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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전쟁 레퀴엠

민은기 서울대 교수 음악학

민은기 서울대 교수 음악학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뿐이다.” 네덜란드의 현인 에라스뮈스의 말이다. 전쟁이 주는 광기와 참상은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남긴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길이 없는 전쟁이 얼마나 많은 인간을 흉악한 괴물로 만들었던가. 사람들은 전쟁의 끔찍한 비극을 겪을 때마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외쳤고 어떻게든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 마음은 수많은 반전(反戰) 노래로, 그림으로, 또 영화로 전해진다. 그래도 전쟁은 여기저기서 다시 일어났지만.
 
30년이 지났건만 젊은 시절 ‘플래툰’을 통해 느꼈던 전쟁의 광기는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흥분한 군인들이 양민을 잔인하게 학살하던 장면, 동료들을 태운 헬기가 떠나는 하늘을 향해 양팔을 벌린 채 총탄에 쓰러지는 군인, 그리고 사방에 전사자들이 뒹굴고 한편에선 불도저가 시체를 묻는 장면까지. 그때 흐르던 새뮤얼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때문에 내 마음은 한없이 무너져 내렸고. ‘공동경비구역 JSA’의 초소에서 들리던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는 또 어떤가. 같은 언어를 쓰는 같은 땅의 청년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대립의 부조리를 이보다 더 강하게 호소할 수 있을까.
 
영국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도 그런 염원으로 탄생한 대표적 반전 음악이다. 이 곡은 1962년 영국 코번트리에 새로운 성당이 세워진 것을 기념해 작곡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1940년 11월 14일, 도시는 독일군의 공습으로 하룻밤 사이에 공장의 4분의 3이 파괴되고 4000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14세기에 세워진 미카엘 대성당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22년이 지나 바로 그 자리에 새 성당이 세워진 것이다. 이미 전쟁이 끝난 지 오래지만 그 가혹한 상처로 많은 이는 여전히 고통 받고 있었다. 게다가 베를린에 도시를 가르는 장벽이 세워지고, 미국의 첩보기가 쿠바에서 찍은 소련의 탄도미사일 기지 사진이 공개되면서 전쟁의 위협이 다시 고조되고 있던 참이었다.
 
양심적 병역 거부를 택할 만큼 평화주의자이자 반전주의자였던 브리튼은 이날을 위한 음악으로 ‘레퀴엠’을 선택한다. 원래 레퀴엠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미사용 음악이니 기념공연을 아예 종교의식으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하긴 끔찍한 전쟁의 기억을 간직한 장소에서 연주될 곡으로 레퀴엠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음악이 또 있을까. “진노의 날, 바로 그날이 세상을 잿더미로 만들어 다윗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리로다.” 심판의 날. 죄를 엄히 묻는 신 앞에 선 인간의 공포가 다급하고 음산한 음악 속에 절절하게 배어난다.
 
이 곡의 분위기가 우리에게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니다. 죽음의 애통함과 처절함은 모차르트의 ‘레퀴엠’에도 가득하고, 베르디의 ‘레퀴엠’에서도 죽음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격렬하다. 그러나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이 다른 진혼곡들과 다른 점은 “신이 최후의 심판 날에 나를 구원하시리라”는 희망의 기도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전쟁 레퀴엠’은 윌프레드 오언의 유명한 시 ‘이상한 만남’을 가져와 더 비극적으로 그 긴 곡을 마무리한다. “나는 그대가 죽인 적군이라오. 나는 그대를 이 어둠 속에서 알아보았소. 어제 나를 찔러 죽일 때에도 그대는 지금처럼 그렇게 얼굴을 찌푸렸기에.” 두 죽은 병사가 나누는 대화다. 곡의 종말이 더욱 처절하게 들리는 것은 시인 자신도 불과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전사했기 때문이리라.
 
전쟁의 위협이 피부로 느껴지는 요즘이다.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결코 전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피한다고 해서 반드시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누구도 전쟁을 가볍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선한 전쟁도 제일 나쁜 평화보다 더 끔찍한 법이다. 전쟁에 낭만은 없다. 시인이 전쟁의 비애를 경고하고 음악가가 진혼곡을 연주하는 이유다.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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