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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볼셰비키 혁명 이식 몰두했지만 중국에서 실패할 수 밖에 없던 이유

 
[거꾸로 읽는 러시아 혁명사⓷]소련 요원이 지도한 중국 공산당의 무장투쟁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중국 공산당이 1934년 10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370일에 걸쳐 9600km를 이동하며 근거지를 옮긴 대장정의 모습. 가운데 말탄 사람이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이 1934년 10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370일에 걸쳐 9600km를 이동하며 근거지를 옮긴 대장정의 모습. 가운데 말탄 사람이 마오쩌둥.

  
1921년 중국 공산당의 창당과 게릴라전, 그리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은 역사적인 드라마다. 그 과정에는 1917년 10월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러시아 혁명은 강대국의 압박과 자국의 내부 체제모순에 신음하던 전 세계 피압박 민족에 민족해방운동의 도화선 구실을 했다. 중국에서도 지식인들이 러시아 혁명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아 공산당 세포 조직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들이 조직화해 전국적인 규모의 중국 공산당을 창당하고 무장 투쟁으로 나서게 된 데는 소련의 역할이 크다. 볼셰비키는 1919년 3월 국제공산당조직인 코민테른을 만들어 중국 등지에 혁명 수출을 꾀했다. 모스크바에 국제 공산대학들을 세워 중국·한국·베트남 등의 젊은이들을 교육해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에 나서게 했다. 무엇보다 코민테른 요원을 중국에 줄줄이 파견해 공산당 창설부터 무장투쟁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고문 역할을 하게 했다. 말이 고문이지 실질적으로는 혁명에 간섭·개입하거나 지휘한 인물도 있다. 민족해방투쟁 지원으로도 볼 수 있지만 소련식 체제의 확산과 영향력 증대를 노린 혁명 수출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1921년 7월 23일~8월 2일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렸던 상하이 프랑스 조계(외국의 치외법권 지대)의 망지로(望志路) 106호(현재는 흥업로(興業路) 76호)의 집.

1921년 7월 23일~8월 2일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렸던 상하이 프랑스 조계(외국의 치외법권 지대)의 망지로(望志路) 106호(현재는 흥업로(興業路) 76호)의 집.

중국 공산당은 1921년 7월 23일~8월 2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외국의 치외법권 지대)의 망지로(望志路) 106호(현재는 흥업로(興業路) 76호)에 있는 리한준(李漢俊, 1890~1927)의 집에서 창립회의를 열고 공식 창당했다. 중국공산당의 역사적인 창당대회인 제1차 전국대표대회다. 중공일전회의, 일전대회, 제1차 당대회로도 부른다. 이렇게 시작한 중국 공산당은 지난 10월 베이징에서 제19차 당대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중국에 파견한 네덜란드 마르크스레닌주의자 헨데리크 스네블리트(1883~1942)는 중국 공산당이 1921년 상하이에서 창당대회를 열도록 지도했다. 마링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면서 창당대회에 참석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중국에 파견한 네덜란드 마르크스레닌주의자 헨데리크 스네블리트(1883~1942)는 중국 공산당이 1921년 상하이에서 창당대회를 열도록 지도했다. 마링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면서 창당대회에 참석했다.

 
중국 공산당은 창당 과정부터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았다. 1921년 6월 상하이에 도착한 코민테른 대표 마링이 이를 주도했다. 상하이 공산주의자 조직과 접촉한 마링은 중국 각지의 공산주의 조직 대표자들을 상하이에 모아 전국대표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상하이의 조직이 앞장서서 다른 지역 조직에 이를 통보하고 지역별로 2명의 대표가 모여 창당대회를 열기로 했다. 창당대회에는 중국인 13명과 외국인 2명이 참석했다. 창당 당원 13명 중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때까지 당에 남은 사람은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과 둥비우(董必武, 1886~1875)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숨지거나 당을 떠났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중국에 파견한 네덜란드 마르크스레닌주의자 헨데리크 스네블리트(1883~1942)는 중국 공산당이 1921년 상하이에서 창당대회를 열도록 지도했다. 마링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면서 창당대회에 참석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중국에 파견한 네덜란드 마르크스레닌주의자 헨데리크 스네블리트(1883~1942)는 중국 공산당이 1921년 상하이에서 창당대회를 열도록 지도했다. 마링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면서 창당대회에 참석했다.

