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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러시아 혁명사 ①] 체코군단, 피바다 뚫고 시베리아 횡단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러시아 혁명은 수많은 사건을 낳았다. 혁명의 파편들이다. 하나하나가 영화화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기막힌 사연으로 넘친다.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을 정리해 ‘러시아 혁명의 미시세계사’로 연재한다. 

 
 
 
 
러시아 혁명이 낳은 숱한 사건 중에서 단연 백미는 ‘체코 군단’이라고 생각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소속이었으나 러시아군에 포로가 된 뒤 독립을 위해 총부리를 거꾸로 돌린 군인들이다. 6만 명이 넘는 체코 군단은 러시아혁명과 내전으로 더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맞서 싸울 수가 없자 철도를 이용해 내전이 벌어지는 시베리아를 횡단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이들의 드라마를 알아보자.
 
시베리아 철도 노선.

시베리아 철도 노선.

러시아에서 1917년 11월7일 볼셰비키가 적위대를 동원해 임시정부 청사인 겨울궁전을 점령하는 10월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자 이에 반발하는 반혁명군이 백군을 조직해 저항에 나섰다. 이렇게 발발한 러시아 내전은 1922년까지 계속됐다. 적군이 120만, 백군이 150만의 사상자를 낸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었다. 10월혁명 이듬해인 1918년 3월 볼셰비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맞서 싸우던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 오스만튀르크)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정을 맺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했다.
서부전선으로 가서 독립을 위한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에 나선 체코 군단 장병의 모습.

서부전선으로 가서 독립을 위한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에 나선 체코 군단 장병의 모습.

 
이 협정으로 가장 난처해진 측이 체코 군단이었다. 러시아군과 함께 싸우던 체코 출신 군인들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던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젊은이들은 군대에 징집돼 군사 훈련을 받고 세르비아나 러시아 같은 연합군과 싸우게 됐다. 일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동맹군이 아닌 연합군의 일원으로 싸우면서 전후 독립 국가를 건설할 꿈을 꾸었다. 일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19세기 말부터 고향을 떠나 러시아로 망명해 살았는데 이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러시아와 함께 싸우는 것이 자국 독립에 유리하다는 입장이었다. 징집돼 전선에 투입된 체코와 슬로바키아 청년들도 이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러시아군에 투항했다. 일부는 의도적으로 탈영해 러시아 쪽으로 집단 귀순하기도 했다.
 
보급을 위해 잠시 정차한 체코 군단 열차의 모습.

보급을 위해 잠시 정차한 체코 군단 열차의 모습.

 
체코인들은 프랑스, 이탈리아, 세르비아 전선에서도 싸웠지만 러시아의 체코 군단이 가장 규모가 컸다. 이들을 러시아군의 지원을 받아 포로수용소가 아닌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독일군과 싸웠다. 1914년 8월 러시아 최고사령부는 전쟁포로를 포함해 자국에 사는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로 구성된 부대의 구성을 승인한 것이 시작이다.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던 러시아의 지향점과도 들어맞는 조치였다. 러시아 군복을 입고 러시아제 무기를 든 체코와 슬로바키아 출신 군인들은 그해 10월 러시아 제3군 산하로 배속돼 전선에 파견됐다. 당시 러시아제국 육군 제3군은 갈리시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갈리시아는 현재 폴란드 동남부와 우크라이나 서북부를 구성하는 지역으로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였다.
 
