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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한 글자면 충분해

유지원의 글자 풍경
 
『훈민정음』의 ‘제자해’에서 어금닛소리들인 ㆁ(옛이응) · ㄱ · ㅋ · ㄲ의 변화상을 설명한 부분

『훈민정음』의 ‘제자해’에서 어금닛소리들인 ㆁ(옛이응) · ㄱ · ㅋ · ㄲ의 변화상을 설명한 부분

“ㆁ(옛이응)은 비록 어금닛소리에 속하지만 ㅇ(이응)과 비슷하다. 마치 나무의 움이 물에서 나와 부드러운 것과 같다. 아직 물의 기운이 많다. ㄱ은 나무가 된 것이고, ㅋ은 나무가 번성하게 큰 것이며, ㄲ은 나무가 나이 들어 장대한 것이다. 여기까지 모두 어금니에서 본뜬 소리들이다.”
 
훈민정음이 상상력의 근원인 까닭
‘훈민정음’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대상에 붙은 이름이다. 1443년에 한국어를 위해 새롭게 발명된 ‘글자 체계’인 한글의 첫 공식 이름인 동시에, 그로부터 3년 후인 1446년, 세종대왕과 당대 최고의 학자들인 집현전 학사들이 발간해낸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한글의 매뉴얼 책인 『훈민정음』은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세종대왕의 ‘어제서문’으로 시작해, 글자에 대한 ‘해설’들과 ‘예제’를 거쳐, ‘정인지 서문’으로 맺어진다.  
 
‘정인지 서문’이 ‘서문’인데 마지막에 등장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왕이 쓴 ‘어제서문’이 가장 앞에 나오기에, 신하로서 겸양을 드러내고자 가장 뒤로 보낸 것이다.
 
‘정인지 서문’은 우주와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당대의 철학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서문의 내용은 정인지 개인의 생각이라기보다는 그 시대 언어학 서적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유다. 요약하면 이렇다. “천지자연의 만물에는 두루 기운(氣)이 흐른다. 그 기운이 사람에게 흘러들어 다시 소리로 나온다. 소리에는 서로 다른 생성 위치, 맑고 탁함, 느리고 빠름 등이 있으니, 이것은 인류보편적이다. 하지만 지역마다 풍토가 다르기에 그만큼 더 자주 나타나는 소리들이 서로 다르고, 언어도 다르다. 이것은 문화특수적이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도, 글자의 ‘생태적’ 성격을 이토록 아름답고 설득력 있게 드러내는 문헌은 드물다.  
 
한글의 소리와 모양이 보여주는 ‘결속력’
한글은 초성 · 중성 · 종성의 음소들이 모여 한 음절을 이룬다. 가령, ‘ㅎ’ ·‘ㅏ’ ·‘ㄴ’이 모여 ‘한’을 만든다.
 
초성의 경우, 입 안의 발성 기관에 따라 소리의 종류를 크게는 다섯 계열로 나눈다. 어금니 근처에서 혀가 꺾이는 ㄱ계열, 혀끝의 ㄴ계열, 입술의 ㅁ계열, 이빨의 ㅅ계열, 목구멍의 ㅇ계열이다.
 
다섯 계열의 소리는 오행 및 다섯 계절(늦여름 포함)과도 일치시켰다. 예를 들어, 목구멍소리의 ㅇ계열은 촉촉이 젖어있어 물이고 겨울이며, 혓소리의 ㄴ계열은 활동성이 강해 활활 타오르는 불이고 여름이다.
 
『훈민정음』의 ‘제자해’에서는 ‘어금닛소리’ ㄱ계열을 예로, 이 계열 소리들의 맑고 탁함(여림과 셈)과 글자의 모양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한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사라진 ㆁ(옛이응)은 콧소리에 가깝고 받침의 –ng 소리를 낸다. 목구멍소리(물소리, 水)인 ㅇ으로부터, 혀뿌리가 이어지는 구간의 어금닛소리(나무소리, 木)인 ㄱ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있으니, –ng는 g음을 품는다. 옛이응은 이렇게 젖은 목구멍의 물소리 ㅇ에 나무의 움이 튼 듯한 ㆁ의 모양을 가진다.
 