 

1919년 5.4운동을 계기로 동아리 수준의 지역 공산당 세포조직은 만들었지만 전국 단위 조직활동이나 혁명에 대한 경험이 없었던 중국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코민테른이 지도해 중국 공산당을 만든 셈이다. 당시 마링이라는 이름으로 창당대회를 이끌었던 코민테른 대표는 본명이 헨데리크 스네블리트(1883~1942)로 네덜란드의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본국에서 철도 노동자로 노동운동을 하다 식민지였던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 인도네시아)로 옮겨 마르크스주의를 동남아시아에 처음 전파한 인물이다. 1920년 동인도 공산당 대표로 모스크바에 가서 코민테른 제2회 회의에 출석했다. 당시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동남아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하던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코민테른 대표를 맡겨 중국에 파견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스네블리트는 중국 공산당 창당을 목표로 움직였다. 그 결과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를 상하이에서 열 수 있었다.   
네덜란드 마르크스레닌주의자 헨데리크 스네블리트(1883~1942)가 1921년 12월 중국의 국부 쑨원을 만나는 장면.

네덜란드 마르크스레닌주의자 헨데리크 스네블리트(1883~1942)가 1921년 12월 중국의 국부 쑨원을 만나는 장면.

스네블리트는 중화민국 건국의 아버지로 삼민주의를 제창한 국민당의 쑨원(孫文,1866~1925)도 만나 여러 가지 조언을 하고 중국을 떠났다. 그는 그 뒤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네덜란드 본국에서 활동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에서 공산주의계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끌다 1942년 독일군에 잡혀 동료들과 함께 '인터내셔널가'를부르며 총살당했다.
코민테른 요원인 블라디미르 네이만(1898~1938)은 니콜스키라는 가명으로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에 참가해 연설했다.

코민테른 요원인 블라디미르 네이만(1898~1938)은 니콜스키라는 가명으로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에 참가해 연설했다.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에는 마링으로 불린 스네블리트 외에도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또 다른 외국인이 참석했다. 니콜스키로 불린 러시아인이 참석해 연설까지 했다. 니콜스키는 블라디미르 네이만(1898~1938)이 본명으로 코민테른 극동국 서기로 일하면서 극동공화국의 인민혁명군 정보과 대표 자격으로 중국에 파견됐다. 극동공화국은 러시아 내전 시기인 1920~22년 러시아 극동지역에 존재했던 명목상의 독립국가로 볼셰비키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 네이만은 1921년 말까지 상하이에 머물르다 떠났다. 그 뒤 1925년까지 중국 동북지역에서 근무하다 1922년 새로 건국된 소련으로 돌아갔다. 1926~28년 시베리아의 치타에서, 1929~30년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근무하다 1933~35년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코민테른 요원으로 근무했다. 본국으로 돌아간 그는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 벌어진 대숙청에 휘말려 1938년 하바롭스크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돼 총살됐다. 1956년 복권됐다. 
 
리한준의 형인 리슈청(李書城, 1882~1965). 국민당에서 일하며 국공대화를 주장했다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초대 농업부장을 지냈다.

