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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lee.youngjong@joongang.co.kr

평양서 울려오는 비명…"끄떡없다"던 北, 허세 접고 읍소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평양서 울려오는 비명 … 대북제재 약발 먹히나 
 
북한이 대북제재로 인한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구체적 증세까지 열거하며 대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어떤 제재에도 끄떡없을 것”이라며 버티던 이전과 확 달라진 분위기다. 국제사회는 이참에 김정은의 셈법을 고쳐놓겠다면서 고삐를 바짝 당기는 형국이다. 핵·미사일 도발 모드를 잠시 멈추고 호흡조절에 들어간 북한은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해 보인다. 강도 높은 대북제재에 직면한 평양의 내부 분위기를 들여다보고 속내를 짚어본다.
 
북한은 체제 내부에서 벌어진 사건·사고나 피해상황을 좀처럼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 폐쇄적 특성에다 주민에게 끼칠 부작용 등을 우려해서다. 2004년 4월 평북 용천역에서 발생한 큰 폭발사고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관측이 나왔지만, 아직도 구체적 내용은 베일에 싸여 있을 정도다. 그런 북한도 ‘피해조사위’를 꾸려 상황을 적극 알리고 지원을 요청한 적이 있다. 1990년대 중후반 대규모 수해와 기근 사태로 200만~300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다. 당시 북한은 ‘큰물피해 조사위’를 만들어 유엔의 대북지원을 이끌어 내는 창구로 활용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런 전례 때문에 북한의 ‘제재피해 조사위’ 출범은 눈길을 끈다. 이 위원회는 지난달 23일 이용호 북한 외무상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국가적 차원의 피해조사위 가동과 조사활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존재가 확인됐다. 조사위는 지난 20일에는 담화를 통해 “주민들의 일반 생활용품까지 이중용도의 딱지가 붙어 제한받음으로써 어린이들과 여성의 권리 보호와 생존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고 비난하는 등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북한은 “미국과 그 추종세력이 공화국에 끼친 물질적·도덕적 피해를 철저히 조사·집계하는 걸 사명으로 한다”며 조사위를 내세웠다.
 
피해조사위는 대북제재에 맞서는 북한의 전술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재 무용론과 함께 “미 제국주의의 고립압살 책동을 분쇄하자”고 주장하던 데서 ‘피해자 코스프레(costume play)’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유엔과 국제적십자는 물론 인도주의 협력기구 무대에서 읍소에 나선 모습이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도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듯하다. 그는 지난 7일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7기2차 전원회의에서 대북제재 대책을 유난히 챙겼다. 연설에서 언급한 20여 개 항목 중 5개가 제재 관련 내용으로 파악된다. 그는 “제재 압살 책동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화를 복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기본 열쇠가 바로 자력갱생”이라고 강조했다. 봉쇄 수준의 대북압박에 맞서 외부로부터의 자원 공급 없이도 버틸 수 있는 체제를 갖추자는 주장이다.
 
관영 선전매체들은 현 상황을 ‘엄혹한 난국’이라고 규정한다. 마치 94년 김일성 사망 직후 “지금은 어려운 시기”라고 토로하던 걸 연상시킨다. 특히 전력과 석탄 생산이 강조된다. 어제 자 노동신문은 1면 사설에서 “전력과 석탄 생산은 적대세력들의 초강도 제재를 짓부수는 최전선”이라고 주장했다.
 
선전·선동의 초점은 제재로 인한 민생파탄 책임과 불만을 미국과 서방국가 쪽으로 돌리는 데 맞춰진다. 만약 김정은의 핵·미사일 도발이 초강도 제재를 자초했다는 쪽으로 불똥이 튀었다가는 낭패란 점에서다. 자칫 김정은의 핵심 정책기조인 경제·핵 병진노선이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평양을 시작으로 지방 주요 도시를 이어가며 연일 반미 군중시위를 벌이도록 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꼬여가고 있다. 엘리트나 부유층이 주 고객인 주유소의 휘발유값이 급등하고 시장물가도 들썩인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쌀과 환율 등은 장마당과 암달러의 힘으로 일단 큰 동요 없이 버티는 상황이지만 앞으로 대북제재가 심화되고 장기화할 경우 흔들릴 수 있다”고 귀띔했다. 올겨울이 고비란 얘기다.
 
대북압박의 파고는 거칠어진다. 유럽연합(EU)은 지난 16일 전면적 대북투자 불허 조치와 함께 대북송금 한도를 현재 1만5000유로(약 2000만원)에서 5000유로(약 667만원)로 크게 줄이는 독자제재를 내놓았다. 현재 4000명 규모인 북한 노동자의 채용도 금지했다. 스웨덴은 북한이 40년 넘게 장기 연체해온 자동차 대금 27억 크로나(약 3721억원)의 상환 문제를 다시 꺼냈다. 스위스와 핀란드도 북한에 떼인 돈을 받아내겠다는 입장이다. 유엔은 북한에 동상 건립을 발주해준 아프리카 14개 국가를 무더기 조사하기로 했다. 잇따른 외교공관 폐쇄 조치 등까지 이어지며 북한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렸다.
 
중국까지 가세한 대북제재 공조 국면에서 북한은 러시아를 산소호흡기로 택했다. 9월 말부터 최선희 외무성 북미국장을 러시아에 두 차례 파견했고, 러시아의 6자회담 특임대사 방북 등을 통해 공조를 모색 중이다.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주북 러시아 대사는 북·러 사이의 철도 및 항만 연계 경협사업인 나진-하산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는 등 손뼉을 마주치려 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 카드로는 역부족이란 평가다.
 
문재인 정부는 유엔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불가피하다는 점과 철저한 이행을 강조한다. 하지만 내심 대화국면으로의 전환을 꾀하기 위한 페이스 조절에 공을 들인다. 7월 북한의 잇단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도발 때 우리 정부 차원의 독자제재 방침을 공언하고도 석 달째 미적거리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국민과 국제사회의 비판여론에도 불구하고 800만 달러 규모의 대북지원을 결정해 대북제재 국면에 스스로 균열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어정쩡한 틈을 비집고 북한은 격렬한 대남 비난을 퍼붓는다. 대남기구인 민족화해협의회는 13일 담화에서 “남조선 당국은 북을 제재·압박해 대화에 나오지 않을 수 없게 하겠다는 개꿈을 꾸고 있다”고 비방했다. 우리 정부를 압박해 대북제재의 주축을 흔들겠다는 의도다. 정부가 적극적 제재·압박을 구사해 김정은 정권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 내는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다.
 
북한과의 대화에 마음이 쏠린 문재인 정부는 캘린더만 쳐다보다 허송세월했다. 6·15 공동선언 17주년과 8·15 광복절, 10·4 선언 10주년에 기대를 걸었지만 북한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요즘엔 내년 2월 평창 겨울올림픽에 북한 선수단이 참가하면 모든 게 풀릴 것처럼 집착한다. 이런 잘못된 기대와 전략부재로는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할 올겨울 한반도 정세를 견뎌낼 수 없다. 국제공조와 북한 사이에서 눈치만 보다간 인심도 잃고 실리도 챙기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질 것이란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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