안락한 교수 자리를 버리고 체코 독립 운동에 뛰어든 마사리크가 1917년 2월혁명과 10월혁명 사이에 러시아를 방문해 체코 군단을 격려하고 있다. 내전에 개입하지 않고 귀국해 서부전선으로 가서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사워 독립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안락한 교수 자리를 버리고 체코 독립 운동에 뛰어든 마사리크가 1917년 2월혁명과 10월혁명 사이에 러시아를 방문해 체코 군단을 격려하고 있다. 내전에 개입하지 않고 귀국해 서부전선으로 가서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사워 독립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자신들을 후원하던 제정러시아가 무너지고 뒤를 이어 정권을 차지한 볼셰비키가 중·동 유럽 슬라브계 소수민족을 탄압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전투를 중지하자 체코 군단은 대안을 모색했다. 체코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토마스 마사리크는 이들에게 지침을 내렸다. “가급적 내란에 휘말리지 말고 목숨을 잘 보전해 서방으로 가라”는 내용이었다.체코군단은 무장력을 바탕으로 자력으로 서부전선으로 가서 계속 싸우려고 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러시아 북부 무르만스크나 아르한겔스크 등을 통해 이들을 서방으로 데려오려고 영국과 프랑스 등이 러시아 서부로 군대와 배를 보냈지만 여의치 않았다. 결국 이들은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배편으로 귀국하기로 했다. 서쪽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막혀 있었으니 서방으로 가서 프랑스나 이탈리아 전선에서 추축국과 싸우려면 시베리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지구를 돌아 유럽에 도착한 다음 서부전선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구를 거진 한 바퀴 도는 긴 여정이다.
이들은 무기와 식량, 기차를 확보하고 러시아의 동쪽 끝, 태평양을 향해 이동했다. 수많은 열차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베리아 철도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했다. 내전 중인 나라를 가로 지르는 일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온갖 이유로 이동은 느렸다. 겨울철 얼어붙은 시베리아를 지날 때는 ‘설국열차’를 방불케 하는 풍경을 연출했을 것이다. 이 기나긴 열차 행렬에는 병영은 물론 병원과 우체국, 신문사, 은행까지 있었다. 의지와 시스템이 모두 필요한 여정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은 이 둘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체코 군단을 태우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의 모습.

체코 군단을 태우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의 모습.

 
체코 군단은 볼셰비키에 호의적이진 않았지만 서부전선으로 가는 일이 급했기에 내전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게 체코 군단의 원칙이었다. 필요하면 백군과 함께 이동하기도 했으며, 그 반대로 백군 지휘관과 열차에 싣고가던 러시아 정부 소유의 백금 등을 볼셰비키에 넘기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공받기도했다. 혁명에 반대하는 연합군은 체코 군단이 철수를 돕기 위해 무기 등을 지원했다. 당시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도 실제로는 영토적 욕심에서 이뤄졌지만 표면상 명분은 체코 군단의 철수 지원이었다. 1918년 7월17일 우랄 산맥 남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제정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가족을 서둘러 총살한 것도 체코 군단이 이 도시로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 때문에 초조해진 볼셰비키가 무리수를 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체코 군단의 시베리아 이동은 참으로 세계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체코 군단이 1918년 시베리아 횡단에 이용한 열차 위에서 경계를 펴고 있다.

체코 군단이 1918년 시베리아 횡단에 이용한 열차 위에서 경계를 펴고 있다.

이들은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와 제정러시아를 복구하려는 백군 사이의 내전이 한창이던 러시아와 시베리아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바다에 도착했다. 1918년 7월6일 체코군단이 극동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점령한 것이다. 연합군에 동조하는 체코군단은 지역의 적군을 몰아내고 이 항구를 연합군 항구로 선포해 모든 연합군 선박에 개방했다. 이들은 1920년까지 머물면서 배편을 수배해 유럽으로 차례차례 떠났다. 체코군단이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할 당시 발간한 신문 ‘덴니크’는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지 17일 만에 소식을 처음 전했다. 그 뒤에도 두 차례 더 기사화했다. 세계사적 사건의 주인공인 체코군단이 또 다른 세계사적인 사건인 3.1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시베리아 힝단열차에 탄 체코 군단 병사들의 모습.

시베리아 힝단열차에 탄 체코 군단 병사들의 모습.

 
 
독특한 것은 당시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군의 무기의 일부가 체코군단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이다. 당시 체코 군단의 라돌라가이다 장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비교적 나중에 귀국했는데 그가 지휘하던 부대가 보유 무기의 일부를 한국독립군에게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체코 군단이 국내에 가져와 계속 보관했던 기념물 중에는 당시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은비녀와 반지 등도 있다. 독립군이 연해주와 만주에 이주한 우리 동포들로부터 이렇게 독립자금을 현물로 받아 이를 체코 군단 관계자들에게 주고 대신 무기를 구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체코 군단이 이용한 러시아제 무장열차. 대포와 기관총 진지까지 갖췄다.