리한준의 형인 리슈청(李書城, 1882~1965). 국민당에서 일하며 국공대화를 주장했다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초대 농업부장을 지냈다.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린 상하이 가옥의 실제 소유주는 당시 그곳에 살고 있던 리한준의 형인 리슈청(李書城, 1882~1965)이었다. 리슈청은 후베이(湖北)성 출신으로 쑨원의 중국동맹회에 가입해 반청운동에 뛰어든 이후 혁명파 인사로 활동했다. 1912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 북양군벌이 장악한 베이징 정부(1921~28)에서 육군총장을 지내고 국민당이 난징에 세운 국민정부(1927~49)에서도 요직을 맡았다. 1926년 7월 군벌 정리를 위한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북벌에는 찬성했다. 하지만 그가 1927년 4월 상하이 쿠데타로 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여기에는 반대했다. 국민당 좌파로 분류되는 그는 국민당 정부에서 일하면서도 장제스에 사사건건 맞서며 공산당과 국공 제휴를 주장했다. 태평양 전쟁 이후 국공내전 기간 중 평화촉진위원회를 결성해 내전 담판을 시도했다. 중화인민공화국에 들어선 뒤 초대 농업부장 등을 지냈다.
 
자신의 거주지에서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를 연 리한준(李漢俊, 1890~1927).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지식인이다.

자신의 거주지에서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를 연 리한준(李漢俊, 1890~1927).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지식인이다.

리슈청의 동생인 리한준은 1902~18년 어린 나이에 일본에 유학해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했다. 모국어인 중국어와 일본어는 물론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에도 능통했다. 그는 중국 공산당 창당 당원이었음에도 베이징 출신인 장궈타오(張國燾, 1897~1979)와 불화를 겪으면서 탈당하고 국민당으로 옮겼다. 당시 국민당은 제1차 국공합작으로 공산당원이나 공산당 전력자를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1926년 장제스가 반공정책을 앞세워 공산당원을 탄압하면서 사정이 변했다. 리한준은 1927년 장제스를 추종하는 군벌에 체포돼 처형됐다.
장궈타오(張國燾, 1897~1979)는 중국 공산당 창당당원이지만 마오쩌둥과 불화하다 1938년 국민당에 투항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자 캐나다로 망명했다.

장궈타오(張國燾, 1897~1979)는 중국 공산당 창당당원이지만 마오쩌둥과 불화하다 1938년 국민당에 투항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자 캐나다로 망명했다.

 
리한준을 출당하게 한 장궈타오는 베이징대 철학과 출신으로 1920년 5.4운동에서 학생운동가로 활동했으며 1920년 베이징 공산당 조직 결성에 참여했다. 1921년 창당대회에 참석한 뒤 노동자 파업을 지휘했으며 1927년 공산당의 난창(南昌)봉기에 참가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지도부로 떠올랐다. 모스크바로 가서 교육을 받고 귀국한 뒤 소련 노선을 추종했으며 농촌혁명을 주장하는 마오쩌둥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대장정을 거쳐 1936년 연안에 도착했지만 1938년 탈주해 국민당으로 투항했다. 국공내전이 끝나고 공산당이 대만을 제외한 중국 전역을 장악하자 홍콩을 거쳐 캐나다로 망명했다. 
천두슈(陳獨秀, 1879~1942)는 베이징대 문과학장 출신의 지식인으로 중국 공산당 초대 총서기를 지냈지만 1929년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한 데 이어 말년에는 자신의 공산당 활동을 후회하다 숨졌다.

천두슈(陳獨秀, 1879~1942)는 베이징대 문과학장 출신의 지식인으로 중국 공산당 초대 총서기를 지냈지만 1929년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한 데 이어 말년에는 자신의 공산당 활동을 후회하다 숨졌다.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의 초기 조직 결성과 혁명 노선에 깊숙이 개입했을 뿐 아니라 총서기 인사도 좌우했다. 중국 공산당의 대표인 총서기 자리는 초기에는 지식인 출신이 맡았다. 1921~27년 초대 총서기를 지낸 천두슈(陳獨秀, 1879~1942)는 베이징대 문과학장 출신이고, 그 후임으로 1927~28년 2대 총서기를 맡았던 취추바이(瞿秋白, 1899~1935)는 러시아어 번역가이자 작가였다.
  