나무가 정말 나무다워지는 건 ㄱ이다. ㄱ이 자라서 커지면 ㅋ이 된다. ㄱ을 두 개 위아래로 쌓아서 ‘적층’을 할 법도 한데, 획 하나를 붙여 ‘가획’을 한 것은 세종대왕의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디자인 감각이 빛나는 대목이다. ㄱ이 나이가 들어 탁해지고 늙으면 양 옆으로 엉겨서 ㄲ이 된다.
 
우리말과 우리글에는 이렇게 우리 소리의 천변만화뿐 아니라 만물이 순환하는 생명의 섭리가 담겨있다. 현대 언어 과학의 엄밀한 학문적 기준에 비록 온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글자의 체계를 세워가는 과정의 합리성과 설득력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과학적’ 태도를 보여준다.
 
한국어의 소리들과 한글의 모양들은 세계 어떤 언어와 문자와의 관계보다 결속력이 강하다. 이런 특성은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태도를 드러낼 뿐 아니라, 현대 한국인에게 즐거운 상상력을 일으키기도 한다.
 
소리와 뜻과 모양과 정서가 하나로
어느 가을 아침이었다. 잠에서 막 깨려던 순간, 상상의 이미지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한국어 ‘사랑’이라는 단어였다. ‘사람’과 닮은 ‘사랑’이 나타나, 그 동적인 ㅇ 받침이 정적인 ㅁ 받침을 돌돌 밀고 갔다. 아, ‘사람’을 움직여 살게 하는 동력은 ‘사랑’이구나!
 
‘살아’가고(生) ‘삶’을 이루고 ‘사람’이 되고 ‘사랑’을 하는 것은 언어학적 근거로 따지면 모두 어원이 분분하지만, 우리는 이 유사한 소리와 모양들로부터 즐거운 상상을 누릴 수가 있다.
 
실제로 ‘음상(音象)’ 혹은 ‘음성상징’이라는 개념이 있어, 각각의 소리들은 나름의 독특한 이미지들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한글은 한국어 고유의 음성상징들을 유난히 잘 북돋워낸다.
 
세계 대부분의 언어에서, 아기가 어머니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인 ‘엄마’는 m의 소리를 가진다. 아기가 처음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리로, 푸근하고 부드럽다. 조용히 발음해보면, 입의 앞쪽인 입술이 움직인다. 한편, ‘그윽히’를 천천히 발음하면 그 뜻만큼이나 어른스러운 소리가 난다.
 
ㅅ 초성이 들어있는 한국어 의성의태어들을 소리 내어 보면, 입 안에 싱그러운 바람이 스친다. 소로소로 샤락샤락 싱송생송… 스스스 바람이 일며 시옷들이 ㅅㅅㅅ 솟아오르는 듯하다. 샘처럼 솟구치고 송송 솟아나며, 생생하고 싱그러워, 살아있고 살아가는 느낌이다.
 
한국어는 한 사려 깊은 탁월한 언어학자에 의해 음성의 소리 · 뜻 · 모양 · 정서의 심상이 체계적으로 시각화한 글자를 축복처럼 선물 받았다. 그 언어학자는 물론 세종대왕, 글자는 한글이다.
 
한국어 음성상징에서 긍정적 측면의 심상만 보자면, ‘사랑’의 ㅅ은 생(生)을 연상시키고 ㄹ은 활력(活)을 일으킨다. ㅅ은 에너지이고, ㄹ은 운동을 떠오르게 한다. ㅏ는 내적으로 수렴하는 ㅓ와 달리 외부를 향해 확장되고 열려있다. 마치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에너지처럼. 사람은 멈춰 있고 사랑은 굴러간다. 사랑이 사람 사이에 흘러들어 서로를 연결한다.
 
‘사랑’이라는 한국어 단어 속에서는 소리와 뜻과 모양조차 이렇게 서로 사랑을 한다. 언어와 문자가 이런 유형의 유희적이고 유기적인 결속을 하는 상상의 즐거움은 한국어와 한글을 쓰기에 한국인들이 함께 누릴 수 있다.
 
그러니 한국어에서는 어떤 수식도 없어도, ‘사랑’ 한 단어면 충만하다. 시옷, 아, 리을, 아, 이응, 이 다섯 소리의 조합이면 사랑의 모든 것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유지원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저술가·교육자·그래픽 디자이너. 전 세계 글자들, 그리고 글자의 형상 뒤로 아른거리는 사람과 자연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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