체코 군단이 이용한 러시아제 무장열차. 대포와 기관총 진지까지 갖췄다.

독특한 것은 체코군단이 보유하던 무기는 미국산이라는 점이다. 산업시설이 부족했던 제정 러시아는 자국 육군의 기본무기인 모신나강 소총(M1891)을 충분히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의 레밍턴사에 150만 정을, 웨스팅하우스사에 180만 정을 각각 주문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75만 정을 제작했는데 수송 문제로 47만 정만 납품했다. 혁명으로 납품을 못 하고 남은 28만 정은 미군이 인수했다. 일부는 러시아 혁명에 개입하기 위해 투입된 연합군에 공급됐다. 5만 정은 체코 군단에 제공됐다. 
북로군정서군을 이끈 김좌진 장군

북로군정서군을 이끈 김좌진 장군

대한독립군을 이끈 홍범도 장군.

대한독립군을 이끈 홍범도 장군.

 
이 체코 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면서 일부 무기를 한국 독립군에게 넘긴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는 체코 무기라고 알려졌지만 이는 체코 군단이 보유하고 있던 '미국산 러시아 소총'이었다. 독립군은 이 무기를 바탕으로 화력을 강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홍범도 장군이 1920년 6월 6~7일 벌인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의 대한 독립군과 기좌진 장군이 이끈 북로군정서군을 비롯한 독립군 연합부대가 10월 21~26일 치른 청산리 전투에서 사용한 무기가 이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체코군단의 시베리아 횡단은 물론 한국의 독립운동은 이처럼 대단히 국제화된 환경 속에서 이뤄졌다.
 
 
체코 군단에 이용한 러시아제 무장열차의 모습. 대포와 기관총 진지가 달렸다.

체코 군단에 이용한 러시아제 무장열차의 모습. 대포와 기관총 진지가 달렸다.

이들이 귀국했더니 전쟁은 이미 끝나고 신생 체코슬로바키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체코 군단의 활약상과 지식인들의 외교활동은 독립을 얻어내는 소중한 밑거름이었다.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1920년 중반까지 6만7739명이 귀국했다.여기에는 그사이 생긴 체코 군단 병사들의 신부와 아이들도 포함됐다. 시베리아를 이동한 것은 열차와 군인이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의 혼이었던 셈이다.
 
체코 군단 차가자들의 세운 체코 군단 은행 본점 모습. 자금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오랫동안 의문이었다.

체코 군단 차가자들의 세운 체코 군단 은행 본점 모습. 자금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오랫동안 의문이었다.

체코 군단 장병은 새로 생긴 조국의 수도 프라하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남은 군자금으로 ‘체코군단은행’을 설립해 운영했는데 볼셰비키에 전량 넘겨주기로 했던 러시아 제국의 국고인 백금을 일부 남겨 왔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확인된 것은 아무 것도없다. 이들은 불굴의 인간 의지가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1919년 1월 체코 군단 장병이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귀국 행진을 하고 있다. 프라하의 중심뷘 바츨라프 광장이다.

1919년 1월 체코 군단 장병이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귀국 행진을 하고 있다. 프라하의 중심뷘 바츨라프 광장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짧은 역사>
슬라브족인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오랫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정체를 살펴보면 기가 막힌다. 1804년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지배하던 다양한 영지를 모아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언했다. 이름뿐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던 프란츠 2세는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1804년 프랑스 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자 이에 대응해 격을 맞추려고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1867년 산하 헝가리 왕국(국왕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겸임)에 별도 의회를 세워주고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면서 생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복잡한 민족 구성. 하늘색이 체코인, 갈색이 슬로바키아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복잡한 민족 구성. 하늘색이 체코인, 갈색이 슬로바키아인이다.