천두슈는 1927년 중국공산당 제5차 전국대회에서 소련과 코민테른으로부터 ‘우경투항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그해 7월 실각했다. 당시 소련은 노동자 무장봉기를 중심으로 하는 소비에트식 혁명을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뜻을 받든 취추바이가 그해 8월 코민테른으로부터 총서기로 낙점 받았다. 취추바이는 그때까지 노동자 무장혁명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 천두슈의 우경기회주의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취추바이(瞿秋白, 1899~1935)는 러시아어 번역가이자 작가 출신의 지식인으로 중국 공산당 2대 총서기를 지냈다. 결핵 요양중 국민당에 잡혔는데 전향을 거부하고 처형됐다.

취추바이(瞿秋白, 1899~1935)는 러시아어 번역가이자 작가 출신의 지식인으로 중국 공산당 2대 총서기를 지냈다. 결핵 요양중 국민당에 잡혔는데 전향을 거부하고 처형됐다.

 
취추바이는 중국공산당의 첫 무장봉기인 8월의 난창(南昌)봉기를 시작으로 12월의 창사(長沙), 12월의 광저우(廣州) 등에서 도시 무장봉기를 벌였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소련식 도시 무장봉기를 이용한 지역 소비에트 정부 수립 시도는 중국이란 몸에 맞지 않는 옷이었다. 그 당시 난창봉기가 벌어진 8월 1일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창립일로 치고 있다. 천두슈는 1929년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에 반발해 트로츠키주의자로 전행했으며 1932~37년 국민당 감옥에 갇혔다. 석방된 뒤 폭력혁명에 염증을 느껴 자신이 걸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활동을 후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2년 충칭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취추바이는 1935년 결핵 요양을 위해 상하이로 가다 공산당 포로가 위치를 국민당에 밀고하는 바람에 체포됐다. 전향을 거부하다 그해 6월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총살당했다.
 
소련과 코민테른은 중국의 국부 쑨원을 설득해 혁명 지원세력으로 삼으려고 했다. 중국 국민당의 쑨원은 1923년 8월 장제스 등 대표단을 소련에 파견했다. 이들은 12월까지 소련에 머물며 공산당과 붉은 군대, 그리고 사관학교의 조직과 운영을 살펴보고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코민테른 요원이 미하일 보로딘(1884~1951)이 등장한다. 보로딘은 1923년 9월 소련과 코민테른의 대표로 중국에 파견된 뒤 쑨원을 만나 조언자가 됐다. 그는 1923~27년 광둥 지역의 중국 국민당 정부에 소련 대표 자격으로 머물며 주요 정치문제에 개입했다.
중국에 파견된 코민테른 요원 중국에 파견된 코민테른 요원 미하일 보로딘(1884~1951). 쑨원을 설득해 제1차 국공합작을 이뤘다. 중국 공산당은 이를 통해 힘을 기를 수 있었다.

중국에 파견된 코민테른 요원 중국에 파견된 코민테른 요원 미하일 보로딘(1884~1951). 쑨원을 설득해 제1차 국공합작을 이뤘다. 중국 공산당은 이를 통해 힘을 기를 수 있었다.

 
당시 국민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허용하고 공산당원의 개별 입당을 허용했는데 이는 쑨원이 보로딘의 충고를 따랐기 때문이다.  보로딘은 부르주아 정당인 국민당이 노동자·농민·프티부르주아와 민족부르주아가 힘을 합친 민주혁명동맹으로 전환하는 개조작업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보로딘이 중국에 머무는 동안 거둔 가장 중요한 업적이 바로 이를 성사시킨 것이다. 이를 통해 역사적인 제1차 국공합작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1924년 6월에는 광둥(廣東)성 황푸(黃埔)에 황푸 군관학교로 불리는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를 개교해 국민당과 공산당의 군사 간부들을 양성했다. 이 학교는 3년 동안 6기에 걸쳐 7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쑨원은 이 학교에서 자신의 혁명에 동원할 군사 인재를 확보하려고 했다. 
 
