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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 다이어리] 룸살롱의 기억

이경희 국제부 차장

이경희 국제부 차장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이 성추문으로 물러났다. 가깝게는 몇 년 전, 멀게는 30년 전에 당했던 여성들도 이제는 말해야 한다고 폭로하면서다. 와인스타인 건을 계기로 전 세계 여성이 성폭력 피해 고발에 동참하는 ‘미투(#MeToo)’ 운동도 SNS상에서 퍼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초등학생 때 테니스부 코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가 15년 만에 처벌을 끌어낸 김모(26)씨가 다른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나섰다.
 
십수 년 전 기자 초년병 시절, 어느 중견 가수가 음악 담당 기자들을 데리고 룸살롱에 갔다. 여기자는 나뿐이었다. 술이 한 순배 돌고 나니 여성 접대부들과 맥주병을 돌려 걸리면 술을 마시거나 상대에게 입맞춤하는 게임이 시작됐다. 나는 게임에선 배제됐지만 그 자리에서 빠지진 않았다. 경쟁지 기자들은 모두 있는데 나만 빠지면 소위 물을 먹거나 기싸움에서 밀릴 수 있다는 초조함과 오기 때문이었다.
 
[일러스트=김회룡기자]

[일러스트=김회룡기자]

이는 내가 겪은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도 발언권이 있는, 기자라는 직업 특수성 때문에 다른 분야에 비해 직접적인 피해는 덜했을 것 같다. 버티다 보니 세상은 조금 나아졌고, 이제는 내가 혹여 후배들을 희롱하는 일은 없나 조심해야 하는 연차가 됐다.
 
모르는 사이에서 벌어지는 ‘묻지마 성폭행’을 제외한 성폭력은 대개 성별의 문제라기보다는 권력의 문제다. 권력을 쥔 자가 위계의 하층부에 놓인 약자들의 인격까지 침해하는 폭력이다. 배우 귀네스 팰트로는 22세 때 와인스타인에게 성추행당하고도 20여 년간 침묵한 이유에 대해 “할리우드 상층부에 여성이라곤 누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고 뉴욕타임스(NYT)에 반문했다. 일터에서의 성희롱과 성폭력은 여성들을 좌절시켜 유리천장을 강화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그러니 그런 세월을 감당하면서도 일을 포기하지 않고, 남자를 혐오하는 대신 (룸살롱에서 질퍽대지 않을 것 같은) 신뢰할 만한 짝을 찾아 결혼도 하고, 미래는 그래도 조금은 나아지겠지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아이도 낳아 키우는 워킹맘들은 얼마나 대단한가.
 
십수 년 전 그날, 흥청망청한 가운데 남자 기자 한 명이 접대부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지 말라고 단호히 거부해 내심 고마웠던 기억이 난다. 그 역시 경쟁사 기자에게 흠 잡히기 싫어 오기를 부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쌓여 사회가 이만큼이나마 바뀐 게 아닐까.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말이다.
 
이경희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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