이 제국에는 1910년 인구조사 기준 독일계(23.36%)와 헝가리계(19.57%)는 물론 체코어(12.54%)와 슬로바키아어(3.83%)를 쓰는 서슬라브계, 세르보크로아티아어(10.98%)와 슬로베니아어(2.4%)를 쓰는 남슬라브계, 폴란드계(9.68%), 우크라이나계(7.78%), 루마니아계(6.26%), 이탈리아계(1.50%) 등 수많은 소수 민족이 살고 있었다.
체코인들은 헝가리인처럼 자치를 인정받고 싶었다. 체코를 이루는 보헤미아왕국의 왕관을 차지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도 의회 설립과 자치권 부여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보헤미아 3중제국을 세울까 고민도 했지만 영내 다른 슬라브족을 자극할 가능성이 있는 데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터져 흐지부지됐다. 당시 체코를 이루는 보헤미아와 모라바 지역은 오스트리아 제국 직할령이었고 슬로바키아는 헝가리 왕국 소속이었다.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언어는 거의 같았지만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체성이 조금 다른 셈이다. 이들은 1차대전이 끝난 뒤 1919년 체코슬로바키아라는 한 나라를 이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침략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와 갈라졌던 이들은 종전 뒤 다시 한 나라가 됐다. 하지만 이들은 공산체제가 붕괴된 1992년 국민투표를 거쳐 1993년 두 나라로 갈라섰다.
 
<외교로 체코군단을 지원한 지식인 독립운동가 마사리크>
체코 지식인 독립운동가로 나중에 초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을 지낸 토마시가리크 마사리크(1850~1937)는 체코 군단의 구성과 시베리아 횡단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체코 군단을 지원하며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에 앞장섰던 토마시 마사리크(왼쪽)와 동료 에드바르트. 베네스. 각각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초대와 2대 대통령을 지냈다.

체코 군단을 지원하며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에 앞장섰던 토마시 마사리크(왼쪽)와 동료 에드바르트. 베네스. 각각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초대와 2대 대통령을 지냈다.

마사리크는 빈 대학 철학부를 마친 철학박사로 빈과 프라하의 대학에서 교수로 일했다. 그는 1890~1893년 청년체코당을, 1900~1918년 현실주의자당에서 정치 활동을 했다. 하지만 그는 처음에는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1909년 남슬라브족인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들의 정치연맹 구성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가 반역 혐의를 뒤집어 씌워 기소한 사건을 변호하던 크로아티아인 변호사 힌코힌코비치(1854~1929)를 지원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소수민족 억압을 다시 한번 확인한 그는 압제에서 벗어나려면 독립이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해 12월 딸을 데리고 이탈리아 로마를 거쳐 스위스 제네바로 망명했다. 제네바에서 망명객으로 지내던 시절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를 떤 외국에서 거주하는 체코와 슬로바키아인을 규합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 스위스에서 시작했지만 차츰 범위를 프랑스, 영국, 러시아와 미국으로 넓혔다. 나중에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국제사회와의 접촉도 활발하게 진행했다. 전 세계를 돌며 강연과 기고 활동을 하고 각국 정부에 체코와 슬로바키아인의 입장을 전달하고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은 저절로 얻어지지 않았다.
 
마사리크는 1915년에는 프랑스 파리를 거쳐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는 런던에 머물며 지금도 명성이 자자한 ‘슬라브와 동유럽 연구대학(School of Slavonic and East European Studies)’ 창설에 기여했다. 이 학교는 현재 런던의 명문대학인 UCL(University College London)의 일부가 됐다. 마사리크는 런던의 또 다른 명문대학인 킹스칼리지의 슬라브학 연구 교수로 강의를 맡기도 했다. 그는 1차대전 내내 체코 내 정보네트워크를 가동해 연합군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국제관계에서 공짜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뭔가 공적을 쌓으려고 노력했다.
 
1915년 10월 런던에서 강의를 시작한 그는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도 있었으나 이듬해 프랑스로 건너가 정부 관계자를 상대로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위해 필수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를 설득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2월혁명이 터져 차르 체제가 무너지고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그해 5월 런던을 떠나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체코 군단을 만나 격려하고 활동을 함께했다. 그는 체코군단의 귀국 작업이 한창이던 러시아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 도쿄로 거쳐 1918년 4월 미국에 도착했다.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동분서주 끝에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이 마무리됐다. 진정한 독립은 결코 거저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무력만으로도 얻을 수 없다. 힘과 외교 같은 실력에 국제사회에 대한 끊임 없는 설득과 노력이 합쳐져야 얻을 수 있음을 마사리크의 삶은 잘 보여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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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은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와 기사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