중국에 파견된 코민테른 요원 미하일 보로딘(1884~1951). 쑨원을 설득해 제1차 국공합작을 이뤘다. 중국 공산당은 이를 통해 힘을 기를 수 있었다.

중국에 파견된 코민테른 요원 미하일 보로딘(1884~1951). 쑨원을 설득해 제1차 국공합작을 이뤘다. 중국 공산당은 이를 통해 힘을 기를 수 있었다.

이 학교의 체제는 소련 사관학교와 소련군 조직을 본떠 군사 교관과 함께 정치 교관을 뒀다. 김원봉, 최원봉, 오성륜 등 한국인 교관과 학생도 일부 있었다. 장제스가 교장을 맡았으며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가 정치 교관을 맡았다. 소련 군사고문단이 파견돼 군사교관을 맡았다. 소련에서 군사학을 공부한 녜룽전(聶榮臻, 1899~1992), 군사학교인 윈난(雲南) 강무당 출신의 예젠잉(葉劍英, 1897~1986), 1기 졸업생으로 졸업 뒤 학교에 남은 쉬샹첸(徐向前, 1901~1990) 등 공산당원들도 교관을 맡았다. 이들은 중국 공산정권 수립에 혁혁한 공을 세워 ‘개국원수’ ‘10대원수’에 포함된다. 국공합작이 호랑이를 키운 셈이다. 
  
코민테른은 1920년 민족해방운동 지원과 관련한 '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대한 결의'를 통해 중국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에 들어가 조직 기반을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1923년 6월에 열렸던 제3차 전국대표회의에서 제1차 국공합작을 지시했다.  중국 공산당원이 개별적으로 국민당에 가입해 국민당을 좌파정당으로 바꾸고, 공산당원이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운 곳에서 국민당의 기치 아래 움직이며, 우수한 국민당원을 공산당원으로 포섭하는 것이 숨은 의도이자 실질적인 목적이었다. 이에 대해 총서기 천두슈는 물론 당내 발언권이 강했던 장궈타오도 반대했다. 당 대 당의 대등한 위치에서 국민당과 협상하고 연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당원수가 작고 그때까지 지식인 집단에 지나지 않았던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1차 국공합작은 소련 지도부의 의지와 코민테른의 공작이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겠다. 1차 국공합작은 공산당의 의도를 눈치 챈 국민당의 장제스가 1927년 4·12 상하이 반공 쿠데타로 무력을 동원해 공산당을 진압하기 시작하면서 결렬됐다.
 
 
보로딘은 1925년 쑨원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국민당의 정치고문 역할을 계속했다. 하지만 1927년 장제스가 반공정책을 펼치며 소련인을 고문에서 면직하자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으로 돌아간 보로딘은 영어 신문 모스크바 뉴스 편집기자(1932~49), 타스통신 부국장(1932~34), 소비에트 인포메이션뷔로 편집장(1934~49)을 맡으며 언론인으로 일했다. 하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1949년 소련의 적으로 지목돼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유형을 떠났다. 그는 2년 뒤 수용소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총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소련에서 사후 명예회복은 이뤄졌다.
1928~31년 중국 공산당 총서기를 맡았던 노동운동가 출신의 샹중파(向忠發, 1880~1931). 무장봉기 노선을 추구했다 실패했다.

1928~31년 중국 공산당 총서기를 맡았던 노동운동가 출신의 샹중파(向忠發, 1880~1931). 무장봉기 노선을 추구했다 실패했다.

 
 
그 무렵 소련의 스탈린은 1926년 11~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확대회의에서 연설하며 중국공산당이 반제국주의운동을 펼 것과 노동자 조직 외에 농민도 무장시키고 지도할 것을 강조했다. 이듬해 7월 중국공산당 중앙 확대회의와 중앙상임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 등이 농민 중심의 무장봉기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아직은 시기가 아니었다. 스탈린 지시의 핵심은 소련식 무장봉기를 통한 혁명에 실려 있었다.
 
