각 1개씩 모두 4개의 장대가 있었으나 수어장대만 남아있다. 당시 단층 누각이었으나 영조때 이층으로 증축했다. [사진 김순근]

 
남문 오른쪽에 있는 수어장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수어장대 오른쪽 옆 누각안에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이 있는데, 영조가 수어장대를 2층으로 만들면서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치욕과 청나라에 8년간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훗날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직접 지어 2층 문안쪽에 걸어놓은 것을 1989년 일반인들이 볼수 있게 전각을 만들어 별도로 전시해 놓았다.
 
 
무망루. 영조가 단층이 수어장대를 2층으로 증축하면서 바깥쪽에는 현재처럼 수어장대 편액을 걸고,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1968년 일반인이 볼 수 있게끔 무망루 편액을 수어장대 옆에 별도로 전각을 지어 이전해 공개하고 있다. [사진 김순근]

무망루. 영조가 단층이 수어장대를 2층으로 증축하면서 바깥쪽에는 현재처럼 수어장대 편액을 걸고,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1968년 일반인이 볼 수 있게끔 무망루 편액을 수어장대 옆에 별도로 전각을 지어 이전해 공개하고 있다. [사진 김순근]

 
인조는 이괄의 난을 겪은데다 후금(後金.원래 금나라이지만 이전의 금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후금이라 칭함)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대대적인 산성 개축에 나서고 유사시를 대비한 행궁도 지었다. 공교롭게도 인조는 행궁을 지은뒤 10년후인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면서 행궁의 조성목적에 맞게 사용한 유일한 왕이 됐다. 전쟁이 명분이었으나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대비였다 할 수 있다.
 
 
수어장대와 무망루 전각. [사진 김순근]

수어장대와 무망루 전각. [사진 김순근]

 
청나라는 1637년 1월26일 강화도에서 왕자 등 인질들을 붙잡아 남한산성측에 알리고 항복을 요구한뒤 4일만인 1월30일 한강 상류인 삼전도에서 항복을 받아낸다. 당시 높은 단에 거만하게 앉은 청태종은 인조가 꽁꽁언 차가운 강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할 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며 다그치자 인조가 바닥에 머리를 수차례 부딪혀 이마에 피가 흥건했다는 속설도 있다. 이처럼 삼전도 항복은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억된다.
 
 
수어장대 주변 성곽주변으로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사진 김순근]

수어장대 주변 성곽주변으로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사진 김순근]

 
그러나 남한산성 항전은 다르다. 성이 함락되지 않았고 왕자 등이 인질로 잡히는 돌발사태가 없었다면 후대에 귀감이 될 훌륭한 승리의 역사로 기록됐을 것이다.  
백성은 안중에도 없이 군주의 안위만을 생각해 청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주화파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명분으로 화해를 반대하는 척화파간 볼썽사나온 집안싸움만 뺀다면. 그래서 남한산성은 억울하다. 싸움에서 이기고도 패전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으니...
 
김순근 여행작가 sk4340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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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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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은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와 기사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