리리싼(李立三, 1899~1967)은 1930~31년 중국 공산당 선전부장을 맡아 도시노동자 봉기를 중심으로 한 리리싼 노선을 밀어붙였다가 실패해 소련의 비판을 받았다. 오늘날 중국에서 '리리싼 노선'은 외국의 요구나 사례를 무비판적으로 맹종하거나, 자신의 실력이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혁명이나 노선을 일단 밀어붙이고 보는 극좌모험주의를 가리키는 비판적인 용어로 쓰인다.

리리싼(李立三, 1899~1967)은 1930~31년 중국 공산당 선전부장을 맡아 도시노동자 봉기를 중심으로 한 리리싼 노선을 밀어붙였다가 실패해 소련의 비판을 받았다. 오늘날 중국에서 '리리싼 노선'은 외국의 요구나 사례를 무비판적으로 맹종하거나, 자신의 실력이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혁명이나 노선을 일단 밀어붙이고 보는 극좌모험주의를 가리키는 비판적인 용어로 쓰인다.

중국 공산당은 1928~31년 노동운동가 출신의 샹중파(向忠發, 1880~1931)가 3대 총서기를 맡으면서 무장봉기 노선으로 전환했다. 실제로는 1930년 선전부장인 리리싼(李立三, 1899~1967)이 당권을 손아귀에 넣고 당을 좌지우지한 결과다. 리리싼은 소련의 의중에 맞춰 도시노동자들을 조직화해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이른바 ‘리리싼 노선’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중국 현실에 맞지 않은 이 노선은 실패를 거듭했다. 실패를 목격한 코민테른은 입장을 바꿔 1931년 리리싼 노선을 ‘극좌편향’ ‘좌경모험주의’로 비판했다. 결국 1931년 중국공산당 대회에서 샹중파는 총서기에서 밀려났고 리리싼도 불신임당했다. 오늘날 중국에서 '리리싼 노선'은 외국의 요구나 사례를 무비판적으로 맹종하거나, 자신의 실력이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혁명이나 노선을 일단 밀어붙이고 보는 극좌모험주의를 가리키는 비판적인 용어로 쓰인다.     
 
리리싼은 당에서 실각하고 모스크바로 소환당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국제노동조합 인터내셔널(The Red International of Labour Unions)의 중국 대표로 머물렀다. 1946년 귀국했으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노동부장을 맡아 1954년까지 근무했다. 문화대혁명 당시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주자파로 비판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중국 공산당 3대 총서기 샹중파는 내부자의 밀고로 국민당에 체포돼 1931년 총살당했다. 
 
파벨 미프(1901~1939)는 모스크바 손중산 공산대학에서 자신이 교육한 중국인 볼셰비키들과 함께 중국에 가서 공산당의 혁명 노선을 지도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본명이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포르투스다.

파벨 미프(1901~1939)는 모스크바 손중산 공산대학에서 자신이 교육한 중국인 볼셰비키들과 함께 중국에 가서 공산당의 혁명 노선을 지도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본명이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포르투스다.

이 과정에서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요원 파벨 미프(1901~1939)는 소련에서 자신이 교육시킨 왕밍(王明, 1904~74)에게 당권을 맡겼다. 왕밍은 코민테른이 쑨원의 아호를 따서 설립한 모스크바의 손중산 공산대학에서 미프가 교육한 이른바 ‘28일의 볼셰비키’로 불리는 중국인 공산당원의 하나다. 미프는 중국 혁명사에서 족적이 뚜렷하다. 본명이 마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포르투스인 그는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1917년 10월혁명 뒤 공산당에서 활동했으며 1918~20년 러시아내전에도 참가했다. 1920~21년 야코프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을 마치고 1923~25년 우크라이나에서 공산당 조직 활동을 했다. 그 뒤 모스크바 손중산 공산대학에서 1925년부터 부교장으로 일하다 1927년 교장을 맡았다.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수많은 중국인을 혁명가로 양성했다. 그 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극동국 대표로 중국에 파견돼 활동했다. 그는 1927년의 제5차, 1928년의 6차 중국 공산당대회에 참석했으며 1931년에는 중앙위원회에서도 중국 공산당의 의사 결정에 개입했다. 

파벨 미프(1901~1939)는 모스크바 손중산 공산대학에서 자신이 교육한 중국인 볼셰비키들과 함께 중국에 가서 공산당의 혁명 노선을 지도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본명이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포르투스다.

파벨 미프(1901~1939)는 모스크바 손중산 공산대학에서 자신이 교육한 중국인 볼셰비키들과 함께 중국에 가서 공산당의 혁명 노선을 지도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본명이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포르투스다.

 
1925년 중국인 혁명가를 기를 목적으로 개교한 모스크바 손중산 공산대학의 중국인 학생 중에는 유력 국민당원의 자녀도 있었고 공산당원도 있었다. 학생 중 공산당원만 모여 ‘중국 공산당 손중산 공산대학 모스크바 지부’를 만들기도 했다. 그 뒤 코민테른 극동대표로 중국에 파견된 미프는 자신이 직접 키운 28명의 학생과 함께 움직였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사에서 ‘28인의 볼셰비키’로 불리며 소련 추종 세력의 전위대가 됐다. 미프가 임시 당서기를 맡긴 왕밍은 모스크바 손중산 공산대학 학생회장 출신으로 이 그룹의 선봉이었다. 미프는 이들을 앞세워 중국 공산당의 노선 투쟁에 개입했다. 노동자 봉기를 앞세운 리리싼 노선을 포기시키고 소련을 추종하는, 이른바 국제노선을 걷도록 한 것도 그의 입김이었다. 소련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국제파로 불린다.

 
당시 미프는 중국공산당에서 무소불위의 인물로 통했다. 하지만 소련으로 귀국한 그는 1938년 반혁명 테러리스트 조직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돼 사형당했다. 1956년 소련에서 명예회복이 이뤄졌지만 그동안 중국에서 그의 족적은 거의 지워졌다. 중국 공산당은 새로운 근거지 옌안(延安)으로 옮긴 뒤 1940년대에 정풍운동을 벌여 미프 추종세력을 '소련식 교조주의자'로 비판했다.
보구(博古, 1907~1949)는 25세인 1932년 중국 공산당 총서기에 올라 1935년까지 맡았다. 본명이 친방셴(秦邦?)인 그는 모스크바 손중산 공산대학에 유학한 '28인의 볼셰비키'의 한 명이다. 소련의 뜻에 따라 국민당을 상대로 정규전을 벌였다가 참패해 대당정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보구(博古, 1907~1949)는 25세인 1932년 중국 공산당 총서기에 올라 1935년까지 맡았다. 본명이 친방셴(秦邦?)인 그는 모스크바 손중산 공산대학에 유학한 '28인의 볼셰비키'의 한 명이다. 소련의 뜻에 따라 국민당을 상대로 정규전을 벌였다가 참패해 대당정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28인의 볼셰비키는 미프의 지원으로 왕밍에 이어 보구(博古, 1907~1949)가 1932년 25세의 나이로 총서기를 맡아 중국 공산당을 장악했다. 본명이 친방셴(秦邦宪)인 보구는 1935년까지 중국 공산당을 장악했다. 그동안 그는 국민당 군대를 상대로 정규전을 펼쳤다가 실패했다. 당시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190~1974)이 리더(李德)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불리며 활동했다. 브라운은 상하이를 거쳐 중국 남동부 장시(江西)성에 있던 장시 소비에트(1931~37년 존재)로 잠입했다. 그는 코민테른 대표로서 총서기 보구를 앞세워 중국 공산당 혁명군사위원회를 장악했다. 장제스의 토벌군이 다가오자 마오쩌둥은 유격전술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를 무시하고 정규전을 벌이자고 주장해 관철했다. 그 결과 중국 공산당의 홍군은 대패하고 병력의 상당수를 잃었다. 중국 공산당의 위기였다. 
 
코민테른에서 중국에 파견한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190~1974). 리더(李德)라는 이름으로 활약한 그는 대장정에 참가한 유일한 유럽인이다. 대장정 전 그는 28인의 볼셰비키를 앞세워 중국 공산당의 홍군으로 하여금 국민당 군대를 상대로 정규전을 치르게 했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이는 대장정으로 이어졌으며 게릴라전을 주장한 마오쩌둥이 당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됐다.

코민테른에서 중국에 파견한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190~1974). 리더(李德)라는 이름으로 활약한 그는 대장정에 참가한 유일한 유럽인이다. 대장정 전 그는 28인의 볼셰비키를 앞세워 중국 공산당의 홍군으로 하여금 국민당 군대를 상대로 정규전을 치르게 했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이는 대장정으로 이어졌으며 게릴라전을 주장한 마오쩌둥이 당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됐다.

이에 따라 1934년 10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370일 동안 9600km를 이동해 중국 서북부 산시(陝西)성 옌안(延安)까지 근거지를 옮기는 대장정을 치렀다. 대장정 도중 장궈타오는 마오에 맞서 티베트로 옮기자고 했다가 병력의 상당수를 잃고 당에서 발언권을 상실했다. 대장정 도중인 1935년 쭌이(遵義) 회의에서 보구는 대대적인 비판을 받고 총서기직에서 밀려났다. 보구는 1946년 비행기 사고로 숨졌다. 브라운은 유럽인으로선 유일하게 대장정에 참가했으며 1939년 소련으로 돌아갔다. 2차대전 종전 이후 조국인 동독으로 귀국해 중국 전문가로 활동했다. 중국에서 활동한 코민테른 요원 중 드물게 처형을 면했다. 
대장정 중인 1935년 1월 열린 쭌이회의 장면의 기록화. 이 회의에서 소련에서 교육 받고 소련식 도시폭동과 정규전을 고집했던 '28인의 볼셰비키'는 몰락하고 중국식 농촌혁명과 유격전을 주장했던 마오쩌둥이 당권을 장악했다.

대장정 중인 1935년 1월 열린 쭌이회의 장면의 기록화. 이 회의에서 소련에서 교육 받고 소련식 도시폭동과 정규전을 고집했던 '28인의 볼셰비키'는 몰락하고 중국식 농촌혁명과 유격전을 주장했던 마오쩌둥이 당권을 장악했다.

 
쭌이 회의에서 28인의 볼셰비키 중 장원톈(張聞天, 1900~1976), 왕자샹(王稼祥, 1906~74年), 1月25日), 양산쿤(楊尙昆, 1907~98)은 현실을 깨닫고 마오쩌둥 노선을 따르기로 했다. 중국 공산당이 소련과 코민테른의 입김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장원텐은 1935~43년 공산당 총서기를 맡았다. 
 
1934~35에 이뤄진 대장정의 모습.

1934~35에 이뤄진 대장정의 모습.

소련은 1921~35년 중국에 코민테른 요원들을 파견해 소련식 볼셰비키 혁명을 이식하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중국 현실에 맞는 마오쩌둥 노선이 자리 잡으면서 중국 공산당은 비로소 제자리를 잡았다는 평가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49년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서서히 힘을 쌓으면서 소련에도 맞서기 시작했다. 힘이 부족하면 수모를 참고 고개를 숙이지만, 힘을 얻으면 제 목소리를 내는 중국식 대외관계의 전통은 중국 공산당의 역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소련은 선의로 각국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했다기보다 사심을 품은 채 소련식 혁명 수출에 더 몰두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소련이라는 간판 뒤에 숨은 러시아 팽창주의의 민낯일 수도 있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100년을 맞는 지금 되돌아보는 역사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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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은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와 기사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